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배주영 선생 30주기를 추모하며
지난 19일은 배주영(1963~1990) 선생의 30주기였다. 1990년 2월 19일 아침, 경북 청송의 자취방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 때 그는 스물일곱의 처녀였다. 그리고 30년이니 그가 산 삶보다 더 많은 세월이 흘렀다. 19일 오후 2시에 안동시 안기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모인 초로의 교사들을 회한에 잠기게 한 것도 그 세월이다.
배주영 선생 떠난 지 30년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는 ‘법외노조’로 출범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단지 노조를 탈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해 8월까지 교사 1600여 명을 학교에서 쫓아냈다. 거리로 쫓겨난 교사들 중에는 조직의 상근자로 남은 이들이 많았다.
간부와 주요 활동가가 모두 교단에서 배제되었어도 전국 모든 시군마다 지회를 꾸리고 ‘참교육’ 깃발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이들 해직자의 활동 덕분이었다. 배주영은 청송·영양지회 상근자로 일했다. 그는 <전교조신문>(지금의 <교육희망>)과 참교육 마크를 새긴 물품 등이 든 배낭을 메고 지역의 각급 학교를 찾아 이른바 ‘참교육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다.
30년 전의 일인데, 나는 그의 부음을 전해 듣던 순간을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다. 그날 오전, 지회 사무실에 걸려 온 전화를 받은 해직 동료 장성녕(1955~2008)의 안색이 바뀌었다. 자취방에서 배주영과 함께 자리에 들었다가 후송된 해직 여교사의 언니가 우리 지역의 동료였는데 그이에게 연락해 달라는 전갈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목숨을 건졌지만, 배주영은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당일은 무려 16명이 해직된 청송여종고의 졸업식이었다. 해직 동료들과 함께 거기 참석하려고 오래 비워두었던 자취방에 연탄불을 지폈다가 그는 변을 당한 것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배주영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배주영의 부음을 듣고도 우리는 오래 그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한창 혈기 방장한 때여서 죽음이라는 게 너무 멀었던 모양이다. 나는 1989년 9월께 구룡포의 어느 대학 수련원에서 열린 해직 교사 연수회에서 만난 화장하지 않은 민얼굴에 홍조가 아름다웠던 한 여교사를 떠올렸다.
그 연수회는 정겨우면서도 얼마간 비장하게 진행되었다. 마침 배주영과 나는 같은 모둠이어서 해직에 이르기까지의 쉽지 않은 과정과 이후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연하인데도 참 반듯하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삼십 대 초반의 어정쩡한 늦깎이로 교육운동에 입문한 나와는 달리 그는 분명한 자기 전망이 있었던 것 같다.
전교조 창립 후, 학교에서 쫓겨나 고단한 해직 시기를 보낸 교사들 가운데 유명을 달리한 이들도 적지 않다. 배주영은 이듬해 2월에 해직자들이 첫 전교조장(葬)으로 배웅한 동료였다. 그날 궂은 눈비가 흩날렸던가. 배주영 세실리아는 온 나라에서 달려온 교사들의 애도 속에 안동 외곽의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열심히 살았다
1주기 때, 동료들은 그가 남긴 글을 모은 책 <그 숨결 남아 아직 청송길은 푸르른데>(푸른나무)를 펴내고, 그가 얼마나 좋은 교사가 되려고 애썼는가를 다시금 확인했다. 그리고 해마다 기일이면 전교조 경북지부와 안동지회, 그리고 옛 동료들이 그의 무덤을 찾아 옛 시절을 추억하면서 그를 추모했다. 그런 세월이 30년이나 이어진 것이다.
30년은 한 세대를 가르는 시간이다. 그것은 1989년 8월 12일, 4년 6개월간의 교단생활을 마감하고 배주영이 두고 떠나온 진보종고 2학년 아이들을 마흔여덟 살의 장년으로 자라게 한 시간이다. 해임되어 학교를 떠나던 날, 그의 마음은 담담하고 차분했던 모양이다. 그날 치 일기에서 그는 그렇게 썼다.
삶과 생활의 기본원칙
① 비굴하지 말 것 : 어떤 일에도 치사한 감정이나 자신의 이익을 내세워 비겁해지지 말 것이며 의지를 굽히지 말자.
② 당당한 태도와 바른 생각을 가지도록 노력할 것 : 늘 생활을 정리․반성하여 생각을 바르게 하고 상대에 대해 너그러울 것.
③ 공부―학습을 열심히 할 것.
그는 마음먹은 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해고자로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배주영은 살아생전에 남긴 마지막 일기에서 자신의 번민을 토로하고, 헤어진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있었다.
1990년 2월 3일 흙날
감정이 예민해지고 어려지는 요즘이다. 무슨 일에든 조그마한 자극만 받아도 눈물을 흘린다. 서럽고, 애틋하고, 그립고, 막막하고…….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이며, 하고 있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 철현이, 명수, 병화, 정보, 명호, 종석, 경보, 원섭이, 희식이, 정길이, 용신이, 종철이, 상년이, 영걸이, 철순이, 경자, 남숙, 남희, 현주, 명순, 미정, 또 미정이, 명숙이, 수경이, 경숙이, 미숙이, 순향이, 영이, 송자, 윤희, 춘연, 정화, 은화, 연수, 순이, 순영이, 경희, 은정, 또 은정이, 상정, 경미, 금순, 태순, 현주…….
