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 ~ 2016년 1월 15일
쇠귀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셨다. 나는 어젯밤 늦게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고 난 직후였던 듯하다. 아,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셨어.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아내가 연세가 어떻게 되우, 하고 물었었다. 일흔다섯인데……, 하고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당시 창간된 <평화신문>의 지면에서였다. 선생이 옥중에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글이었는데 거기서 나는 꽤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의 글은 그때까지 내가 읽은 어떤 글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기품과 향훈을 그득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글에는 지혜(이성)와 감성이 가장 완벽하고 조화롭게 만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드넓은 인식의 지평은 정결한 절제와 감성의 언어를 만나 비로소 웅숭깊은 사색으로 이어지는. 그의 글에서 나는 경어체가 감성으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더 명징한 인식으로 승화되는 경지를 느끼곤 했다.
그 편지글은 얼마 후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는데 그게 햇빛출판사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나는 틈나는 대로 주옥같은 글을 되풀이해 읽었고 몇몇 구절은 따로 뽑아서 메모해 두었다. 20년 후인 2008년, 서른셋 혈기 방장한 청년 시절에 만났던 선생의 글 이야기를 잠깐 되뇌기도 했다. [관련 기사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후 20년 ]
선생의 부음을 듣고 컴퓨터 묵은 폴더에서 가려 뽑아놓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글귀들을 다시 읽고 그 글귀들로 만들어 썼던 책갈피를 다시 들여다본다. 변변찮은 이해력으로 선생의 글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족이다.
가려 뽑은 글귀들을 아래에 붙인다. 더 값진 글귀가 적지 않겠지만 그걸 골라내지 못한 것은 내 천박한 인식 탓일 것이다. 선생께서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편히 쉬시길 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 ) 속은 초판의 쪽수임.
▪ 하늘 높이 바람 찬 연을 띄워 놓으면 얼레가 쉴 수 없는 법, 안거(安居)란 기실 꿈의 상실이기 쉬우며, 오히려 방황의 인고 속에 상당한 분량의 꿈이 추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6)
▪ 겨울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던 친구의 글귀를 생각합니다. (29)
▪ 숱한 사연과 곡절로 점철된 내밀한 인생을 모른 채 단 하나의 상처에만 렌즈를 고정하여 줄곧 국부만을 확대하는 춘화적 발상이 어안처럼 우리를 왜곡하지만 수많은 봉별을 담담히 겪어 오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파낸 한 덩이 묵직한 체험을 함께 나누는 견실함을 신뢰하며,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일찍 깨닫게 해주는 지혜로운 곳에 사는 행복함을 감사하며, ‘세상의 슬픔에 자기의 슬픔 하나를 보태기’보다는 자기의 슬픔을 타인들의 비참함의 한 조각으로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고자 합니다. (33)
▪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41)
▪ 불사춘광 승사춘광(不似春光 勝似春光), 봄빛 아니로되 봄을 웃도는 아름다움이 곧 가을의 정취라고 합니다. (41)
▪ 용기는 선택이며 선택은 골라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을 버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77)
▪ 어느 목공의 귀재가 나무로 새를 깎아 하늘에 날렸는데 사흘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교를 극한 솜씨가 우리의 생활에 보태는 도움에 있어서는 수레의 바퀴를 짜는 한 평범한 목수를 따르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44)
▪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 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51)
▪ 한 그루의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속에 서고 싶습니다. 한 알의 물방울이 되라고 한다면 저는 단연 바다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지막한 동네에서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싶습니다. (55)
▪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이 발목 박고 서서 그 ‘곳’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247)
▪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181)
▪ 비극이 미적인 것으로 승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정직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한테 가해지는 중압을 아무에게도 전가하지 않고 고스란히 짐질 수밖에 없는,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의 ‘정직함’에 있습니다. 비극은 남의 것을 대신 체험할 수 없고 단지 자기 것밖에 체험할 수 없는 고독한 일인칭의 서술이라는 특질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특질이 그 극적 성격을 강화하는 한편 종내에는 새로운 ‘앎’, 곧 ‘아름다움’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비극은 우리들이 무심코 흘려버리고 있는 일상생활이 얼마나 치열한 갈등과 복잡한 얼개를 그 내부에 감추고 있는가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를 객석으로부터 무대의 뒤편 분장실로 인도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인식 평면을 열어줍니다.
