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환(1949~2013)
김창환 선생이 돌아가셨다. 토요일(2월 23일) 아침에 선배 김 선생의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잔뜩 긴장했다. 설을 못 넘기시는 게 아닌가 할 만큼 병환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배는 그래 돌아가셨어,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웃으로 지난해 여름, 병의 발견에서부터 투병 과정까지 지켜본 이로서의 허탈감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몇몇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로 선생의 부음을 전했다. 나머지는 조직에서 알아서 하리라. 그리고 아내에게 선생이 세상을 버리셨다고 말했다. 결국, 가신 거유. 아직 예순다섯인데, 조금 더 사시지 않고선……. 사모님도 그리 가시더니……. 아내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렇다. 사모님께서 세상을 뜨신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김창환 선생이 돌아가셨다!
선생이 몸속에 병이 자라고 있었다는 걸 확인한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체중이 급격하게 줄어서 진단을 받았는데…, 암세포가 이미 몸속에 다스리지 못할 만큼 번져 있었다고 했다. 의사에게 얼마나 남았느냐니까 1년이라데. 7월 초순에 벗들과 함께 선생을 찾았을 때 선생은 마치 남 얘기하듯 그렇게 말씀하셨다.
선생이 은퇴하면서 새 사모님과 함께 이사한 안동시 원림에는 선생 말고도 서너 명의 동료들이 비슷비슷한 목조 주택을 짓고 살고 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좌우로 펼쳐진 밭마다 보리가 검푸르게 타고 있었다. 선생댁 화단에는 접시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뜨거운 햇살 사이로 도발하듯 핀 빨갛고 하얀 꽃잎을 보면서 육신의 쇠락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생각했다.
그래도 선생은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타고난 낙관과 긍정의 자세에다 투병의 의지도 강했던 것 같다.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자연요법에 기대기도 했지만, 몸속에 자란 병이 워낙 무거웠다.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입원과 퇴원을 거듭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다시 선생을 찾은 것은 지난해 12월 중순이다.
여름과 달리 선생은 쇠약해져 침대에 누워 계셨다. 식욕을 잃은 데다 음식은 받지 않으니 기력이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선생께 쉬시라 여쭈고 물러 나와 사모님에게 저간의 사정을 들었다. 쇠잔해가고 있는 선생의 모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모님을 위로하는 게 고작이었다.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가을이다. 단위학교마다 시군마다 평교사협의회가 들불처럼 일어나던 때다. 대구의 어느 성당에서 열린 경북교사협의회 창립대회에서였다. 임원을 추천하는데 일찍이 YMCA 교사회에 참여한 친구 김 선생이 경북 북부지역의 존경하는 선배라며 한 중년 교사를 부회장에 추천했다.
운동가라기보다는 점잖은 선비 같은 풍모의 교사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가 김창환 선생이었다. 나보다 7년 연상인 선생은 그때 갓 마흔이었다. 그러나 워낙 젊은 교사들 중심이었던 교사들 가운데서 그는 우뚝한 ‘어른’이었다. 선생이 어른 대접을 받는 건 그보다 연상인 분들이 손꼽을 정도여서가 아니라 워낙 곱고 바른 성품을 가진 이였기 때문이다.
이듬해 전교조가 창립되면서 우리 경북에서만 100명이 넘는 교사들이 해직되었다. 사립 출신의 이영희 지부장은 구속되었고, 공립에선 예천지회장이었던 선생이 구속되었다. 아마 이 시기가 선생이 당신 삶의 정체성을 올곧게 여민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모범적인 삶과 인품으로 뭇 교사의 존경을 받았던 선생은 교단의 낡은 질서, 그 모순과 질곡을 깨뜨리는 대열에 떨쳐나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3대 지부장을 지낼 때 나는 교육 선전 부서를 맡았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던 예천으로 복직하면서 선생과의 인연이 이어졌다. 나는 예천에서 사는 4년 내내 선생과의 교유를 이어갔고, 전교조가 합법화된 원년에 선생이 다시 지부장을 맡았을 때는 지회장으로 선생을 따랐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내려놓지 않았던 사람
후배에게도 반말하지 않는 선생이 나를 편하게 대하게 된 것은 예천에서의 인연 덕분이다. 차분하고 냉철하기보단 성급하고 강파른 성격을 벗지 못하는 나를 선생이 품어준 것도 역시 선생의 넉넉한 인품 덕이었던 것 같다.
