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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드라마와 영화 이야기

드라마 <골든타임>의 현실과 비현실

by 낮달2018 2021.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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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골든타임>에서 다루는 현실과 ‘비현실’

▲ 응급의료의 현실을 다루고 있는 문화방송의 월화드라마 〈골든타임〉의 포스터 ⓒ MBC 누리집

텔레비전은 아침부터 한밤까지 드라마로 지새운다. 오죽하면 드라마 공화국이란 표현까지 등장했겠는가. 공중파마다 밤낮으로 내보내는 일일드라마는 ‘기하(幾何)’이며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주말드라마 등의 이른바 ‘미니 시리즈’는 또 기하인가. 공중파에서부터 케이블 방송까지 드라마는 차고 넘친다.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드는 의문, 왜 우리는 그렇게 드라마에 집착할까. 자기 삶이 지나치게 평범해서 늘 극적인 삶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극적 신파로 아롱진 삶에 대한 동경 때문은 아닐까.

드라마는 즐겁다, ‘본방 사수’의 드라마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요즘은 나도 드라마에 슬슬 취미를 붙이고 있다. 미리 시간을 챙겨서 방영 시간을 기다리는 이른바 ‘본방 사수족’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본방을 사수하는 드라마는 두 편이다. 요즘 공전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한국방송(KBS)의 주말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과 문화방송(MBC)의 <골든타임>이 그것이다.

이미 ‘국민 남편’을 배출(!)하고 ‘시월드’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 <넝굴당>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일이 없겠다. 지금껏 홈드라마가 숱하게 우려먹은 구태의연한 고부갈등, 시집과 친정, 자식과 남편으로서의 갈등 따위를 새롭게 포장, 해석해 낸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매력적인 대사다.

<골든타임>에 나는 뒤늦게 편승했다. 딸애가 ‘뜻밖에 아주 재미있다’고 추천해 한 회를 보고 나서 나는 이내 이 드라마의 본방 사수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골든타임>은 우리 사회에 만만치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던 서울방송의 <추적자>에 이은 사회성 짙은 드라마다. 그저 말랑말랑한 연애나 짝짓기 이야기가 고작인 뭇 드라마 가운데서 이런 굵직한 주제를 다룬 드라마는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다.

<골든타임>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놓칠 수 없는 시간’이다. 교통사고 같은 갑작스런 사고로 인한 중증 외상 환자에게는 그것은 1시간, 뇌졸중 발병 환자에게는 3시간이라고 한다. 그 시간 안에 제대로 된 의료 처치를 받지 못하면 당연히 환자는 죽는다.

<골든타임>은 부산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생사를 다투는 응급 외상 환자를 살리려 애쓰는 외과 의사들의 이야기다. 응급 외상 환자를 살리는 데는 품은 많이 들고 수입은 적으니 늘 적자다. 그래서 수익을 올리려는 병원은, 그 병원의 요구에 얽매인 의사들에게 응급실과 거기서 사람을 살리려 애쓰는 외과의들은 골칫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응급의료의 현실을 다룬 <골든타임>

드라마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중증외상센터’의 설립과 ‘응급의료시스템 구축’이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중심에 일신의 자리나 안위 따위보다는 중증 외상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믿고 그것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외과의 최인혁(이성민)과 외상팀 베테랑 간호사 신은아(송선미)가 있다.

▲ 〈골든타임〉은 의사의 정체성을 세워가는 수련의들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 골든타임 갈무리

이 드라마의 주연은 해운대 세중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고 있는 인턴 이민우(이선균)와 강재인(황정음)이다. 그러나 이들 햇병아리 의사들에게 환자들의 생명을 지키는 의사의 기본을 온몸으로 가르치는 최인혁은 압도적 캐릭터로 드라마를 지배한다. 그래서 최인혁을 통해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두 수련의의 아름다운 성장담은 드라마의 양념이다.

최인혁 역을 맡은 배우 이성민을 나는 영화 <부당거래>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검사 류승완의 상관인 부장검사 역으로 등장하는데, 나는 대번에 그가 만만찮은 배우라는 걸 알아챘던 것 같다. 무엇보다 그는 배우로 흠잡을 수 없는 마스크를 갖고 있다. 평범해 보이면서도 만만찮은 결기가 감도는 이런 얼굴이 영화의 완성도에 미치는 아우라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바보 같은 진술이지만 <골든타임>에서 그는 정말 의사 같다. 그가 경상도 억양이 배어 있는 말투로 전문적인 의학용어를 천천히 뇌까리는 모습에는 아연 카리스마가 넘치는 것이다. 예컨대 인턴 이민우에게 던지는 이런 질문 같은 것 말이다.

