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성제 감독의 <소수의견>
* 영화의 내용이 일부 들어 있습니다.
김성제 감독의 <소수의견>을 주말 조조 상영으로 보았다. 텅 빈 영화관 맨 뒷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우리가 마치 관람 불가의 성인영화를 보러 온 고교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객은 꼼짝없이 우리 둘뿐인가 싶었는데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대여섯의 관객이 더 들었다.
자녀인 듯한 남녀를 대동한 초로의 부부와 젊은 남녀 두 쌍이었다. 그들은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는 젊은 남녀보다 초로의 내외가 궁금했다. 타이를 매진 않았지만, 정장 차림의 깡마른 몸매에 잿빛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어떤 이일까. 주말 아침부터 ‘소수’나 관심을 가질 만한 영화를 보러 온 저 사람은.
첫머리에 ‘허구’라는 사실을 밝히며 시작되지만, 이 영화가 2009년 벽두에 일어난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든 관객은 없을 것이다. ‘용산참사와는 상관없는 허구’라는 감독의 부인은 역으로 이 영화가 그것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용산참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재개발 지역의 철거민 농성을 강제 진압한 경찰의 작전 중에 일어난 참사라는 점에서 둘은 비슷하다. 그러나 사망자 수와 사인, 이후 사고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철거민에게만 묻게 되는 사후 처리 등에서 두 사고는 엇갈린다.
2009, 용산의 복기(復棋)
용산의 비극은 2009년 1월 20일 오전, 용산 남일당 상가 건물 옥상을 점거하고 있던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의 작전이 개시되면서 시작되었다. 철거민들이 건물 옥상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만 하루가 갓 지나가고 있던 때였다.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옥상에 망루를 짓고 농성에 들어간 철거민들은 시너를 준비해 놓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고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진압에 들어갔다. 경찰은 크레인을 동원하여 경찰특공대를 태운 컨테이너를 옥상으로 올려보내는 등 공격적인 진압 작전을 펼쳤다.
두 번째 크레인이 올라가자 건물에서 불이 났고, 불길이 번지면서 불붙은 망루가 무너져 내렸다. 소방관들이 투입되어 망루를 해체하고 나서야 작전은 종료되었다. 상황이 끝난 뒤 망루를 수색하자 경찰 1명과 농성자 5명 등 모두 6명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2월 9일, 검찰은 경찰에 형사책임을 전혀 묻지 않은 대신, 구속자 5명을 포함한 농성자 20명을 기소했다. 10월 28일, 6개월의 공판 끝에 1심이 선고됐다. 참사의 책임은 죄다 기소된 철거민 9명에게 지워졌다. 7명에게 최장 징역 6년의 실형, 2명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이다.
중형이 선고된 것은 화재의 원인이 ‘농성자가 던진 화염병’이라는 검찰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공판 과정에서 ‘화염병에 의한 발화’를 입증할 직접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화염병 투척자도 가려지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이른바 ‘공모공동정범’ 논리, 조직폭력단체를 처벌할 때 쓰는 법 논리에 따른 결과였다.
영화 <소수의견>은 용산참사에 비기면 훨씬 단순한 사건이다. 진압 과정에서 열여섯 철거민 소년과 갓 스물 난 의경이 죽는다. 검찰은 소년을 죽였다며 용역 깡패를 구속하지만 정작 의경을 살해한 소년의 아버지 박재호(이경영 분)는 아들을 죽인 건 의경이라며 자신의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한’ 나라 안에서 ‘다른’ 국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아버지의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된 변호사(윤계상 분)는 경찰의 작전 중에 벌어진,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살인사건, 진압 중에 소년을 죽인 국가의 잘못을 묻고자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고 ‘100원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
검찰의 범인 은폐 조작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사건의 인과관계는 분명하다는 얘기다. 영화 <소수의견>과 현실을 비교하고 ‘<소수의견>은 현실보다 해피엔딩’이라고 쓴 <한겨레> 기사(더 친절한 기자들, 2015. 7. 6.)가 지적하는 것도 그 부분이다.
영화에서와는 달리 현실에선 ‘국민참여재판’은 거부되었고,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중형이 선고되었다. 까칠하긴 해도 공정을 의식한 영화 속 재판장(권해효 분)과 달리 현실에서 ‘변호인은 검사뿐 아니라 판사와도 싸워야 했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도 영화 <소수의견>이 용산참사와 오버랩 되면서 관객에게 환기하는 것은 2009년이든 2015년이든 우리 사회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진실이다. 한 나라 안에서 같은 국민으로 살아가지만 두 부류로 사람들은 갈려 있고, 그 가운데를 가로지른 벽, 혹은 성은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과 권력의 성채는 나날이 견고해져 가는데 그것이 새롭게 만든 기득권의 질서를 추인하지 않고 거기 저항하는 일이 어떻게 귀결되는가. 용산참사나 영화 <소수의견>이 환기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그것은 당신들이 아무리 불법적으로 저항해도 이 승자독식의 성채가 무너질 일은 없으며 또 그래서는 결코 안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리는 없어야 하지만, 기득권의 성채를 옹위하는 데에는 모든 권력기관이 묵시적으로, 그러나 일사불란하게 협력한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경찰과 검찰은 말할 것도 없고, 사법부도 그 일익을 담당한다. 피고와 국민이 생존권을 걸고 싸운다면 국가의 이름 뒤에 숨어 원고와 재판부는 마치 그들이 견고하게 짜놓은 현실, 기득권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손을 잡는 것이다.
