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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낡은 절집 가득한 온기와 정담(情談)

by 낮달2018 2019.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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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 기행

▲ 선암사 대웅전. 보물 1311호. 1824년 중건했다 .정유재란 이전에는 이 자리에 2 층의 미륵전이 존재했다고 한다 .

전남 순천시 승주읍에 있는 선암사는 애당초 우리의 여행 일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보리암 다음의 목적지로 선암사를 넣은 것은 제대로 마음속에 새길 능력도 변변찮으면서 명승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내 과욕 때문이다.

 

지도를 여러 번 살펴보는 과정에서 보길도로 가는 길목에 순천 조계산이 있었고, 승보사찰 송광사 너머 산자락에 깃든 태고총림(太古叢林) 선암사를 발견한 것이다.

 

송광사는 두어 차례 들렀으나 선암사는 초행이다. 노승과 동자승이 등장하는 뒷간 광고로 널리 알려진 이 절집을 나는 작가 조정래의 출생지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나는 조정래보다는 그의 부친을 먼저 알았다. 70년대에 고등학교에 다닌 이라면 국어 교과서에 실린 다음 노래를 기억할 수도 있겠다.

 

나도 푯말이 되어 너랑 같이 살고 싶다.
별 총총 밤이 들면 노래하고 춤도 추략
철 따라 멧새랑 같이 골 속 골 속 울어도 보고.

오월의 창공보다 새파란 그 눈동자
고함은 청천벽력 적군을 꿉질렀다.
방울쇠 손가락에 건 채 돌격하던 그 용자(勇姿).

네가 내가 되어 이렇게 와야 할 걸,
내가 네가 되어 이렇게 서야 할 걸,
강물이 치흐른다손 이것이 웬 말인가.

 

그렇다. ‘나도 푯말 되어 살고 싶다’는, 시조치고는 드문 문장형 제목을 단, 이 작품을 쓴 이는 승려 조종현이다. 그리고 그가 낳은 4남 4녀 중 둘째가 작가 조정래이다. 조정래가 선암사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물론 나는 <태백산맥>의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를 통하여 알았다.

 

“선암사에서? 웬 절집에서 아기가 태어난담.”

 

선암사 하면 떠오르는 풍경은…

▲ 선암사 들머리의 흙길. 겨울의 산은 역시나 좀 삭막하다.

선암사는 대처승으로 이루어진, 조계종에 이은 국내 두 번째 종단인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叢林, 강원·선원·율원의 3개 교육기관을 모두 갖춘 사찰)이다.

 

교과서에서 만났던 시조 시인과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던 <태백산맥>의 작가를 연결한 것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직관이었다. 절집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요즘에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조정래가 태어난 것은 해방 이태 전이다.

 

아직 조계종과 태고종이 갈리기 전이었고, 일제 강점기 때 만해 한용운이 불교개혁의 차원에서 일본 불교로부터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권장한 대처제도로 많은 승려가 결혼하던 시절이었다.

 

불교계에서 일제 잔재 청산의 대상이 되면서 대처제도는 해방 후 된서리를 맞는다. 여러 해의 법정 분쟁을 거쳐 조계종단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 종파가 태고종을 정식으로 선포한 것은 1970년이다.

▲ 선암사 3층석탑. 대웅전 앞에 선 쌍탑이다. 보물 395호. 신라 시대 석탑이다.