열락이 사람의 마음을 살찌게 하되 그 뒤에다 ‘아름다움’을 타버린 재로 남김에 비하여 슬픔은 채식처럼 사람의 생각을 맑게 함으로써 그 복판에 ‘아름다움(知)’을 일으켜 놓습니다. 야심성유휘(夜深星愈輝), 밤 깊을수록 광채를 더하는 별빛은 겨울 밤하늘의 지성이며, 상국설매(霜菊雪梅), 된서리 속의 황국도, 풍설 속의 한매도 그 미의 본질은 비극성에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구태여 비극을 미화하고 비극미를 기리는 까닭은, 한갓지게 비극의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작은 사랑(warm heart)’에서가 아니라, 비극의 그 비정한 깊이를 자각게 함으로써 ‘새로운 앎(cool head)’을 터득하고자 한 오의를 알 듯합니다. (58)
▪ 바늘구멍으로 황소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를 알려는 태도가 못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 (63)
▪ 전자(책가방 끈이 길고 먹물이 든 사람)는 대체로 벽돌을 쌓듯 정제되고 계산된 언어와 논리를 구사하되 필요 이상의 복잡한 표현과 미시적 사고로 말미암아 자기가 쳐놓은 의미망에 갇혀 헤어나지 못합니다. 도깨비이기는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파란색 도깨비와 노란 색 도깨비를 구별하느라 수고롭습니다. 이에 비하여 후자(그렇지 못한 사람)의 그것은 구체적이고 그릇이 커서 손으로 만지듯 확실하고 시원시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단순화와 무리, 그리고 감정의 범람이 심하여 수염과 눈썹을 구별치 않고 목욕물과 아이까지 내다 버리는 단색적 사고를 면치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60)
▪ 증오는 그것이 증오를 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기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68)
▪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83)
▪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84)
▪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89)
▪ 젊은이들은 노동을 수고로움, 즉 귀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비하여 노인들은 거기에다 자신을 실현하고 생명을 키우는 높은 뜻으로 부여합니다. 요컨대 젊은이들은 노동을 ‘소비’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소비, 에너지의 소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노동을 생산으로 인식하는 노인들의 사고와 정면에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공업 노동, 분업 노동의 경험은, 더욱이 상품 생산, 피고용 노동인 경우 노동이 이룩해내는 생산물에 대한 총합적인 가치 인식을 가지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노동이 그 노동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장시켜 준다는 인격적 측면에 대해서는 하등의 신뢰나 실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90)
▪ 어떠한 사회이든 대중은 다수이며 동시에 선량하고 지혜롭습니다. (105)
▪ 저녁에 등불을 켜는 것은 어려운 때 더욱 지혜로워야 한다는 뜻이라 믿습니다. (127)
▪ 창문이 고용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 앞에 조용히 서서 먼 곳에 착목하며 스스로의 생각을 여미는 창문이 귀중한 ‘명상의 양지’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연히 문을 열고 온몸이 나아가는 진실 그 자체와는 구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42)
▪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157)
▪ 응달의 불우한 사람들이 곧 민중의 표상이 아님은 물론, 민중을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가교가 되어주지도 않습니다. 민중을 불우한 존재로 선험(先驗)하려는 데에 바로 감상주의의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민중은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입니다. 이러한 역량은 단일한 계기에 의하여 단번에 나타나는 가벼운 걸음걸이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 점철된 수많은 성공과 실패, 그 환희와 비탄의 기억들이 민족사의 기저에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당당한 모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을 이렇게 신성시하는 것도 실은 다른 형태의 감상주의입니다. 어떠한 시냇물을 따라서도 우리가 바다로 나아갈 수 있듯이 아무리 작고 외로운 골목의 삶이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민중의 뿌리가 뻗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중 특유의 민중성입니다. 부족한 것은 당사자들의 투철한 시대정신과 유연한 예술성입니다.
그 허상의 주변을 서성이며 민중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실패가 설령 그들 각인의 의식과 역량의 부족에 연유된 것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들 개인의 한계에 앞서 우리 시대, 우리 사회 자체의 역사적 미숙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인식과 역량은 기본적으로는 사회적 획득물이기 때문입니다. (158)
▪ 이랑 많이 일굴수록 쟁기 날은 빛나고, 유수봉하해(流水逢河海), 흐르는 물은 바다를 만납니다. (168)
▪ 대상과 자기가 애정의 젖줄로 연결되거나 운명의 핏줄로 맺어짐이 없이, 즉 대상과 필자의 혼연한 육화 없이 대상을 인식, 서술할 수 있다는 환상, 이 환상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범람하는 저널리즘이 양산해 낸 특별한 형태의 오류이며 기만입니다. (179)
▪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181)
▪ 겨울 추위는 이처럼 역경에서 발휘되는 강한 생명력을 확인하고 신뢰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겨울 추위는 몸을 차게 하는 대신 생각을 맑게 해 줍니다. (190)
▪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
이 「대학장구(大學章句)」의 진의는 그 시간의 순차성(順次性)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 각각의 상호 연관성, 그 전체적 통일성에 깊은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바깥의 수신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수신이 아니라 기실 소승의 목탁이거나 아니면 한낱 이기의 소라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치국 앞선 제가란 결국 부옥(富屋)의 맹견(猛犬)과 그 높은 담장을 연상케 합니다. 평천하를 도외시한 치국, 이것은 일제의 침략과 횡포를 그 본보기의 하나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207)
▪ 교회 종이 새벽의 정적을 휘저어놓는 틈입자라면, 꼭 스물아홉 맥박마다 한 번씩 울리는 범종은 ‘승고월하문(僧鼓月下門)’의 ‘고(鼓)’처럼, 오히려 적막을 심화하는 것입니다. (220)
▪ 절충이나 종합은 흔히 은폐와 호도의 다른 이름일 뿐,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는 그 사회, 그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객관적 제 조건에 비추어, 비록 상당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주장이라 하더라도 그 경중, 선후를 준별하고 하나를 다른 하나에 종속시키는 실천적 파당성이 도리어 시중의 진의이며 중용의 본도라고 생각됩니다. (222)
▪ 서구적인 것을 보편적인 원리로 수긍하고 우리의 것은 항상 특수한 것, 우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사고의 식민성’은 우리들의 가슴에 아직도 자국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237)
▪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243)
▪ 주자의 주석에는,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또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行)에 필시 구합(苟合, 迎合)이 있으며, 반대로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마을의 선한 사람들 또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에 실이 없다 하였습니다. (67)
▪ 호창불능침 사아기좌독(皓窓不能寢 使我起座讀).
밤새워 일하는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은 그렇지 않은 사람까지도 밝혀줍니다. (288)
2016. 1.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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