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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

고 박병준 선생을 추억함

by 낮달2018 2020.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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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동지 박병준, 그는 너무 빨리 떠났다

▲  가톨릭 군위 묘원 .  박병준은 김수환 추기경 생가 동네 뒤 산자락에 있는 이 묘원에 묻혀 있다 .

죽음이 삶의 대립 항인 이상 그것은 언제나 낯설어야 마땅하다. 2·30대 팔팔했던 시절에는 ‘죽음’은 늘 ‘강 건너 불’ 같은 거였다. 때때로 만나는 지인의 부음도 지극한 ‘우연’일 뿐, 그것은 일상과는 무관한 특별한 무엇에 그쳤다. 그러나 40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죽음’을 비로소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 ‘돌연사’가 주변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인들의 부음을 ‘심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우울한 50대에 접어든다. 안부를 묻는 게 ‘건강’을 묻는 인사로 대치되고, 오랜만의 만남에서 나누는 것은 주변의 죽음이다. 아무개는 혈압으로 아무개는 심장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아직 ‘괜찮은 내 건강’이 아니라 나에게 ‘이르지 않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다.

 

새삼 꼽아보면 뜻밖에 벗들의 죽음은 곳곳에 있다. 2008년에만 두 친구가 세상을 떴다. 2월에 우리들 ‘3장 1박’의 구성원이었던 밀양의 장성녕이, 11월에는 대구의 박병준이 우리 곁을 떠났다. 모두 믿을 수 없는 허망한 영결(永訣)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우리 세대에게 죽음이란 그렇게 가까운 무엇이 되고 만 것이다.

 

지난 1월 초순, 복직 교사 정기 모임을 다녀오던 길에 우리들 ‘2장 1박’은 박병준(1956∼2008)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묘소를 안내한 ‘장(張)’은 고인의 초등학교 동기다. 아마 1990년대의 어떤 집회 현장에서였던 것 같다. 장이 박병준을 만났고 ‘동기’라며 내게 그를 소개했었다.

 

그는 매우 선량한 인상의 친구였다. 조그마한 키에 안경을 꼈고, 세기 시작한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그는 거의 말이 없는 데다 늘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어서 누구에게도 인상적인 느낌을 주는 이는 아니었던 듯하다. 우리는 장과 함께 두어 차례 함께 술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친구 장은 그와 교우를 이어갔지만, 나는 매년 전국교사대회에서나 그를 잠깐씩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은 경북지부 소속이었으나 달성군이 대구시에 편입되면서 그의 소속이 대구지부로 바뀌면서 만남이 훨씬 뜸해졌다. 복직해 내가 경북 북부지역으로 옮겨오게 되면서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다.

 

그러나 나는 늘 장을 통해서 그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그가 낚시를 퍽 즐기는 애주가이며 뜻밖에 상당한 자기 고집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 따위를 말이다. 쉰을 넘기면서 나는 좀 스스럼없이 그에게 반말지거리도 하는 편이었으나 그는 언제나 깍듯하게 경어를 쓰곤 했다. 그런 세월이 십몇 년 흘렀다.

 

그가 쓰러진 것은 2008년 11월 3일이다. 나는 그 소식을 친구 장으로부터 받았다. 그는 당일 오전, 그가 재직하고 있었던 대구 달성군의 한 고등학교 과학실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친구를 통해 부의금을 전달했을 뿐, 문상도 하지 못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슬픔과 충격이야, 오래된 초등학교 시절의 동무였던 장의 것과 비기겠는가. 장은 장례식은 물론이거니와 49재를 챙겼고, 해마다 그의 산소를 찾곤 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유택은 군위군 군위읍 용대리의 가톨릭 군위 묘원에 있다.

▲  박병준의 묘소를 찾은 대구지부 동료들 (2008. 11. 22)
▲  박병준의 49재(2008. 12. 21).  박병준 선생은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다 .

용대리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그 뒤 산자락에 드넓게 들어선 가톨릭 군위 묘원은 11,000구를 수용할 수 있는 추모원(납골당)과 약 50,000구를 매장할 수 있는 2.5평 크기의 단장형 묘지를 갖춘 대규모 묘원이다.