교육 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지도자로 옹립되었으나 선생이 흔히 말하는 뛰어난 역량의 조직 전문가였다거나 넘치는 카리스마를 갖춘 활동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교조라는 조직에 눈을 흘기는 사람들도 ‘거기 김창환이 있다’는 사실에 경계를 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가진 부드럽고 강한 힘이었다.
선생은 전교조의 대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나고 자랑스러운 이었다. 그는 대중들에게 조직의 전망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도, 어렵고 힘든 문제를 풀어내는 남다른 지혜를 보여주지도 않았지만, 모두 그를 신뢰했다. 그는 다분히 강하고 거친 방식의 조직에 부드러움과 합리성을 보탠 이였다고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람에 대한 신뢰, 동료에 대한 믿음을 한 번도 잃지 않았던 이였다. 그는 조직 안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과 인연을 ‘감동’으로 받아들인 이였다. 내가 농조로 ‘선생님의 만남 중에서 감동적이지 않은 만남이 어디 있기나 하냐’고 했을 정도로 말이다.
수십 년 인연을 맺다 보면 남자들끼리는 형제의 우애 같은 게 생기기 마련이다. 해직 시기를 같이 겪은 오래된 동료들끼리 ‘형님, 아우’가 보통인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는 후배는 없다. 그가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렇게 시정배처럼 부르기에는 그가 너무 맑고 고아한 인품을 지닌 이기 때문이다.
선생의 인터넷 아이디는 ‘숲사람’이다. 그것은 아마 “한 그루의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속에 서고 싶”다고 한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따온 이름이 아닌가 싶다. 산봉우리에 서기보다는 숱한 나무들의 합창에 함께하고 싶어 한 선생에게 그것은 매우 맞춤한 이름인 셈이다.
일요일 오후에 안동병원에 도착했다. 비통에 잠긴 유족들 보기가 쉽지 않았다. 맏이 수진이가 나를 붙들고 서럽게 우는 바람에 나도 눈물을 다스리느라 애를 먹었다. 그 애가 받아쓰고 선생이 서명한 유언을 나는 천천히 읽었다. 선생은 자기 죽음을 미화하는 데 대한 경계와 함께 간소한 장례를 당부하고 있었다.
병마가 몸을 덮어오자, 선생은 꼼꼼히 당신의 죽음을 준비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장례의 절차까지도 세세하게 이를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하고 검소하게 치르라는 뜻을 밝혔다고 했다. 선생의 그 같은 뜻이 아니었다면 마땅히 조직에서는 전교조 ‘경북지부장(葬)’으로 모셨으리라.
오후 여섯 시에 지부의 추도식이 베풀어졌다. 약력을 보고하고, 사진 자료로 살아온 길을 살피고, 추도의 말씀과 시가 이어졌다. 경북 각 시군에서 달려온 후배 교사들은 슬픔 속에서 한 지도자의 삶과 죽음을 반추했다. 우리는 선생이 부탁한 노래 ‘동지를 위하여’를 부르며 선생과 작별했다.
‘개관사정(蓋棺事定)’, 그는 ‘뜻대로’ 살았다
조문객은 끝없이 밀어닥쳤다. 장례식장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은 ‘본인의 장례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온 건 생전 처음 보았’노라고 했다. 그렇다. 조문객들은 자제들의 손님이 아니라 대부분 선생을 배웅하러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발인 날, 성당에서 장례미사가 베풀어졌다. 생전에 예천에서 오래 인연을 맺었던 김영식 신부는 선생이 평통사의 카페에 쓴 글을 천천히 읽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어떻게 교사가 되고 투사가 되었는가를 당신께서 몸소 밝힌 글이었다. 글의 말미가 선득하고 아프게 다가왔다.