이후 선암사를 생각할 때마다 그곳을 한 번도 찾지 못한 내게 떠오르는 그림은 이런 것이다. 남향의 오래된 요사채, 낡고 좁다란 마루에 부서지는 따뜻한 햇볕, 기저귀를 차고 그 마루를 기어 다니는 어린애와 그를 어르고 있는 장년의 승려. 그것들을 조합한 풍경으로 떠오르는 산사가 선암사였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20∼30년 전만 해도 불교는 마치 중세 봉건사회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구닥다리 종교로만 여겨졌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적 얘기다. ‘동화사에 갔더니 중들이 탁구를 치고 있었는데 정말 우스워 죽을 뻔했다’는 얘기가 화제가 되고 모두 전염된 듯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요즘은 경내에 승용차를 끌고 오는 자가운전 스님도 많고, 카세트가 염불을 대신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승려의 혼인을 바라보는 눈길을 그리 곱지 않은 듯싶다. 종교적 금욕과 독신 생활을 수행과 신에 대한 귀의로 이해하는 우리 사회에서 ‘아내를 둔 수행자’가 쉽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더디기는 하지만, 세상의 변화에 비추어 보면 조계종의 승려나 가톨릭 신부들의 금욕 독신 수행의 계율도 다분히 빛이 바래고 있는 느낌이다.

 

창건 528년 된 절집에서 느끼는 60∼70년대의 시공간, 그 온기

▲ 선암사 경내. 철쭉나무 고목이 이 절집에 고인 오랜 세월을 말해 준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528년)한 절이다. 뻔히 교과서에서 배운 거지만, ‘백제’라는 이름 앞에 영남에서 온 여행자는 여기가 호남이라는 걸 실감한다. 창건 이후 도선국사, 대각국사 등 수많은 선승을 배출해, ‘선암사 선방 수좌는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어떤 사찰에서도 입방이 허락’될 만큼 선방으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해를 넘겨 진행되고 있는 신구 주지 간 싸움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은 착잡하다. 지난 1월 11일 오후 늦게 선암사를 찾았을 때, 산사는 평온하기만 했다. 저잣거리의 대중들이 수행자를 바라보는 눈높이를 고려하면 승려들이 사찰의 운영을 두고 벌이는 때아닌 활극은 이 절집이 일천오백 년 동안 쌓아온 선방으로서의 아름다운 이름을 일거에 무화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한바탕 눈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잔뜩 흐린 날씨였고, 시간을 놓치면 어두워져 제대로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조바심으로 서둘러 경내를 돌았다. 대웅전 앞뜰을 지나 무우전, 장경각을 돌아 무량수전과 해천당을 거치는 길이었다. 절집을 찾은 대중들이 적지 않았지만, 경내를 돌면서 나는 문득 이 낡은 절집을 덮고 있는 게 60, 70년대의 시공간, 그 온기라는 걸 깨달았다.

▲ 선암사 무우전. 마치 여염집처럼 안존하게 서 있는 이 전각 주변이 가장 아름다웠다.
▲ 무우전 돌담길. 나란히 선 나무는 매화와 벚나무들이다. 꾸밈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 게 이 풍경의 미덕이다.

그렇다. 선암사에는 새로워진 게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범종루에 걸린 ‘대적광전 복원’ 관련 펼침막이나 경내에 커다랗게 세워진 대웅전 중창 불사 입간판에도 불구하고 널찍한 경내 곳곳에 들어박힌 여러 전각과 그리로 가는, 마치 고샅길 같은 통로에 고여 있는 것은 그만그만한 온기와 두런대는 정담(情談) 같은 것이었다.

 

선암사가 서른 개가 넘는 전각이 위아래로 조밀하게 들어차 있는데도 비좁고 답답해 보이지 않는 것은 급한 경사지를 여러 단(段)으로 깎고 축대를 쌓아 조성한 대지에 전각들을 배치해 공간을 오르는 방향으로 시선이 분절되기 때문이고, 위아래보다 좌우가 다소 넓은 까닭이다.

 

그러나 봄은 아직 멀다

▲ 무량수전. 작은 소나무숲이 인상적이다.

선암사엔 황악산 직지사(直指寺)의 그것처럼 낮고 소박하게 돌담을 둘러친 전각이 여러 채다. 각황전을 품고 있는 무우전을 비롯해 응진당, 응향각, 적묵당, 해천당 등은 마치 여염집처럼 돌담 속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물론 닫히거나 열려 있는 그 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담장 바깥의 번뇌와는 오연한 적요(寂寥)와 무심이다.

