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 초기 시 ‘향수’
시골에도 사랑은 있다. 하긴 사람이 사는 곳인데 사랑 없는 데가 어디 있으랴! 아니다, 시골에도 로맨스가 있다고 쓰는 게 더 정확하겠다. 사람이 있고 삶이 있으니 거기 로맨스가 있는 것 역시 ‘당근’이다. 그 전원에서 이루어졌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시골의 사랑, ‘밀밭의 사랑’
뜬금없이 ‘전원의 사랑’ 운운하는 이유는 황순원의 시 ‘향수’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황순원의 단편소설 ‘물 한 모금’을 공부했다. 작가를 소개하면서 나는 그가 쓴 초기 시 몇 편을 들려주었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다. 중학교 때던가, 우리 집에는 자줏빛 하드커버의 <황순원 전집>이 있었다. 거기서 읽은 그의 시 두 편이 기억에 남아 있다. ‘빌딩’이라는 한 줄짜리 시와 ‘향수’가 그것이다.
‘빌딩’의 전문은 ‘하모니카 불고 싶다’다. 칠판에다 서툰 솜씨로 길쭉한 직사각형을 그리고 거기다 일정한 간격으로 ‘ㄱ’자를 두 줄로 그려 넣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건물’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빌딩에서 느낀 인상을 한 줄로 그린 것이다. 아이들은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뱉는다.
‘향수’는 ‘밀밭의 사랑’을 노래한 시다. 유감스럽지만 시골에서 자란 나도 ‘밀밭에서의 사랑’은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빤한 시골에서 젊은 연인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날 수 있는 밀회의 장소로 밀밭만 한 데가 어디 있겠는가.
시골에서는 연인들이 벌건 대낮에 데이트하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당연히 밤에 만난다. 밤이라고 해도 갈 데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다방도 술집도, 러브호텔도 없다. 인적을 피하여 시골의 연인들은 산이나 들로 가야 한다. 어두운데 산보다는 들이 훨씬 낫겠다.
들에도 차폐막이 필요하다. 연인들은 어둡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외진 곳을 선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몸을 숨기는 데는 알맞게 자란 밀밭이나 보리밭이 제격이다. 물론 이도 밀과 보리가 본격적으로 익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익어가는 보리나 밀 이삭은 슬슬 껄끄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퍼렇게 자라고 있는 보리밭이나 밀밭은 그 싱그러운 빛깔만큼이나 맞춤한 사랑의 장소다. 그 깊은 이랑 속에 자리를 잡고 어깨를 가지런히 하고 앉으면 천지는 연인들의 것이 된다. 그 찬연한 녹색의 향연, 밭 임자에겐 폐가 되긴 하지만 보리나 밀은 깔고 앉으면 그야말로 천연의 카펫이다.
거기서 이루어지는 내밀한 사랑 이야기는 굳이 입에 올릴 필요가 없겠다. 장 콕토도 ‘산비둘기’에서 ‘그 나머지는 / 차마 말씀드릴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탓에 거기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강도는 꽤 셀 수 있겠다.
밀밭, 청춘 혹은 욕망의 공간
보리밭이나 밀밭의 사랑이 시골 연인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넘어 때로 어두운 사랑으로 비화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저자의 삶이 반드시 도덕적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때론 그곳은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욕망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나는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꽤 심각하고 음습한 ‘스캔들’을 알고 있다. 그것은 때로 동족 마을에서 벌어지곤 하는 상상을 뛰어넘는 ‘성 추문(섹스 스캔들)’까지 포함한다. 알면서도 덮이고 몰라서 덮이는 그런 추문의 밑바닥에는 벌거벗은 인간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외지의 상급학교로 진학한 나는 고향마을 소식에 어둡다. 그러나 뒷날 나는 전언들을 통하여 사내들이 원하기만 하면 기꺼이 보리밭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처녀를, 새벽녘이면 헝클어진 매무새로 들에서 돌아오는 혼자 된 여자의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다.
