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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식민지 시대 - 항일과 친일

조선공산당도 ‘일제통치 타도·조선 독립’이 목표였다

by 낮달2018 202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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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①]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 김재봉(1890~1944)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식민지 치하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과제를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후 38도선 이남에 친미 반공 국가가 세워지면서 잊히기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이들이 벌인 계급투쟁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이념 저편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이 잊힌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을 돌아본다.[기자말]

▲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 김재봉 (1890~1944)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은 1918년 4월, 이동휘(1873~1935, 1995 대통령장) 등이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결성한 한인사회당이었다. 이동휘는 3·1운동 뒤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부임해 1920년 중엽, 소련과의 관계 강화를 통한 무장투쟁을 위해 임정의 전면개편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임정을 떠나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였다.

 

한편 1920년 1월,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러시아 볼셰비키 당의 한인 지부인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위원장 김철훈)는 이듬해 5월, 또 다른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이후, 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은 ‘상해파’, 김철훈의 이르쿠츠크 공산당은 ‘이르쿠츠크파’로 불리게 되면서 당 창립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코민테른(1919년 모스크바에서 결성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 조직,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이들의 통합을 요구했지만, 갈등이 이어지자 1922년 ‘코르뷰로(고려부, 고려총국)’를 설치하고 국내에 통일 당을 건설하라는 최후통첩을 내리며 ‘두’ 고려공산당을 해체하였다.

 

1923년 고려총국은 국내에 당 건설을 추진하라며 대표 두 명을 파견했다. 고려총국 국내부 책임 비서 김재봉(1890~1944)과 공산청년회 책임 비서 신철이었다. 그리고 2년 뒤, 서울에서 건설된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가 된 김재봉은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출신이었다.

 

넉넉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김재봉은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다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경성공업전습소(경성고등공업학교의 전신, 해방 후 서울대 공대로 재조직) 염직과 3년을 마치고 귀향한 그는 오미마을에서 강습소를 열어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전수했다.

 

풍산 김씨 동족 마을인 오미마을은 2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동네다. 상해 임정에서 활동하다 뒤에 남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한 김응섭(1876~1957)이 당숙뻘로 옆집에 살았고, 동경 니주바시(二重橋) 투탄 의거의 주인공인 의열단의 김지섭(1884~1928, 1962 대통령장),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김만수(1892~1924, 1963 독립장) 등도 한 집안이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김재봉은 서울로 와 <만주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인척 안상길이 임시정부의 경상북도 연락책임자로 돌아오자 동향의 이준태(1892~?)와 함께 임시정부 선전과 자금모금을 벌였다. 1921년에 일경에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갓 독립운동에 투신한 민족주의자였을 뿐이었다.

 

김재봉이 사회주의자들 가운데서 새롭게 떠오르게 된 것은 1921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서였다. 모두 9개국 144명이 참석했는데 한인은 의장단에 선출된 김규식(1881~1950, 1989 대한민국장)과 여운형(1886~1947, 2008 대한민국장)을 포함하여 무려 56명이나 됐다. 이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모색하거나 우호적 입장을 견지했던 세력들이,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해 적극적 지원을 표명한 소련과 코민테른으로부터 지원을 기대하면서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20년 창립된 노동단체 ‘조선노동대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김재봉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원 대회 개최 장소였던 이르쿠츠크를 거쳐 장소가 바뀌어 모스크바로 온 그는 2월에 대회가 끝난 뒤에도 귀국하지 않았다. 그는 극동의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르며,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3년 5월, 김재봉은 15개월 만에 국내에 당과 공산청년회(공청)를 조직하라는 밀명을 띠고 서울로 돌아왔다. 한 달 뒤, 그는 국내 조직인 상해파와 조선노동연맹회, 북성회, 무산자동맹회와 함께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고 당 조직 책임 비서가 되었다.

▲ <동아일보>기사(1927.9.13.) 1925년 사건이나 보도 안 되다가 1927년에 보도되었다.