모든 과거의 것들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허망하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가정만큼 허망한 것이 어디 있을까. 배주영이 살아 있으면 쉰일곱이 된다는 가정은 한 인간이 살았던 삶, 그 실존을 환기할 뿐이지 어떤 위로도 되지 않는다.
님은 스물일곱이었습니다. / 님은 스물일곱 샛별 같은 선생님이었습니다. / 님은 전교조의 새벽이었습니다. / 1990년대의 문을 여는
전교조의 첫새벽, 스물일곱이었습니다.
1990년 2월 19일 새벽, / 마침내 새벽을 온몸으로 열어놓고
그 새벽을 안고 눈을 감다니
- 정영상(1956~1993)의 추모 시 ‘님은 스물일곱이었습니다’ 중에서
배주영을 보내면서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이 메었던 정영상도 갔다. 배주영이 가고 2년 뒤다. 경북의 해직 교사 105명 중에서 여덟 명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에 이어 1993년에 정영상이, 그리고 복직 후엔 황현자(1999), 지송월(2000), 정관(2004)이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배주영의 부음을 전했던 장성녕(2008)[관련 글 : 잘 가게, 친구]도, 배주영 19주기에 무덤 앞 잡초를 뽑던 김창환(2013) 선생도 갔다.[관련 글 : 교사들의 스승, 김창환 선생을 보내며]2014년에는 인천으로 옮겨 활동하던 채희성도 떠났다. 심장마비와 암으로, 뇌졸중 등으로 세상을 떠난 이는 말이 없고 남은 동료의 가슴엔 회한만 쌓였다.
1989년 해직자들이 복직한 것은 4년 6개월 뒤인 1994년이다. 그리고 복직하고 5년 만에 전교조는 합법노조가 되었다. 그러나 14년이 지난 2013년, 전교조는 박근혜 정부로부터 6만 조합원 가운데 해직 교사 9명이 조합원으로 있다는 이유에 ‘팩스 한 장’으로 법외노조 통보를 받아 합법 지위를 박탈당했다.
30년, 팩스 한장으로 전교조는 ‘법외노조’로 되돌려졌다
1989년부터 1999년까지 10년 동안과 마찬가지로 ‘법외노조’로 돌아간 지 벌써 7년째다. 박근혜 정부의 ‘법외노조’ 통보는 노동부와 인권위원회 등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고, 최근 사법농단 수사의 결과로 양승태 대법원이 청와대와 거래하느라 전교조 재판에 개입한 흔적들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당시 고용노동부의 반대 의견은 시행령에 근거한 법외노조 통보는 문제가 있으며, 가입 해직 교사 수가 미미(0.0015%)하며, 1999년부터 합법적으로 활동해 온 전교조를 법외노조화할 경우 법적 안정성을 해친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현재 대법원에 계류된 ‘전교조 법외노조 건’을 전원합의체로 돌린 대법원은 그동안 두 차례 심리를 마친 뒤 오는 5월 20일 공개 변론을 열기로 했다고 한다. 올 하반기에 결론이 나온다고 하여도 법외노조 통보 처분을 받은 때로부터 만 6년 반이 지나서야 법적인 판단을 받게 되었으니 그간의 불이익과 피해는 어떻게 보상받을 것인가.
‘촛불 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2년 반이 지났지만, 여전히 전교조는 법외노조다. 법외노조 통보 이후 전교조에서는 교사 33명이 직권 면직된 상태다. 올 하반기에는 전교조가 합법노조의 지위를 회복하고 면직된 교사들이 원직으로 돌아와야 하는는 것은 그것이 민주시민들과 함께한 촛불 혁명의 대의를 실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떨어진 기온이 회복된 19일 오후, 천주교 공원묘지에 내리는 햇볕은 따뜻했다. 이미 퇴직한 선배들과 함께 현직 후배들이 모인 배주영의 무덤 뒤편에 ‘민주 교사 고 배주영 선생 30주기 추모제’ 펼침막이 걸렸다.
이번 추모제는 지난 30년간 추모제를 이어온 경북지부가 그 책임을 내려놓는 자리, 다른 의미로 보면 일종의 ‘탈상’이다. 그래선지 행사는 좀 무겁게 진행되었다. 선후배 동료들의 추모와 회고가 이어지고, 대구에서 달려온 유족들의 인사로 행사는 마감되었다.
고인의 오빠 배설남 씨는 인사에서 “동생을 대단한 조직가로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다만 주어진 조건에서 성실하게 살았던 아이”라고 회고했는데, 배주영을 아는 이들은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을 것이다. 참석자들이 국화 한 송이씩을 봉분에 올리는 거로 추모제는 끝났다.
일행은 천주교 묘지 안쪽으로 올라가 2013년 2월에 이 동산으로 온 김창환 선생의 무덤에 들렀다. 2008년 6월, 민주인사 순례단과 함께 들러 배주영 무덤 앞에 잡초를 뽑던 선생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는 배주영의 사범대 국어교육과 14년 선배, 두 사람은 외로운 날이면 양지바른 동산에서 만나 함께한 시간을 추억하곤 할까. [관련 글 : 버릴 수 없는 꿈, 교사 배주영을 생각한다]
배주영의 묘비에는 ‘민주 교사 배주영(세실리아)의 묘’라 새겨져 있다. 뒷면은 “행복하여라. 참교육 위하여 온몸을 던지신 임이여! 하늘나라가 임의 것이니”다. 그렇다. 배주영은 주어진 조건에서 성실을 다했고, 마침내 거기 몸을 던졌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어야 할 이유는 그거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2020. 2.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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