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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처부모’와 ‘친부모’가 다르지 않다?

by 낮달2018 2020.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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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가진 부모는 모두 ‘처부모’가 된다

▲ MBC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정보석은 처가에 살며 장인과 같이 일하는 '가족'이다.

얼마 전 동료 여교사가 모친상을 입었다. 그이의 남편은 내 복직 동료다. 나는 학교 친목회에서 보내온 그이의 모친상 소식보다 복직자 모임에서 전한 그 남편의 ‘장모상’ 연락을 먼저 받았다. 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문상했는데 한꺼번에 나는 두 사람의 복상(服喪)을 위로할 수 있었다.

 

학교마다 친목회가 구성되어 있고 이 친목회는 상조회 구실이 그중 요긴하다. 당연히 회칙에는 경조사에 관한 규정이 중심이다. 본인의 결혼은 말할 것도 없지만, 부모상 규정이 으뜸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친부모·처부모를 가리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여교사에게 친부모 아닌 시부모가 중요하다면 남교사에게 처부모의 무게도 같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부친상’과 ‘장인상’의 거리

 

글쎄, 서울 같은 대도시 사람들은, 아니 요즘의 젊은 친구들은 좀 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의 경상도 남자들에게 이 문제는 그린 녹록하지 않다. 입으로는 ‘처부모도 부모’라고 주절대지만 정작 당하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대한민국 남자들 모두가 벗어나지 못한 오래된 관습일지도 모르겠다.

 

길사보다 상사를 더 챙겨야 한다고 믿는 것은 서울이나 지방이 다르지 않다. 혼사나 수연 같은 데는 여의치 않으면 부조나 부치고 말지만, 복상의 경우에는 가능하면 참석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상사에도 차별이 있다. ‘친부모 상’이냐, ‘처부모 상’이냐는 중요한 판단의 잣대다. 남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반응한다.

 

“‘부친상’이 아니라 ‘장인상’이라고? 장인 초상인데 꼭 가봐야 하나?”
“‘장모상’이라니까 부의나 하고 말지, 뭐…….”
“‘처부모상’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남자들은 대체로 처부모가 친부모만큼 소중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분들에 대한 예우도 따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터이다. 그러나 늘 그것은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이론일 뿐이다. 친부모께 용돈 10만 원을 드리면 처부모에게는 그보다 소액을 드려도 괜찮다고 여기는 생각은 뿌리 깊다.

 

친부모님은 물론, 장인어른께서도 돌아가셔서 내겐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썩일 일은 없다. 이는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명절이면 부모님 산소를 들러 술 한 잔 올리고 나면 곧장 처가로 가서 장모님을 뵙는 거로 명절을 보내게 된 것도 벌써 10년이 가까워진다.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신 것은 2006년 1월이다. 당시 나는 시내의 꽤 규모가 큰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방학 중인데도 불구하고 학교 친목회에서 학교장을 비롯한 동료 여러분이 문상을 와 주었다. 소규모 학교에 비길 수 없는 상당한 액수의 부의금도 함께였다.

 

학교 밖에는 나는 장인의 부음을 일절 알리지 않았다. 장인상까지 알리는 것은 뭣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조문’이나 ‘조의금’이라는 부담으로 다가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 여기저기 부음을 알리는 것은 일종의 ‘민폐’라는 생각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을 지인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사위도 ‘자식’이듯 ‘처부모도 어버이다’

 

나는 학교 친목회의 조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로 생각했었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누군가가 내 소속 단체 누리집에 이 소식을 올렸고 이를 본 주변의 선후배, 지인들이 하나둘씩 상가에 나타난 것이다. 아주 예를 제대로 갖춘 이들의 문상을 받고 나는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로 민망했다.

 

“이렇게 멀리까지 걸음 안 해도 되는데…….”

