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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굿바이 ‘천리안’, 젊은 날의 열정, 혹은 만용이여

by 낮달2018 2020.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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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써온 전자우편 ‘천리안’ 계정을 해지하다

▲ 피시통신 시대 천리안의 초기화면 . 이 화면만으로 젊은 날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

그저께 지난 20년 동안 써 오던 천리안 메일 계정을 해지했다. 1994년 복직한 이듬핸지, 그다음 해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교사들에게 제공하는 무료(당시만 해도 유료 메일이 있었다) 메일 계정을 하나 받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계정을 쓰지 않고 유일하게 써 온 메일이다.

 

20년 동안이나 써온 천리안 메일

 

주변에는 주로 다음의 ‘한메일’이나 ‘네이버’ 메일을 쓰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지금껏 한눈팔지 않고 천리안 계정만 이용해 왔다. 다른 메일 서비스를 전혀 쓰지 않았으니 나는 이른바 ‘충성도’가 높은 고객이었던 셈이다.

 

▲ 천리안 신구 로고

주소는 초기엔 ‘천리안 넷(chollian.net)이라 쓰다가 나중에 ’철컴(chol.com)으로 줄여서 썼는데 지난 세월 동안 정말 매우 편하게 천리안을 이용했다. 특히 ‘수신확인’ 기능이 편했고, ‘한메일’처럼 일부 사이트에서는 스팸 처리되지 않아서 좋았다.

 

이른바 ‘추억의 PC통신’ 가운데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천리안은 지난해 일부 서비스를 종료했다. 이용자가 줄어 홈타운, 내 폴더, 블로그, 클럽, 파일 링크, 쪽지, 게시판, 이메일(장기 미사용자), 원 디스크, PPP, 검색, 날씨, 모바일앱 등의 서비스를 종료하게 된 것이다.

 

피시통신 시대를 기억하는 이들은 1984년 5월, 전자사서함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시작해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 등과 함께 그 시대를 풍미한 천리안을 기억할 것이다. 특히 특정인들끼리만 이용할 수 있게 통신망을 구축, 제공했던 CUG(Closed User Group, 폐쇄 이용자 그룹) 서비스는 최고였다.

 

파란색 도스(dos) 화면에서 전화 걸기를 이용해 접속하던 천리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ktu’를 입력해 전교조에 접속해 게시판에 글을 쓰고 조합원들과 채팅을 하던 그 시절이 아마 전교조가 역동적으로 활동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내 ‘돛과닻’이란 아이디가 바로 그 시절에 썼던 별명이었다.

 

그러나 피시통신 시대의 주요 서비스는 이미 대부분 서비스를 종료했다. 1986년 시작한 하이텔은 2004년 한미르와 통합하며 인터넷포털 파란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2012년에 서비스를 끝냈다. 1994년 시작한 나우누리도 2013년 종료했다. 1996년 뒤늦게 합류한 유니텔은 현재 명맥만 유지되고 있으니 말이다.

 

피시통신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 서비스가 막을 내린 것은 물론 천리안이 밝힌 것처럼 ‘급변하는 웹 서비스의 시장 흐름’ 때문이다. 피시통신 시대의 최강자였던 천리안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시장의 흐름에 선도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2002년에 포털 서비스로 변신을 꾀했으나 이미 다음이나 네이버로 넘어간 고객들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깃들이기 전에 나는 잠깐 천리안 블로그를 운영했었다. 마치 유배지 같이 고즈넉했던 그 오두막을 헌 것은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이 풍진 세상에’를 열면서였다. 천리안에선 블로그를 유지할 것을 권했지만, 두 군데를 꾸리는 게 자신이 없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 발 스팸에 손을 들다

 

▲ 중국발 스팸들. 이러니 손을 들 수밖에 .

그리고도 10년을 더 써 온 천리안을 해지하기로 한 것은 어느 날부터 날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발 스팸 때문이었다. 메일 서비스에 있는 여러 가지 기능을 이용하여 이를 막아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내 메일이 중국에 노출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매일같이 중국 스팸이 날아오는 것은 내 메일 정보가 중국에 유출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매일 서너 개씩 날아오는 중국 스팸을 하나씩 스팸으로 등록하고 삭제하는 형식으로 대응했다. 얼마간 스팸 등록을 해 두면 잦아지리라고 기대했지만 그건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서너 통이던 스팸이 대여섯 통으로 늘어났고 며칠만 내버려 두면 메일함이 꽉 차곤 했다.

 

따로 구글의 ‘지메일’(qq9447@gmail.com)을 병행해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간 교유해온 이웃이나 사이트의 내 정보를 지메일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계속 천리안으로 편지를 보내는 데는 직접 전화하여 메일 정보를 바꾸었다.

 

그리고 그저께 나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천리안 계정을 해지했다. 이 글을 쓰느라고 오늘 모바일로 접속해 보니(피시에선 해지했는데 모바일에선 계정이 살아 있었다.) 중국발 스팸이 무려 58개다.

 

안녕, 젊은 날의 추억과 열정, 혹은 만용이여

 

글쎄, 스팸만 아니었다면 굳이 다른 메일로 갈아탈 필요는 없다. 어쩔 수 없이 계정을 해지하고 천리안을 떠나는 마음은 어쩐지 애잔하다. 한때의 영광을 뒤로 쇠퇴 일로를 걷고 있는 서비스를 굳이 나까지 떠나야 하는가 하는 자책이 마음속에 일었던 까닭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퇴직하는 것과 천리안 해지가 얼추 맞아떨어졌다. 그러고 보면 천리안을 누볐던 시간에는 내 젊은 날의 자취와 추억이 오롯하다. 거기서 안부를 나누고 토론했던 이들이 또 내 퇴임의 자리를 찾아준 동료, 후배들이 아닌가 말이다. 세월은 덧없다 하지만, 그 시절의 열정과 고뇌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자양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피시 계정을 해지했지만 당분간 휴대전화 계정은 살려둘까 한다. 혹시 아는가, 어느 날 소식이 두절된 옛날의 지인으로부터 반가운 편지라도 날아들지. <오마이뉴스>의 명함에도 천리안 메일 주소만 올라 있다. 그걸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를 궁리하면서 천리안에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안녕, 천리안. 내 젊은 날의 추억과 열정이여, 혹은 부끄러운 만용이여.

 

 

 

2016. 3.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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