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무렵에 안경을 끼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무렵부터 눈이 조금 나빠졌는데, 굳이 안경을 끼지 않았다. 어쩐지 ‘안경쟁이’가 되는 게 마뜩잖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만 해도 안경을 끼는 건 일종의 ‘결함’으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그 무렵 우리가 안경 쓴 아이를 가리켜 굳이 ‘눈이 넷’이라는 뜻의 ‘목사(目四)’라고 불렀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안경쟁이’를 바라보는 ‘눈길’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과 엘리트의 표지 같은 것이기도 했다. 안경은 공부를 많이 한 모모한 학자들이나 정치인들, 그리고 부유한 유한계급들이 몸에 두르는 일종의 장신구처럼 생각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더러 ‘도수 없는 안경’을 끼고 모양을 내는 것은 말하자면 그들 시늉을 한 것이었다.
우리 어릴 적만 해도 시골에는 안경 낀 아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도회의 중학교에 진학하니 한 반에 두어 명씩의 ‘안경쟁이’가 눈에 띄었다. 이들은 드러내놓고 경원당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목사’라고 부르는 속내는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육군훈련소를 거쳐 자대로 갔더니 특수부대라 그런가, 전 여단에 안경 낀 병사가 한 명도 없었다. 병의 경우 고졸에 키 170cm 이상의 신체조건이 1급이었는데 시력이 평균에 못 미쳤던 내가 어떻게 거기 끼었는지는 모르겠다.
사격훈련을 할 때면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그냥 버텼다. 영점 사격을 하는데 가끔 표적이 희미해진다고 느끼면 어김없이 빗나간 총알 때문에 호되게 얼차려를 받곤 했다. 그래도 안경을 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대한 이후에 눈은 더 나빠졌다. 강의실에선 앞쪽에 앉지 않으면 칠판의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교단에 서면 교실 뒤편 게시판의 글씨는 제목만 간신히 알아볼 정도였다. 그래도 안경을 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안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우선, 그걸 특별히 불편하게 여기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나는 안 보이면 좀 더 다가가면 되는 일이고, 때론 보이지 않는 걸 억지로 봐야 할 일도 없다고 우정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나는 안경을 끼는 것은 단순히 시력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정체성이 바뀌는 일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마흔 무렵에 안경을 맞추다
안경을 마련한 건 마흔이 다 되어서였다. 야간 운전을 하면서 비로소 불편하다는 걸 느끼고,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때 자막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경을 맞추어서 처음 그걸 쓰던 날의 기억이 아련하다. 글쎄, 얼마나 어색한지 사람들 앞에 옷을 벗고 서 있는 느낌이었다.
안경은 차의 글로브 박스(Glove Box)와 텔레비전 대 옆에 항상 놓여 있다. 주로 먼 길을 가거나, TV와 영화를 볼 때만 안경을 찾아 쓰기 때문이다.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학교에선 뜻밖에 안경을 쓸 일이 거의 없었다. 교과서나 교재를 맨눈으로 읽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으니까.
안경을 끼니 눈앞이 밝아지긴 했다. 그러나 얼마간 안경을 쓰고 있다가 벗으면 갑자기 눈이 침침해지는 경험은 유쾌하지 않았다. 오래 안경을 쓰고 나면 그 증상은 조금씩 심해지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경에 의존하게 된다는 느낌은 마뜩잖았다. 장거리가 아닌 출퇴근길에는 안경을 쓰지 않는 등 안경 이용하는 시간을 되도록 줄이려 하는 건 그 때문이다.
나이 들면서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은 노안으로 글자를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나는 근시여서 그런 불편이 전혀 없다. 근시와 노안의 관계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맨눈으로 신문이나 책은 물론 스마트폰의 깨알 같은 글자도 수월하게 읽어낼 수 있어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 맨눈 시력은 0.5쯤 되지 않나 싶다. 교정시력은 1.0이다. 아내는 아직 1.5의 시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모두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안경을 끼기 시작했다. 딸애는 몇 해 전에 라식수술을 받더니 안경을 벗었다.
그리운 ‘초록’
요즘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안경 끼는 아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갈수록 현란해지는 주변 환경이 문제일까. 말을 채 익히기도 전에 텔레비전과 사귀고 뛰어노는 대신 컴퓨터 게임에 코를 박는 아이들에게 건강한 시력을 유지하는 게 어려운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눈의 건강을 위해 가끔 ‘먼 데를 바라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의 종일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지켜보며 생활하다 보면 눈이 뻑뻑해지면서 아파져 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창가에 가서 운동장을 내려다보거나 멀리 금오산 정상을 한참 동안 바라보곤 한다.
작가 이상은 ‘끝없이 펼쳐지는 초록색의 밋밋한 벌판’에서 ‘질식할 것 같은 권태’(수필 ‘권태’)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초록의 들판이 시골 사람들의 눈을 건강하게 지켜주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이월, 모레가 입춘이니 창문 너머 연록의 풍경들도 이제는 멀지만은 않다. 8시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하고 나서 안경을 안경집에 챙겨 넣고 컴퓨터를 켠다.
그러고 보니 개학도 이틀 뒤로 다가왔다. 두 졸업식(본교와 방송고)을 치르고 나면 2014학년도는 끝, 3월이면 다시 2015학년도가 시작된다.
2015. 2.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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