 

하는 게 이들을 맞으며 보인 내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매우 정중하게 조의를 표명함으로써 처부모상에 대한 내 생각을 흔들어 버렸다. 일부러 연락도 하지 않았던 이들의 문상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처가 쪽에 내 ‘얼굴(체면)’이 서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장례를 마치고 정리해 보니 우리 내외에게 온 부의금이 전체 부의의 한 1/4을 넘었다던가. 전혀 생각조차 못 했는데, 서둘러 조문을 해 준 지인들 덕분에 나는 맏사위 노릇을 제대로 한 셈이 되었다. 먼 길인데도 서둘러 문상을 와 주었던 동료들, 선후배, 친구들의 고마움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듬해(2007년) 겨울에 내 형수 씨께서 돌아가셨다. 그 장례를 전적으로 도맡아 치러준 이가 고인의 사위, 내겐 질서(조카사위)였다. 장조카가 있었지만 그리 넉넉하지 못했는데, 시중 은행의 간부로 있던 이 반듯한 친구는 조카를 대신해 장례의 전 과정을 총괄해 훌륭하게 상사를 마무리해 주었다.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처삼촌인 나는 장례가 끝난 뒤, 그의 수고로움을 거듭 치하하였는데 그는 그제야 속내를 털어놓았다.

 

“‘장모님 상’인데, 이걸 대놓고 알릴 수도 없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어차피 내가 맡아야 할 부분이지만 이쪽 정서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뜻밖에 많은 분이 조문해 주셔서 무사히 장례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의 상을 치르면서 기왕의 내 생각이 조금 바뀐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친가와 처가를 통틀어 오직 한 분만 남은 어른이 장모님이시니 더는 차별하고 말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또 하나 확실한 것은 멀지 않은 장래에 딸아이와 가정을 꾸릴 사람에게 우리는 꼼짝없이 처부모가 된다는 점이다.

▲ 여든이 내일모레인 장모님께서 지은 고추 농사. 올해도 당신께선 농사를 준비 중이시다.

여든이 내일모레인 장모님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아내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피를 나누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여전히 관계를 규정짓는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한 분의 어른인 장모님은 내게는 이제 어머니와 진배없는 분이 된 것이다. 나는 필요하다면 장모님을 모시고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여러 차례 아내에게 그럴 뜻을 밝혔다.

 

근 30여 년 전에 맏딸을 데려가 오래 고생을 시켜온 사위를 장모님은 자식처럼 여겼다. ‘사위 자식도 자식’이라는 말은 의례적인 공치사는 아니다. 다섯 해에 가까운 해직 기간에 양식을 대 주시고, 맏사위 주머니에 아닌 척 용돈을 찔러주신 분이 장모님이셨다. 지금 우리가 명절 등에 가끔 드리는 소액의 용돈이나 선물은 지금껏 장모님이 보여주신 사랑에 감히 견줄 수 없다.

 

모두가 ‘처부모’가 된다

 

자식처럼 여긴다고 했지만, 장모님께서는 맏사위라고 내게 한 번도 허술히 대한 적이 없으셨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더니 들를 때마다 사위 대접을 깍듯하게 해 주셔서 내가 오히려 민망할 지경이었다. 없는 살림에도 늘 사위에게 내는 밥상에 육미나 생선 따위를 올리곤 하셨다.

 

얼마 전에 아들 녀석과 처가에 잠깐 들렀었다. 언제 장을 보아 오셨는지 비싼 갈치에다 잘 끓인 쇠고깃국, 돼지고기 수육까지 한 접시 수북이 내놓으셨다. 결혼 초기에 갈치를 내놓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더니 장모님께선 늘 내게 갈치 대접을 잊지 않으시는 것이다.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훗날 딸아이의 짝에게도 우리 내외는 장모님이 베푼 것 같은 사랑을 되풀이하게 되리라는 것은. 그리고 그에게도 언젠가 사위 자식이 생기고 그에 대한 사랑이 자식에 대한 사랑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도. 세월의 순환을 통해 우리는 ‘내리사랑’이란 본질적으로 윤회한다는 걸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경인년 설날이 가까워져 온다. 서둘러 우리 가족은 부모님 산소엘 들렀다가 처가로 향할 것이다. 해가 갈수록 쓸쓸해지는 명절을 장모님께선 친정으로 돌아오는 딸들을 기다리는 거로 지샐 것이다. 늘 맞고 보내는 명절이지만, 올 설날은 내게 새삼스럽게 장모님을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 될 듯하다.

 

 

2010. 2.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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