1923년 7월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를 조직, 지방을 돌며 사회주의 사상 강연을 통해 대중에게 계급·항일의식을 불어넣는 한편, 조직을 확대하고자 지역 단체들과의 연대를 모색하였다. 이는 이듬해 4월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1924년 신사상연구회는 마르크스가 태어난 화요일에서 따온 ‘화요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화요회는 김약수의 북풍회와 통합하여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했다.

 

1925년 4월 17일. 경성 한복판의 중국요릿집 아서원에서 김재봉·김찬·김약수·주종건·윤덕병·조동호·조봉암·송봉우 등 19명이 모여 조선공산당을 창립했다. 김재봉이 비서부(祕書部) 위원 겸 책임 비서, 조직부 조동호, 선전부 김찬, 인사부 김약수 등 7명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이름을 올림으로써 제1차 조선공산당(아래 조공)이 출범했다.

 

김재봉의 ‘제1차 조선공산당’은 조동호가 기초한 당의 강령과 규약을 토의하고, 당의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 위해 조동호와 조봉암의 파견 등을 결정하면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11월 당 조직 확대와 회원의 모스크바 파견 훈련 등을 비밀리에 추진하던 중, 평북 신의주에서의 사소한 충돌로 인한 일제의 압수수색에 이 계획이 드러나 버렸다.

 

이로 인하여 조공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 박헌영(1900~1956)과 그의 아내 주세죽과 당원 1백여 명이 체포되었다. 신의주뿐 아니라 간도의 조공 근거지까지 털렸으니 이것이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다. 12월 19일, 강달영(1887~1942)을 책임 비서로 한 조직 개편을 단행하고 망명을 꾀하려던 김재봉도 체포되고 말았다.

 

조선공산당 목표는 ‘일제 통치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

 

창당 무렵, 조공(조선공산당)의 목표는 현존하는 피압박 상황,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창당대회에서 논의된 슬로건 중 첫 항목은 ‘일본제국주의 통치의 완전한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이었다.

 

이는, 1925년 8월 조동호(1892~1954, 2005 독립장)가 코민테른에 “조공은 독립운동이 조선인 전체의 이익을 목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이라고 바라보았다. 또한 그것이 조선 프롤레타리아가 일본 자본주의에 대하여 서 있는 동일한 전선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보고한 데서도 드러난다.

 

조공은 을축년(1925) 대홍수가 일어나자, 수해 이재민 돕기 모금과 상황 조사 등의 전국적인 운동에 참여했다. 또 전국을 순회하면서 농민·노동자에게 강연을 벌이는 등 선전사업을 벌였고 서울에 있는 인쇄공 조합, 철공 조합, 구두 직공 조합, 양말 직공 조합, 물장수 조합 등의 각 직업별 노동조합의 창설에 관여하였다.

 

조공의 항일투쟁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26년 6월 10일 순종 장례식 때의 민중봉기 계획이었다. 조공 산하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 비서인 권오설(1897~1930, 2005 독립장)의 주도하에 조공은 ‘6·10 투쟁특별위원회’를 두고 두 종의 ‘격문’을 인쇄한 전단을 준비하는 등 봉기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도쿄에서 경성으로 잠입한 중국 지폐 위조범을 쫓던 일경이 격문 한 장을 입수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6월 7일, 거사 사흘을 앞두고 권오설이 체포되고 당원 1백여 명이 붙잡히면서 6·10항쟁은 허무하게 좌초되었다. 그러나 일경의 살인적인 고문에도 권오설은 입을 열지 않았다.

▲ 김재봉과 함께한 동지들. 권오설과 이준태가 같은 안동 풍산 출신, 김남수는 안동 예안 출신이다.

꺼질 뻔한 항일 만세운동, 학생들이 살려내다

 

꺼질 듯했던 만세운동은 권오설이 조직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되살려냈다. 인산일 국장 행렬에 중앙고보 등 학생 300여 명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자 연희전문 학생 50여 명, 중동고보 학생 등이 합류하며 3·1운동 뒤 7년 만에 ‘만세 시위’가 이어진 것이다.