고속도로가 허문 윤리공동체
삼강오륜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는 전근대인들 분출하는 인간의 욕망을 어찌 쉬 다스릴 수 있었으랴. 그러나 시골 마을의 그 완고한 윤리공동체를 흔든 것은 근대의 진전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마을의 경우 그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 마을 앞 낙동강 가에 건설되기 시작한 경부고속도로 공사였다.
그 공사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되어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공사가 시작되면서 조그만 시골 마을은 각종 중장비와 그걸 다루는 기사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집집이 노는 방을 세 놓았고 이들의 식사를 위해 마을 안 주막이 밥집으로 바뀌기도 했다.
이 외지에서 온 ‘노가다’들은 거칠기도 했지만 닳고 닳은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객지에 흘러온 혈기왕성한 사내들이었다. 이들은 늘 여자를 원했지만, 마을의 술집에서 그런 수요를 맞추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자에 대한 이들의 욕망이 마을 주민들에게로 옮겨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년 후 이들이 떠날 때 마을마다 한두 명의 처녀들이 그들을 따라갔다. 더러는 혼인을 해서, 더러는 혼인보다 살림을 먼저 차린 상태로.
시골에서 더 좋은 신랑감을 찾기 어려웠던 처녀들에게 그들은 맞춤한 신랑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연애만으로 끝난 관계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 가운데 총각이라고 속인 유부남이 드물지 않았는데 이들은 순진한 시골 처녀들을 데리고 놀기만 한 것이다.
사람들이 ‘고속도로만 난 게 아니라 처녀들 몸에도 길이 났다’고 빈정거리는 근거다. 우리 고향 마을이 그랬을진대 400Km가 넘는 경북고속도로 주변 마을의 상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온전히 그것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경부고속도로는 그 연도에 있는 시골 마을의 윤리공동체를 허무는 단초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는 밀 농사를 꽤 지었다. 방앗간을 운영했던 우리 집에선 여름 들면서 밤낮으로 방아를 찧어야 했다. 밀 도정[제분(製粉)]은 벼 도정(搗精)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날마다 방앗간 앞에는 밀 가마니가 높다랗게 재어져 있었다.
그때, 마을 처녀들과 외지에서 온 트럭·중장비 기사들의 사랑의 공간으로 밀밭이 이용되었는지 어땠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뻔한 시골 환경에서 이들의 연애가 이루어질 공간은 달리 그런 곳 말고 상상하기 어렵다.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서 박정희가 추진하던 근대화는 가속화되었다. 마을에 남아 있던 처녀들이 하나둘 대구의 직물공장으로 구미의 일터로 떠나가게 되면서 농촌은 비기 시작한 것이다. 밀밭과 보리밭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기다.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는 밀과 보리농사 대신 환금성이 뛰어난 참외와 수박 등의 과일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고향마을의 들판이 온통 비닐하우스의 바다로 변한 것은 불과 이삼 년 후다. 마을에서 참외 농사나 수박 농사를 한두 마지기 이상 짓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을이 끝난 때부터 들판은 하나둘씩 비닐하우스로 채워지는 것이다.
밀밭도, 사랑 나눌 젊은이도 없는 시골
밀밭과 보리밭이 사라졌지만 염려할 일은 없다. 사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라, 거기서 사랑을 나눌 젊은이들도 더는 거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아이 울음소리도 없고 노인들만이 사는 마을이 오늘날 우리 농촌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다. 황순원의 시 ‘향수’가 더욱 애틋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나는 정작 밀밭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밀밭에 남은 ‘네 옷고름’과 ‘네 몸 내음’을 나는 희미하게 떠올릴 수 있다. 밀밭 속에 남긴 첫사랑과 추억의 시간, 그 황홀하게 설레었던 젊음을.
그 젊음이 황홀하게 추억되면 될수록 돌아보는 오늘은 남루한 노년이다. 시인이 나지막하게 되뇐 것처럼 나는 시의 마지막 연을 소리 내어 읊어본다. 그 미지의 녹색 카펫 위에서 젊은 연인들이 나누던, 서툴지만 뜨겁던 사랑을 마치 나의 것인 양 추억하면서.
2011. 12.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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