최근 어느 일간지가 조사한 ‘대법원 노동판례 첫 전수조사’의 결과는 참담하게도 이 모든 의혹에 대해 ‘그럴 리가 있다’고 이야기해 준다. ‘25년간의 노동 잔혹사’라고 표현된 조사의 결과는 이 나라 인권의 보루, 사법 정의의 본산이라는 대법원판결에 ‘노동자는 없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결론은 법원이 고용 유연화 정책으로 노동조합의 교섭력을 약화하는 데 주력해 온 정부 정책에 맞춰 판례 법리를 변경한 결과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대법원의 ‘친 사용자’ 판례 성향은 짙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10년 가까이 불법 파견이나 정리해고 무효 소송으로 보내고도 대법원이 1·2심 결과를 뒤집으면서 빚더미만 떠안게 된 KTX 여승무원이나 콜텍 해고 노동자 사례는 그 서글픈 반증이다. 대법원은 1·2심에서 승리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게도 사측 주장을 받아들여 ‘해고는 정당’하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용산참사의 1심 선고에서 일곱 명의 농성자들이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도 친 사용자 판례와 멀지 않은 사례다. 경찰이 포함되긴 했지만 정작 네 명의 동료가 희생된 이 참사의 책임을 재판부는 일방적으로 피고인들에게만 물은 것이다. 1심 결과를 비판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논평이 비단 용산참사에만 해당하지 않는 이유다.
“(……)오늘 용산 사건의 재판 결과는 이처럼 피고인들의 손발을 묶어 놓고,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자료는 모조리 감춰둔 채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이 사법의 치욕이며 그 재판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는 법조계의 예상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나아가 공익의 대표자가 아니라 사익의 대변자로 전락한 검찰의 후안무치와 사법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린 법원의 비겁함을 여과 없이 드러낸 사례임도 분명하다.”
- 민변 논평 “우리는 용산 재판을 인정할 수 없다”(2009.10.28.) 중에서
영화 <소수의견>에서도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피고인들이 요구하는 수사기록은 공개되지 않는다. 검찰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60여 명의 증인을 신청한다. 그러나 까칠하지만 착한 재판장(권해효 분)은 피고 쪽의 국민참여재판을 받아들인다. 영화가 현실과 갈라지는 부분이다.
빼앗긴 자와 빼앗는 자의 싸움, 혹은 힘의 부동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된 비극, <소수의견>은 그 불균형을 법정에서 바로잡고자 한다. ‘강약이 부동(不同)’한 상황이긴 하지만 공정한 심판이 가능하다면 그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팀을 이룬 애송이 국선변호사와 이혼 전문 변호사(유해진 분)는 국가를 상대로 법정 공방에 들어간 것이다.
이 싸움은 단순히 피고와 원고의 공방이 아니다. 그것은 빼앗긴 자와 빼앗는 자의 싸움이다. 강력한 사명감으로 무장한 검사 홍재덕(김의성 분)을 비롯한 부장검사와 검사장, 그리고 그들 뒤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 계급이 먼 배경이다. 그들은 자기끼리의 연대로 지켜지는 질서를 통해 ‘국가’가 유지된다고 믿는 것이다.
싸움의 추는 뜻밖에 피고 측으로 기울어가지만, 관객들이 그걸 미덥지 않게 바라보게 되는 것은 오래된 패배의 기억들 때문이다. 상식과 정의 같은 교과서적 개념 따위는 압도적 힘의 우위를 자랑하는 국가, 그 대리인 앞에선 무력한 것이다.
‘이겼다!’라고 느끼는 것은 일종의 착시다. 승리가 반드시 승리일 수도 없고 패배가 반드시 진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30년 전의 시국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은 재판에서 패배한다. 그러나 그는 ‘국민이 국가’라는 빛나는 변론과 함께 역사의 법정에서 승리를 추인받는 영웅으로 탄생하지 않았는가.
<소수의견>에서 변호인들과 피고인이 얻어낸 내용적 승리가 빛을 잃는 순간, 영화는 <변호인>의 결론과도 분명히 갈라진다. 그것은 지금껏 힘겹게 유지해 온 ‘판타지’에서 ‘현실’로의 귀환이다. 법정 공방의 일진일퇴 따위가 이 견고한 세계의 질서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순간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법원에서 만난 변호사 홍재덕(조작 등 사건으로 검사에서 변호사로 전업)은 윤진원에게 그렇게 이죽댄다. 그것은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들의 싸움을 결정지은 승리자의 세계관, 그 과시다. 뺏기는 자의 저항이 세계를 바꾸는 게 아니라, 기존의 세계를 더욱 강화하리라는 걸 새삼 확인해 주는.
“국가라는 건 말이다. 누군가는 희생을 하고 누군가는 봉사를 하고, 그 기반 위에서 유지되는 거야. 말하자면 박재호는 희생을 한 거고, 난 봉사를 한 거지. 근데 넌 결국 뭘 한 거냐? 네가 하는 게 뭐야, 임마…….”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 우리 내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승강기를 타면서 아내는 마치 혼잣말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는 이런 영화는 보지 않을 거야. 늘 지기만 하는 이야기, 지겹지도 않으우?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기만 하는 이야기에 너무 익숙하다. 그 패배의 아픔 위에서 비장한 출사표를 던지는 반전을 달콤하게 상상하면서. 나는 아내의 힐문에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궁싯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입안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소수의견>은 2년 전에 제작되었지만, 개봉이 이태나 미루어졌다. 제작사가 굳이 배급을 포기하면서 다른 회사가 배급을 맡았다. 영화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이 영화는 상영관 확보에 애를 먹어야 했고, 예매율이나 관객의 평가와 무관하게 상영 시간표가 짜였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연평해전>이 보수신문과 정치인들의 후원과 군인들의 단체관람 등 유무형의 지원을 받으며 쾌속 항진하는 것과는 반대다. 종내 서울 일부 학교에서 학부모 부담의 단체관람까지 강행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다시 나는 ‘힘의 부동(不同)’을 생각한다.
2015. 7.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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