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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본의 강압으로 불평등 을사늑약(한일협상조약) 체결

by 낮달2018 2024.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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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05년 11월 17일,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가 골자인 조약

▲ 을사늑약 체결 장면을 묘사한 일본 잡지의 삽화. 현장에 없었던 고종(오른쪽 휘장 쪽)을 그려 넣었다 .

1905년 오늘,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주요 골자로 하는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첫 단계였던 이 조약의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었다.

 

을사년에 체결되었기 때문에 ‘을사협약’, ‘을사5조약’으로 불리는데 우리 세대는 6, 70년대 국사 교과서에서 ‘을사보호조약’이라 배우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제2차 일한협약’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2000년대 이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불평등조약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부른다.

 

강압에 의한 불평등조약 체결

 

일본이 열강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승인받아 본격적으로 식민지화를 추진하게 된 것은 1904년(고종 41년) 2월에 시작된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부터였다. 일본은 1904년 1월, 러시아에 대해 중립을 주장하는 한국을 장악하고자 대한제국의 황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2월에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관련 글 : 만주와 한국 지배권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맞붙다]

 

일본은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점령한 뒤 일본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조약을 강요했다. 고종과 대신들이 완강히 저항했지만, 일본은 결국 강제로 공수(攻守)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 공수동맹으로 일본은 한국의 지원을 받으며 러일전쟁(1904.2.~1904.9.)을 치러냈고 전후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대한제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한국의 식민지화를 노린 일본의 첫 시도는 독립 국가인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일이었다. 1905년 11월 15일, 일본의 특명 전권 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 황제에게 5개 조의 한일 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을사오적, 조약에 찬성하다

 

이때 조선 왕궁에는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공사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주한 일본군 사령관이 궁궐 안팎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호위함으로써 일촉즉발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고종은 이토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의 승인을 거부하였다.

▲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 2009년 12월 복원되어 현재 전시관으로 개방되고 있다 .

이에 11월 17일, 이토와 하야시는 다시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을 무장 군인들로 포위한 채 어전회의를 열게 했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황제의 옥새를 찍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5시간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자 초조해진 이토는 하세가와와 헌병 대장을 대동하고 수십 명의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대신들에게 노골적으로 위협과 공갈을 자행하였다.

 

이토는 살기를 띠고 직접 메모 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可)’냐 ‘부(否)’냐를 따져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찬성하였다.

▲ 을사오적. 매국의 대가로 이들은 일제로부터 은사금과 작위(후작, 백작, 자작)를 받아 영화를 누렸다.

이토는 각료 8 대신 가운데 5명이 찬성했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궁내부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황제의 재가를 강요하였다. 8명의 각료 가운데 조약에 반대한 이는 세 명뿐, 나머지 다섯 명의 대신은 찬성하였다. 이들 다섯 명의 대신이 바로 ‘을사오적’이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등을 중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일본에서는 ‘제2차 일한 협약’이라 부름)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한일 수뇌들이 찍은 기념사진이다 .

조약의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으로 넘어가 통감부가 이를 장악하였다. 대한제국의 외부는 폐지되고 한국 주재 각국 공사관도 철수하였다. 초대 통감으로 취임한 이토 히로부미가 사실상 회의를 주재하고 정부 대신들이 참여하는 ‘시정개선협의회’가 열려 대한제국의 내정 개혁을 통제하였으니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실질적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일곱 분 지사의 ‘자정(自靖) 순국’

 

을사늑약 이후 을사의병 등 거국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망국의 추세를 막지는 못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을사조약 무효선언서를 국외에 보내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1907)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이완용의 매국 내각과 일제 한국통감부 사이에서 한일신협약(1907)과 기유각서(1907) 등이 잇달아 체결되면서 한국의 국권은 점점 유명무실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5년 후인 1910년에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관련 글 : 경술국치 - 대한제국, 일본에 강제 편입되다]

▲ 대한제국 국새가 찍힌 고종황제의 을사조약 무효 공식선언문.
▲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하여 모두 7분의 지사가 자정 순국으로 스러지는 나라의 명운을 함께하였다.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모두 일곱 분의 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기울어지는 나라와 명운을 같이했다. 1905년 5월에 런던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1874~1905)이 주영국 한국공사관을 철수한다는 통보를 받고 자결한 이래, 11월에 전 참판 홍만식(1842~1905)과 충정공 민영환(1861~1905), 12월에는 조병세(1827~1905), 김봉학(1871~1905), 이상철(1876~1905), 송병선(1836~1905) 선생이 각각 자정 순국한 것이다. [관련 글 : 충정공 민영환, 동포에게 사죄하고 자결하다]

 

그런데 ‘을사늑약’은 그 체결 과정에 일본의 군사적 강압이 있었고, 조약 체결 시 갖추어야 할 제반 절차가 빠져 있었다. 즉 협상 대표에게 내리는 전권 위임장, 합의 후 국가 원수의 비준, <관보>에 게재 등이 빠진 것이다. 이는 ‘을사늑약’을 ‘법적 형식’이 결여된 불법적인 조약이라 보는 근거다.

 

법적으로 무효인 조약에 근거하여 국권을 잃고 수십 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했으니 힘에 근거한 국제관계의 교훈은 쓰디쓰다. 1965년에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일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의 제2조를 통해 이 조약이 무효임을 상호 확인하였다. [관련 글  : 1965년, 한일기본조약 조인, 그래도 문제는 남았다]

 

 

2016. 11.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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