“이민우 씨, 의사는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요?”

“내가 예측하고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는데 왜 하필 지금 내 앞에 이런 환자가 나타났는가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올 텐데, 그때는 어쩔 겁니까?”

“스탭들, 레지던트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나 혼자 쇼크에 빠진 환자를 케어해야 하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쩔 겁니까?”

“나 대신 누군가가 해결하겠지 하는 나약한 마음은 환자나 의사에게 모두 치명적입니다.”

<골든타임>은 ‘리얼’한 드라마다. 여기서 ‘리얼’하다는 것은 그것이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뜻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이 ‘비현실’의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절체절명의 응급환자 앞에서도 소관 과를 따지면서 책임을 미루고 수련의 앞에서 군림하면서 병원 오너의 권력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는 의사들의 비열한 권위주의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다.

<골든타임>의 현실과 ‘비현실’

▲ 최인혁 역을 맡은 이성민

그러나 최인혁을 비롯한 주인공들이 그려내고 있는 헌신적인 의사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그리 편치 않다. 짧은 경험에 그치긴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그런 인상적인 의사의 모습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있어야 할 현실’을 그리고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과의 괴리와 틈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실제 저런 의사가 있기는 할까?”
“있을 수도 있지. 있어야 하거나.”
“드라마일 뿐이에요. 저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의사가 어디 있어!”

아내의 비관주의를 나무랄 수 없다는 걸 난 안다. 드라마 속의 현실이긴 하지만 최인혁이 지키는 병원에 와서 목숨을 건지는 환자들은 억세게도 운이 좋은 이다. 응급실에서 처치를 받지 못하고 몇 군데 병원을 전전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골든타임’을 지키지 못해 숨지는 환자는 한 해에 9천여 명으로 추산(2007년 기준)된다고 하니 말이다.

아무리 인명이 재천이라지만 사람의 목숨을 운에 걸어야 하니 이 나라의 응급 의료의 현실은 얼마나 후진적인가! 최인혁을 비롯한 <골든타임>의 주인공들은 ‘응급 외상 환자가 외면받는 현실에 대한 책임을 의사 개인이나 일개 병원에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응급 의료 시스템의 구축이 긴요한 이유다.

몰입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이 드라마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매우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기본적으로 응급 외상 환자를 다루는 일의 화급성 때문이겠지만 그것 때문에 이 드라마의 미덕이 과소 평가되지는 않는다. 문제의 ‘해결사’ 노릇을 하는 최인혁의 비중이 극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 다소 사실성을 떨어뜨리긴 하지만 극의 중심축으로서 그의 역할은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의 구현에 필수적일 수밖에 없으니 어쩌랴.

딸애는 이 드라마의 미덕으로 ‘여자 민폐 캐릭터’가 없다는 사실은 들었다. 우리 드라마에 ‘민폐 캐릭터’라는 반갑잖은 배역이 감초처럼 등장한다는 사실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극의 전개와 무관하게 등장하는 이 민폐 캐릭터의 등장은 (특히 의학 드라마에선!) 인물의 전문성을 희화화해 버리는 ‘엽기’를 연출한다.

작품에서 굳이 그런 캐릭터를 꼽자면 최인혁을 따르는 수련의 이민우를 들 수 있긴 하다. 그러나 그의 실수는 수련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례이면서 동시에 의사로서 자신의 장악, 통제력을 갖추는 단련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최인혁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진짜 의사로 단련되는 젊은 의사들의 아름다운 성장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음악에는 무딘 아비와 달리 딸애는 <골든타임>의 음악, OST도 마음에 들어 한다. <골든타임>의 음악은 인디밴드 ‘에브리싱글데이’의 작품이란다. 엔딩 타이틀곡 ‘모래시계’는 지난 9일 공개된 이래 매우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모양이다.

