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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고산서원(高山書院)’에서의 하룻밤을 꿈꾸며

by 낮달2018 2020.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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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이상정 선생을 기리려 창건한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 고산서원에서 

▲ 고산서원의 정문인 향도문 .고산서원엔 대산 이상정 , 소산 이광정 형제를 모셨다 .

인터넷에서 ‘고산서원’을 검색하면 두 군데의 고산서원이 뜬다. 한자도 같은 ‘고산(高山)’이다. 하나는 안동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전라남도 정성에 있다. 장성 고산서원은 한말의 거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 장성군 진원면 고산 마을에 세운 서원이다.

 

이 서원은 노사가 1878년(고종 15)에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924년에 중건하고 1927년에 고산서원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노사는 조선 말기 성리학의 6대가로서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여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킨 이다. 시호는 문정(文靖).

 

안동의 고산서원은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에 있다. 이 서원은 1789년(정조 13) 지방 유림의 공의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창건, 위패를 모셨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향사만 지내왔다.

 

내가 고산서원을 처음 들른 것은 15년 전쯤이다. 그때만 해도 어찌 이렇게 관리가 되지 않았는가 싶을 정도로 서원은 낡고 퇴락해 있었다. 그 이후에도 가까이 있어도 찾을 기회가 나지 않았다. 고산서원을 다시 찾은 것은 지난 13일이다. 거기서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 나누기 운동본부’ 회원 행사가 베풀어진 것이다.

▲ 고산서원의 강당인 호인당 . 정면 5 칸 측면 2 칸의 이 팔작집은 매우 호쾌한 인상을 준다 .
▲ 서원의 동재인 앙지재 . 마당 쪽으로 툇마루를 둘렀다 .
▲서재(西齋)인 백승각 . 주로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
▲ 앙지재의 툇마루 . 콩기름을 먹여 닦아놓아 아주 정갈하다 .
▲ 고산서원의 강당인 호인당의 우물마루 .
▲동재에 있는 방 . 면언재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
▲ 동재의 분합문. 툇마루 위에 걸려 있다.

서원은 그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쳤는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서원의 정문인 향도문(嚮道門)을 들어서면 꽤 넓은 마당 저편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 호쾌하게 서 있다. 이 건물이 서원의 10칸짜리 강당인 호인당(好仁堂)이다. 오른쪽 두 칸짜리 방은 명성재(明誠齋), 서원의 원장이 머무는 곳이다.

 

4단의 돌계단을 오르게 되어 있는 호인당은 명성재를 뺀 나머지 부분이 앞과 옆이 트인 마루다. 뒤쪽도 문을 뜯어내면 앞뒤에 맞바람이 통하게 되어 있고, 마루 밑도 앞뒤와 옆이 각각 틔어 있는 구조다. 여덟 칸에 이르는 마루는 널찍한데, 콩기름을 먹여 윤이 나는 데다 워낙 정갈하게 치워져 있어서 마음조차 산뜻하다.

 

올해 들어 시작한 고가체험 덕분에 강당은 물론이거니와 동서재의 마루도 정갈해졌다. 콩기름을 먹여 깨끗하게 닦아놓아 윤이 나면서 이 고택의 마루는 아연 집의 활기를 되살리고 있다. 고택이나 오래된 정자에 발을 들여놓아 본 이들은 안다. 사람의 훈기 없이 방치된 그 마루에 발을 디디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 동재의 분합문 .툇마루 위에 걸려 있다 .

강당 앞에 나란히 마주 보는 동재 앙지재(仰止齋)와 서재 백승각(百承閣)은 모두 9칸짜리 건물이다. 동재는 향사(享祀)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서재는 서원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데, 이들 건물 앞쪽에는 개방된 마루를 들렀다. 건물의 양쪽을 잇는 이 툇마루는 오른쪽 끝에 누각처럼 꾸민 마루방 청림헌(淸臨軒)으로 이어진다.

 

고산서원의 경행사(景行祠)는 호인당(好仁堂) 뒤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오른쪽의 전사청과 함께 각각 세 칸의 맞배집이다. 1789년(정조 13)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 묘우(廟宇)에 모신 이가 대산 이상정 선생이다. 1985년 유림의 공의로 대산의 아우인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을 추가 배향하였다고 한다.