 

무우전(無憂殿)의 안존하게 닫힌 대문과 완만히 구부러지는 돌담, 돌담 옆에 가지런히 어깨를 맞대고선 매화나무와 벚나무가 연출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은 오래 그윽하게 마음에 잔잔히 젖어 든다. 경내에서 가장 외져서 스님들의 선방으로 쓰이는 듯, 잠긴 문을 밀어 보다 말았다.

 

매화는 언제 피는가. 시인 송수권은 선암사 무우전 한편에서 매화를 노래했다.

 

예닐곱 그루 성긴 매화 등걸이
참 서늘도 하다
서늘한 매화꽃 듬성듬성 피어
달빛 흩는데 그 그늘 속
무우전(無憂殿) 푸른 전각 한 채도
잠들어 서늘하다

     - 송수권 ‘조선 매화’

 

선암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게 60, 70년대의 낡고 오래된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절집이 400만 불자를 가진, 조계종에 이은 제2 종단의 총림인데도 경내에 수차에 걸쳐 요란하게 진행되었을 중창 불사의 흔적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까닭이다. 여러 전각의 단청도 낡았고, 경내에 드문드문 주차된 차량을 빼면 길과 건물에 손을 댄 자국도 찾아보기 어렵다.

▲ 적묵당. 절의 대중이 모여 공양하는 곳. 돌담 위에 기와를 켜켜이 넣고 흙담을 쌓았다.

각 전각을 잇는 길도 가는 자갈이 깔린 모래땅 그대로고, 장경각 아래 키 큰 전나무 아래의 연못을 빼면 인위적 조경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오래 묵은 철쭉, 벚나무, 매화나무, 동백나무, 소나무 등이 제멋대로 서 건물을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전각이 많다. 이렇게 절집을 가꾼 것은 선암사가 납자, 학인들의 공간이었던 탓일까.

 

▲ 해천당. 낮은 돌담과 수더분한 공간이 마치 여염집을 닮았다.

해천당(海川堂)은 예의 그 선승과 동자승 광고에 나오는 ‘선암사 뒷간’ 바로 옆에 있다. 절의 객사(客舍)로 절에 오는 객승이나 신도들이 묵는 곳이다. 하얀 눈을 이고선 이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어쩌면 작가 조정래가 태어난 곳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해천당은 여염집 같은 점은 무우전과 같으나 훨씬 더 수더분하고 정겨운 모습의 건물이어서다.

▲ 선암사 뒷간. 광고 한 편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건물이다.

고어로 된 나무 팻말을 달고선 선암사 뒷간은 예의 TV 광고 이래 선암사의 아이콘이 되어 버린 듯하다. 아주 튼튼하고 큼지막하게 지어진 이 재래식 변소에서 나종영 시인은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와 ‘청솔 바람 소리’,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를, 그리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노래한다.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 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 소리 보입니다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밑 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 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 나종영 <우수(雨水)> 전문

▲ 선암사 승선교. 뒷간과 함께 선암사의 아이콘이 된 아름다운 다리.(위) 강선루. 선암사엔 천왕문이 없다. 일주문도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봄은 멀다. 해거름 이내가 내리는 선암사 산문을 빠져나오는 길, 커다란 무지개 모양의 아름다운 다리 승선교(昇仙橋)를 지나치며 떠나온 절집을 뒤돌아보았다. 선계에서 내려온 신선들이 속세의 민심을 살폈다는 누각, 강선루(降仙樓)가 마치 피안의 신기루처럼 멀어 보였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승용차의 문을 열며 우리는 바야흐로 30, 4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밀레니엄 연대로 천천히 진입했다.

 

2007. 2. 2. 낮달

 

 

 

낡은 절집 가득한 온기와 정담(情談)

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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