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진의 ‘서글픈 사랑’이 된 폴 앵카의 ‘크레이지 러브’
고등학교 신입생이던 1972년 겨울쯤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동아리 친구 녀석이 ‘요즘 유행하는 노래’라며 노래 한 곡을 들려주었다. 단박에 느낌이 달랐다. 쥐어짜는 듯한 가수의 목소리가 떠난 사랑을 추억하는 노랫말과 맞춤하게 어울리는 노래였던 까닭이다.
그게 ‘서글픈 사랑’이다. 친구 녀석은 동무들 가운데 드물게 집에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고작 라디오를 통해서 인기 가요를 익히고 있었던 우리와 달리 녀석의 집에는 이른바 ‘엘피(LP)’판이라는 음반이 수북했다. 당연히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녀석이 훨씬 빨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이내 그 노래를 배워 흥얼거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쇠라도’ 소화할 만큼의 튼튼하면서도 예민한 정서로 무장하고 있었던 열일곱 살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무렵에도 그것이 미국 팝송을 번안한 노래라는 걸 알았던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크레이지 러브’, ‘서글픈 사랑’이 되다
어저께 우연히 ‘크레이지 러브(crazy love)’를 듣다가 그게 40년도 전의 그 번안가요 ‘서글픈 사랑’의 원곡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둘러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크레이지 러브’가 당시에도 이미 10년도 전인 1958년에 발표된 폴 앵카(Paul Anka)의 노래라는 걸 확인했다.
인터넷에서 들을 수 있는 ‘서글픈 사랑’은 대부분 ‘블루진’이라는 듀엣이 부른 노래다. 임용재, 김명희라는 낯선 이름의 이 남녀 듀엣이 부르는 ‘서글픈 사랑’을 들으며 나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그게 41년 전, 그 추억의 노래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오전에 대전에 사는 고교 동창 녀석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고교 때 즐겨 부른 노래 중 ‘서글픈 사랑’ 기억나? 가수가 누구였는지……, 알면 알려 줘.”
오후에 녀석과 통화할 수 있었다.
“그거, 폴 앵카의 ‘크레이지 러브’를 말하는 거 아냐?”
“맞아. 그런데 그걸 부른 가수가 누구였는지 생각이 전혀 안 나네.”
“나도 기억에 없어.”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블루진’이라는 듀엣이 불렀다는데?”
“글쎄, 말이야. 나도 통 기억이 안 나.”
임용재도, 김명희도, 블루진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가수가 솔로였는지 듀엣이었는지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게 40년 세월이다. 원곡을 부른 폴 앵카(1941~ )를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로, 열일곱 소년을 쉰여덟 초로로 바꿔낸 세월 말이다.
<위키백과>는 폴 앵카를 ‘캐나다에서 태어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겸 영화배우’라고 소개하고 있다. 음반 자료에 실린 해맑은 미소년의 모습은 그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사이에 아이돌 가수로서 누린 인기를 가늠케 해 준다.
‘Diana’, ‘Lonely Boy’, ‘Put Your Head on My Shoulder’와 같은 그의 다른 히트곡은 내게는 낯설다. 다만 1970년대에 발표한 ‘Papa’는 이수미가 부른 ‘아버지’로 기억된다.
그는 영화 <자니 캐슨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 Starring Johnny Carson)>의 주제곡으로 톰 존스의 히트곡 중 하나인, 프랭크 시내트라의 상징적인 노래 ‘마이 웨이(My Way)’, 마이클 잭슨의 ‘This Is It’ 등 다수 히트곡의 가사와 작곡 작업에 참여해 재능을 알렸다.
2012년에 출시한 ‘크레이지 러브’를 표제로 한 앨범 표지에 실린, 머리가 잔뜩 벗어진 70대의 폴 앵카의 모습에서 세계에서 천만 장의 음반을 팔아 치운 10대 아이돌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크레이지 러브’를 발표한 것은 그가 17살 때였다.