 

대산 이상정[1711(숙종 37)∼1781(정조 5)]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다. 본관은 한산(韓山), 여말 삼은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의 15대손이다. 한산은 ‘모시’로 유명한 충남 서천의 한산인데, 한산 이씨 가운데 유명한 이로는 기인 토정 이지함이 있다.

 

대산은 퇴계로부터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학맥을 잇는 대 유학자다. 대산의 어머니는 재령이씨로 갈암의 손녀이자 밀암의 딸이니, 그는 밀암 이재의 문인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수학하여 외조부의 학맥을 이었다.

 

25세 때인 영조 1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사직하고 귀향하여 공부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여 문인록에 오른 제자만도 273명이나 되었다. 그 후 예조 참의에 올랐으며 고종 때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그는 도학으로 나라에 보답고자 저술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경국 지리를 밝힌 <구조소>는 정조를 감동시킨 상소문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의 주요 저술로는 <퇴도서절요>·<심동정도>·<이기휘편>·<경재잠집설> 등이 있다. 그는 외조부를 통해 영남 이학파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그 근원이 되는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평가된다.

 

뒤늦은 20세기에 고산서원에 배향된 소산 이광정은 대산의 아우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에는 아버지와 종숙(從叔)들이 의병을 모으자, 그는 겨우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종군하였다. 그는 형의 지도를 받으며 성리학을 익혔는데, 나중에 당시 학자에 따라 구구하던 예설(禮說)을 정리하였다. 그가 정리한 예설은 당시 안동지방의 표준으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대산과 소산의 종가는 인근 일직면 망호리에 있다. 15대조인 목은 이색을 모신 서산서원이 역시 일직면 원리에 있으니 이곳 일직면 일원은 한산 이씨와의 연이 남다른 지역이라 할 수 있겠다. 대산 형제분에 대한 고산서원의 향사는 음력 삼월 초닷새에 베풀어진다고 한다.

▲ 서원이 개방되면서 달아놓은 듯한 등불
고산서원에서 열린 고택 음악회 (2009.8.15) ⓒ 연합뉴스 사진

서원 동재의 양 끝에는 옛 등불을 흉내 낸 전등이 걸려 있다. 생뚱맞은 느낌이 없지 않으나 향사 이외에 늘 문을 닫고 있는 이 서원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면서 이루어진 변화니, 그것쯤은 눈감아 줄 만하다. 서원은 ‘고가에서의 하룻밤’이란 이름으로 숙박체험객을 받고 있다.

 

지난 8월 15일에는 중앙대 국악 교육대학원생들이 다문화 가정 가족과 주민을 대상으로 국악 공연을 펼친 고택음악회가 베풀어지기도 했다. 바야흐로 서원도 오랜 구각을 깨고 대중 곁으로 다가가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을지.

 

동재 앞 서원의 담장 아래 부분에 흔히들 ‘개구멍’이라 부르는 구멍이 나 있다. 거기 강아지들이 드나들지 않는다 해도 지엄한 서원의 담장에 난 그 통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정겹다. 그것은 대산이 천착한 성리학의 화두들, 성명이기(性命理氣), 일용궁행(日用躬行), 일용평상(日用平常)을 넘는 허허로운 삶의 풍경인 것이다.

▲ 서원 담장의 개구멍 (?) 이 정겹다 .
▲ 고산정사 . 보수하지 못해 몹시 퇴락하였다 .

올해 보수하려 했으나 예산 탓으로 보수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고산정사는 서원 왼편 담장 아래에 옹색하게 들어앉아 있다. 문은 잠겼고, 담 너머로 들여다뵈는 풍경은 자못 쓸쓸하다. 열린 문짝에 한지가 남아 있지 않아 그것은 마치 해골처럼 남루해 보인다.

 

고산서원을 떠나면서 나는 몇 번이고, 콩기름 먹인 정갈한 마루를 떠올렸다. 언제쯤 식구들과 함께 저 마루에 앉아 지는 해, 늦가을 햇살을 잔뜩 느껴볼 수 있을까. 비록 전등이나마 거기 불을 밝히고 지는 달빛 아래 서원 마당에 고인 정적을 건네다 볼 수 있을까. 당장 이룰 수는 없어도 그걸 그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넉넉해지는 것은 이 고택이 주는 작지 않은 선물이리라.

 

 

2009. 9.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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