이제 멀지 않아 평교사로 당당히 교단을 떠나야 할 텐데 언제쯤 참 선생 노릇 제대로 한번 할 수 있을는지 늘 스스로 불만입니다. 과분하게 평통사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총구 앞에 앙가슴을 들이밀 수 있을 만큼 사생관도 뚜렷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할 용기도 없습니다. 4년 전에 고분지통(鼓盆之痛)을 뼈저리게 겪고 나서도 내가 산다는 것이 죽기 위한 삶,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잠깐 반짝하는 삶임을 잊고 살 때가 훨씬 많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느려 터지고 미련스럽지만 내가 서야 할 자리에 서고, 내가 해야 할 말이 있다면 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려고 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개관사정(蓋棺事定)을 좌우명 삼아 스스로 경계를 삼고자 합니다. 개관사정이란, 사람의 시신을 관 속에 넣고 뚜껑을 닫고 나서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내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특히 훼절하기 쉬운 먹물들이 새겨들을 말인가 합니다.
나이 들수록 조바심이 생깁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찾아봐야 할 곳도 많은데 세월은 저리도 후딱후딱 지나 버리고 맙니다. 뭐 대단한 욕심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추하지 않게, 정갈하게 늙고 싶은 것이 나의 꿈입니다.
2005. 10. 24. 새벽
7년도 전에 쓴 글이다. 개관사정은 두보의 시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 인간에 대한 총체적 평가는 결국 죽고 나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뜻하신 대로 선생은 이제 ‘관(棺)’ 속에 누웠다. 남은 것은 사람들의 평가지만, 더 는 이를 게 없다. 조문하고 간 선후배 교사들의 발걸음이 그 ‘사정’이며, 그들 비탄의 기억 속에 오롯이 살아 있는 ‘김창환’이 곧 그 사정인 것이다.
김영식 신부는 선생과 선생의 삶을 일러 ‘바다 같은 사람, 바다 같은 삶’이라고 추모했다. 바다는 가장 낮은 데서 모든 강물을 넉넉하게 안아낸다. 선생이 우리와 함께하면서 기꺼이 맡은 역할이 ‘바다’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더 애틋하게 그가 바다였음을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선생은 화장 후 안기동 천주교 묘원에 묻혔다. 그곳은 23년 전인 1990년, 우리 해직 교사들이 배주영 선생을 묻은 곳이다. [관련 글 : 그가 간 지 30년……, 팩스 한 장으로 되돌려진 ‘법외노조’] 우리는 바람 부는 산 위에서 한 줌의 뼛가루로 돌아온 당신을 묻고 그 위에 검은 빗돌 하나를 세웠다. 한 인간의 삶을 단지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그 행간의 뜻은 모두가 새기고 새길 일이다.
고인은 1949년 7월 13일 나서
한결같이 변함없이 꾸준하게
참교육과 민족통일을 위해 살다가
2013년 2월 23일 선종하다.
나는 선생을 배웅하면서 나지막하게 처음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형님, 편히 가시오.
모든 염려와 근심 내려놓고 편히 쉬시오.
김창환 선생 약력
· 1949 경북 의성 출생
· 1968 안동농림고등학교 졸업
· 1973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 1975 ROTC 육군 중위로 예편
· 1975~1989 경남 하동 횡천중, 밀양여고, 안동고, 예천여고 재직
· 1989 전교조 결성 주도로 해임, 구속
· 1990 대법원 선고유예 판결
· 1991 전교조 제3대 경북지부장
· 1991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대구경북 공동대표
· 1991 안동민주운동연합(준) 상임대표
· 1992 안동시 국회의원선거 출마, 낙선
· 1994~2011 비안고, 용문중, 용궁중, 안동중, 길주중 재직
· 1999~2000 전교조 제9대 경북지부장
· 2005~2008 안동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
· 2009~현재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공동대표
· 2009~현재 대구경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 이사
· 2010 우리말 교육대학원 2년 수료
· 2010~현재 <열린 사회를 위한 안동시민연대>상임대표
· 2011. 2. 28 명예퇴직
· 2013. 2. 23. 09:24 운명
· 가족사항 : 처(권향숙), 자녀(2녀 1남)
2013. 2.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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