딸애와 달리 나는 이 드라마에서 최인혁과 신은아가 보여주는 미묘한 교감의 떨림 앞에서 시방 설레고 있다. 물론 이 드라마의 주 러브 라인은 아직은 수련의 동기라는 관계를 넘지 않고 있는 이민우와 강재인의 것이다. 그러나 외상 외과 의사와 외상팀 매니저 역할의 베테랑 간호사 신은아가 나누는 우정과 애정의 섬세한 교감이 훨씬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최인혁과 신은아가 나누는 우정과 애정

▲ 신은아 역을 맡은 송선미

최인혁과 2년째 호흡을 맞추고 있는 외상팀 간호사 신은아 역은 탤런트 송선미가 맡았다. 여러 드라마에서 그녀를 보았지만, 그에게서 나는 특별한 매력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그냥 아름다운 여배우 가운데 한 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큰 키가 오히려 그녀가 지닌 여성스러움을 반감해 버리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골든타임>의 신은아는 오직 환자들의 목숨 살리는 일에 매달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 따위에도 무심하기만 한 최인혁을 안팎으로 챙겨 준다. 그녀는 곧 결혼할 예정이고 결혼 후 남편과 캐나다로 떠날 예정이지만 정작 결혼이나 캐나다행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최인혁의 무모한 성실 앞에 속상해하고 그것을 가슴 아파하는 여자다.

그녀의 관심과 배려 앞에 선 최인혁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신은아의 질책 앞에서 우물쭈물 변명을 내뱉는 그의 모습은 꼼짝없이 마누라의 강짜 앞에 몸을 움츠리는 남편의 그것이다. 겉으로는 완벽하게 사이좋은 의사와 간호사라는 사무적 관계를 넘지 않지만, 이들의 관계가 러브라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다분한 것이다.

과장되거나 억센 억양을 배제한, 표준어를 의식적으로 쓰려고 하는 부산사람의 말씨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신은아의 말투는 최인혁을 질책할 때만큼은 날이 서 있다. 그 날선 말투 속에 담뿍 담긴 것은 동료로서의 우정이고 여자로서의 안타까운 사랑이다.

사표를 내고 떠났다가 응급환자 때문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수술을 끝낸 최인혁을 신은아는 병원 복도에서 만난다. 다음은 내가 시청하고서 나름대로 ‘복기(復棋)’한 드라마다.

신은아 : (힐난하듯) 다시 오신 거예요?
최인혁 : (변명조로) 아닌 거 알잖아요.
신은아 : (비꼬듯) 아니, 이렇게 부른다고 쉽게 올 걸 사표는 왜 내셨어요?
최인혁 : 다시 들어온 거 아닙니다. 저 환자 고비만 넘기면 사표 수리될 겁니다.
신은아 : (목소리를 높이며) 그 환자 보다가요, 응급실 중증외상환자 들어오면요?
최인혁 : 그거는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캐나다 나갈 준비는 잘 되고 있어요?
신은아 : (고함지르듯) 예! 교수님은요, 갈 자리는 정하셨어요?
최인혁의 전화가 울린다.
신은아 : (앙칼지게) 전화 받으세요!
최인혁 전화를 받는다. 비자 어쩌고 하는 전화다.
신은아 : 어디 가세요?
최인혁 : (변명조로) 취업해야지요. 언제까지나 한량으로 놀 수는 없잖아요?
마취과 의사 지한구 등장.
지한구 : 용병회사 들어간대요. 어디? 파키스탄? 이라크?
최인혁 : 리비아.
지한구 : 아, 리비아.
최인혁 : 나도 나를 필요로 하는 데서 일하고 싶어요.
입을 앙다무는 신은아.

▲ 두 남녀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도 〈골든타임〉이 주는 즐거움의 하나다.

이 대목이다. 입을 앙다무는 신은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 나는 좀 아련해져 버렸다. 이후부터 드라마를 보면서 두 사람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걸 설렘으로 즐기게 된 것이다. 신은아가 최인혁에게 보여주는 우정과 안타까운 연민의 감정은 가장 순수한 인간적 교감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표면상 사무적인 관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은 괴롭다. 그러면서도 그 월요일을 기다리게 만든 게 <골든타임>이다. 그 드라마를 쓴 최희라 작가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 이성민과 송선미다. 그것은 막장의 길을 골라서 가는 숱한 짝짓기 드라마 가운데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박지은(<넝굴당>), 박경수(<추적자>) 작가를 주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2012. 8.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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