 

조공은 1928년 ‘12월 테제’ 이후 해체될 때까지 3년여 동안 네 차례에 걸친 일제의 대대적인 감시와 탄압 아래 당대회를 세 번이나 열고 노동자·농민·청년·학생·여성운동 등 각 부문의 운동을 지도하고 신간회 운동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조선 농민과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는 종전과 같은 지식인 중심의 조직 방법을 버리고, 공장, 농촌으로 파고 들어가 노동자와 빈농을 조직해야 하며, 민족 개량주의자들을 근로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테제가 명시적으로 조공의 해체를 지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민족 통일전선 신간회의 해체와 적색노조 운동과 적색 농민조합 운동의 전개를 불러왔다. 무엇보다도 여러 차례에 걸친 검거로 주요 당원들이 거의 붙잡힌 상태였으므로 조공은 성명도 없이 자동해체되었다. 이후 해방까지 각 분파 별로 벌인 당 재건 운동은 모두 실패했다.

 

김재봉은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1931년 11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그러나 오랜 지하활동과 고문으로 망가지고 쇠약해진 몸은 쉬이 회복되지 못했고, 일제의 집요한 감시로 운동 일선에도 복귀하지 못했다. 김재봉은 1944년 3월 3일 풍산읍 오미리 본가인 학암(鶴巖) 고택에서 격랑의 생애를 마감했다. 향년 54세였다.

▲ 김재봉의 생가 학암고택 앞에 김재봉 어록비가 서 있다 . 앞면에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라 새겨져 있다 .
▲ 김재봉 어록비의 뒷면. 약력의 조그맣게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고 적혀 있다 .

해방 뒤인 1946년 3월 김재봉 기일에 서울의 조선공산당 본부에 당 간부 1백여 명이 모여 초대 책임 비서 김재봉의 추도식을 열었다. 당 총비서인 박헌영의 추도사에 나온 “진보적 당의 최초 지도자, 조선의 위대한 지도자”는, 김재봉에 대한 경의를 집약한 것이었다.

 

김재봉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것은 2005년이다.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179호)인 생가 학암 고택 앞 오른쪽 공터에 김재봉 어록비를 세운 것은 그 이듬해다. 화강암으로 지은 ‘항일애국지사 근전 김재봉 선생 어록비’ 앞면에는 “朝鮮獨立(조선독립)을 目的(목적)하고”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별세 60여 년 뒤에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이는 김재봉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참가하며 쓴 조사표에 나오는 구절로 “공산주의를 희망함.”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뒤 구절은 어록비 앞면에 새겨지지 못하고 뒷면 약력에 조그맣게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오미리에서 사회주의자 김응섭과 김재봉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은 오래 금기였다. 참여정부 때 사회주의 또는 좌파 계열이라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서 제외됐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로 김재봉의 이름은 사후 61년 만에 비로소 양지로 나올 수 있었다. 같은 해 서훈을 받은 동지 권오설과 김남수(1899~1945, 2005 애족장)도 마찬가지였다.

▲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 기념탑 뒤 석축에 5명의 포상자를 포함, 24명의 약력과 업적을 새겼는데, 맨 왼쪽 첫 번째에 새겨진 이름이 김재봉이다 .
▲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의 석축. 맨 왼쪽에 새겨진 게 김재봉의 약력과 업적이다.

2008년 10월 오미마을에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이 완성되었다. 자연마을에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공원은 유례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마을이 낳은 독립운동가를 기리고자 한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과 자랑이었다. 불꽃 형상의 기념탑을 둘러싼 반원형의 석축에 5명의 서훈자를 포함한 24명의 약력과 업적을 새겼는데, 맨 왼쪽 첫 번째에 새겨진 이름이 김재봉이다. 그것은 후세 사람들이 61년 만에 얼굴을 드러낸, 잊힌 혁명가를 기억하고 기리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2020. 12. 23. 낮달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②]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 권오설(1897~1930)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③] 제3차 조선공산당(안광천) 조직부장 김남수(1899~1945)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④]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이준태(1892~1950)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⑤] 조선공산청년회 중앙위원·코민테른 전권위원 김단야(1901~1938)

 

 

조선공산당도 '일제통치 타도·조선 독립'이 목표였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①]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 김재봉(1890~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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