 

아직도 눈이 쌓여 있는 길을 올라 우리는 그의 무덤 앞에 섰다. 장방형의 넓적한 판석(板石)에 ‘密陽 朴 시메온 丙準 출생: 1956.1.12 선종: 2008.11.3’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던가. 맨 아래 새겨진 ‘6-10-464’는 아마 묘지 번호였으리라. 묘석 좌우의 빨갛고 노란 원색의 조화(造花)가 강렬했다.

▲ 뒤늦게 우리는 그의 묘소에 술을 붓고 그의 영면을 빌었다.

우리는 가져간 막걸리를 부어 올리고 그를 추모했다. 눈이 수북이 쌓인 판석을 쓸어내리고 절을 하고 술잔을 들어 묘지 주변에 뿌렸다. 묘석 아래 묻힌 뼛가루는 이제 흙이 되었을까. 구태여 우리는 비장해 하지 않았다. 벗의 무덤 앞에서는 산 자의 회한과 쓸쓸함도 한갓진 일일 뿐이니까.

 

그가 죽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진정으로 살았던 사람인가를 알았을 것이다. 그를 추모했던 제자들, 그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동료들이 곧 그가 살았던 삶의 증거였다. 죽기 전까지 수년간 매월 한 번씩 인근의 장애아 복지 시설에서 봉사한 것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는 진국의 활동가였던 것 같다. 나는 그가 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집회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젊은 활동가들도 몇 년만 지나면 몸이 무거워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조직 활동에 참여했다. 전교조가 유지되어 온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말 없고 성실한 사람들에 의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  기억에 없는 이 사진 앞에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2008. 5. 24)

며칠 전에 나는 친구 장으로부터 몇 장의 사진 파일을 받았다. 그의 49재와 1주기 사진들이었다. 사진 한 장을 보다 말고 나는 잠깐 망연해졌다. 언제였던가, 그와 내가 같이 찍힌 사진이었다. 아마 친구가 찍었으리라. 여의도 문화마당인 듯한 어느 나무 아래 벤치였다. 장사꾼들이 파는 플라스틱 차양 모자를 쓰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내 옆에 박병준이 어깨를 비스듬히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는 챙 달린 모자를 쓰고 구호가 적힌 노란 몸 자보를 입고 집회에서 나온 유인물을 읽고 있었다. 카메라를 의식했던 걸까,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맥주 깡통을 들고 더위에 지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내 모습과 그의 모습은 이상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늘 집회에서만 만났던 우리들의 어정쩡한 사이 같기도 했다.

 

파일의 사진 정보에 따르면 그 사진은 2008년 5월 24일 오후 4시에 찍힌 것이다. 그게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순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반년이 채 못 되어 그는 예기치 않은 시간에 예기치 못한 곳으로 멀리 떠나버린 것이다. 이 스냅 사진은 마치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 삶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2월이면 2008년에 세상을 떠난 우리 ‘3장 1박’ 중의 하나인 장성녕의 2주기다. 그를 보내고 나서 나는 꽤 앓았던 것 같다. 가까운 벗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해 가을, 박병준을 보내면서 나는 담담했던 것 같다. 벗의 죽음에 익숙해지는 데는 반년이면 족했던 걸까.

 

지난해 5월부터 혈압약을 먹어왔는데, 얼마 전에 나는 약을 바꾸었다. 기왕의 약으로는 다스리기에는 혈압이 높아졌던 까닭이다. 나는 역가가 높은 새 약을 먹으면서 가끔 내가 쓰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이 아득해지곤 한다.

 

박병준은 49재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염색하지 않은 하얗게 센 머리, 수줍은 듯한 환한 미소로. 그때도 눈이 내렸던가. 묘석 주변은 쌓인 눈밭이 푹신하다. 산꼭대기 가톨릭 묘원, 그도 봄을 기다리고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는 이승의 고단한 짐은 내려두고 이제 거기서 넉넉히 쉬고 있을 것이었다.

 

 

2010. 1.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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