앵카의 ‘크레이지 러브’를 듣는다. 그 가사에 넘치는 ‘미친 사랑’의 의미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면서. ‘크레이지 러브’는 제목 그대로 사랑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나이의 노래다. 그 노래는 10년 세월을 지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서글픈 사랑’이 되었다.
번안가요가 원곡의 의미와 무관한 노랫말을 취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애절한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웨딩 케이크’가 기실은 한 기혼여성의 ‘결혼과 결혼 후의 삶’에 대한 담담한 고백이었고, [관련 글 : 두 개의 ‘웨딩 케이크’, 그 삶과 사랑] 떠돌이의 낙관적인 삶에 대한 은유로 일관한 ‘프라우드 메리’(번안곡 ‘물레방아 인생’)는 유람선과 함께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과 지향의 노래였다. [관련 글 : ‘프라우드 메리’와 40년 세월 ]
폴 앵카의 ‘미친 사랑’은 ‘미친 사랑인 줄 알면서도’ 그치지 못하는 사랑, ‘당신만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한’ 미친 사랑이다. 그것은 사내가 여인에게 ‘미친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1950년대 말, 넘치는 자유의 제국, 미국의 사랑이었을까.
1971년은 8월 20일에 분단 26년 만에 역사적인 첫 남북대면, 남북적십자회담이 이루어진 해다. 이 역사적인 남북대면이 이루어지고 난 사흘 뒤에 영화 ‘실미도’의 배경이 된 군 특수병의 난동 사건이 있었고, 그해 12월에 대통령 박정희는 유신의 전조가 된 ‘국가 비상 사태’를 선언했다.
인터넷 자료는 번안곡 ‘서글픈 사랑’의 음반이 나온 게 1971년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그 노래를 우리가 즐겨 부르게 된 것은 1972년이 확실하다. 노래가 히트하는 데 일 년쯤 걸렸던 것일까. 아니면 내 기억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를 생산한 이의 것 가운데 하나가 착오일까.
‘사랑’의 통속성, ‘서글픈 사랑’은 ‘미친 사랑’의 끝
‘미친 사랑’이 ‘서글픈 사랑’이 되면서 노래는 차분해졌다. 아니 차분해진 느낌이 강하다. 원곡과 번안곡을 여러 번 들으면서 그런 생각은 점점 짙어진다. 폴 앵카의 목소리는 고음이어서 더 강렬한 느낌이 들게 하지만, 번안곡의 목소리는 쥐어짜는 듯한 감정의 고양이 있긴 하지만 훨씬 가라앉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노랫말이 주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친 사랑’에 드러난 절절한 고백은 ‘서글픈 사랑’에선 ‘시든 꽃처럼 서글픔만 남’긴 ‘맹세’의 허망한 결말과 이별의 쓸쓸함으로 바뀐다. 이때, '차창에’ 내리는 ‘비’나 ‘둘이서 앉았던 구석진 그 자리’, ‘가고 없는 서글픈 우리의 사랑’이 환기하는 것은 사랑의 통속성이다.
사랑은 적당히 순수하면서 동시에 적당히 통속적이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주체할 수 없는 뜨거움, 강렬한 감정의 분출을 수반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일까. ‘미친 사랑’과 ‘서글픈 사랑’의 거리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사랑은 인간이 다다른 가장 위대한 감정의 절정이기도 하지만 때론 그것이 무모한 과장, 감정의 기만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그 같은 사랑의 모순적 이중성 때문이다. ‘미친 사랑’인 줄 알면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 한 사나이의 애절한 고백은 ‘서글픔만 남’기고 떠난 사랑 앞에서 시나브로 회한으로 잦아든다. ‘서글픈 사랑’은 ‘미친 사랑’의 끝, 들끓던 사랑이 식으면 만나는 회한의 길목, 그 쓸쓸한 거리를 적시는 밤비 같은 것은 아닐는지.
2013. 9.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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