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일제, 동화정책의 최종판 ‘창씨개명’을 명령하다

by 낮달2018 2023. 11. 10.
728x90

[역사 공부 ‘오늘’] 1939년 11월 10일, 일제 ‘조선민사령’ 개정 창씨개명 강제

▲ 창씨개명을 신고하기 위해 경성부 호적과에 줄을 선 시민들. ⓒ 박도 〈일제강점기〉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중 개정의 건’(제령 제19호)과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제령 제20호)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창씨(創氏)] 제출할 것을 명령하였다. 일본식 성씨를 만드는 ‘창씨(創氏)’가 핵심이었던 이 제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조선식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이 영(令) 시행 후 6개월 이내에 호주가 새로운 일본식 성씨(姓氏)를 정하여 신고할 것.
2. 조선에서도 서양자(壻養子, 사위를 양자로 삼는 것)를 인정하며, 서양자는 처가의 성씨를 따름.
3. 이성(異姓) 양자를 인정하며, 양자는 양가의 성씨를 따름.

 

일제 동화정책의 최종판, 창씨개명

 

그것은 1937년 가을부터 조선에서 ‘황민화’와 ‘징병’을 촉진하고자 쏟아내기 시작한 ‘기반적 동화정책’의 최종판이라 해도 좋은 것이었다. 일제는 1937년 10월에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맹세하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를 공포하여 모든 행사에서 ‘국민의례’로 제창하도록 의무화했다.

 

또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삼아 조선인들에게 이날 신사참배를 의무화했고 1938년 2월에는 조선에서 ‘육군 특별 지원병령’이 공포되고 4월 3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1938년 4월부터는 조선어 교육 및 사용을 금지하는 ‘국어(일본어) 상용정책’이 시행되었다. 5월에는 ‘일본 국가총동원법’이 조선에서도 시행된다고 공포하였다.

 

이제 일본은 조선과 대만의 주민들을 일본인으로서 총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위해 조선인과 대만인의 개인 표지인 성명 구조를 일본인과 똑같이 만드는 게 필요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제는 ‘징병 등 자원 동원의 완성’을 목표로 조선과 대만에서 ‘중국식 성’을 폐지하고 ‘일본식 씨’를 창설하는 ‘폐성(廢姓) 창씨’ 정책을 입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문과 정체성의 표지로서 성을 중시하는 조선인들은 일제의 창씨 명령에 분노하여 저항하기도 했다. 특히 유림과 명문가에서는 창씨 자체보다도 오히려, 동성동본이 결혼하고, 이성(異姓)을 양자로 맞아들이며 데릴사위가 자기 성을 버리고 장인의 성을 따르는 등, 다른 성의 피를 섞는 가족제도로 바뀌는 데 대한 분노와 저항이 컸다.

▲ 8월 10일까지 서류를 제출하라는 대구지방법원의 창씨개명 촉구 전단(1940). 오른쪽 제목은 "호기를 잃지 않게"다.

일제의 강제로 창씨 비율 80.3% 달성

 

당연히 ‘희망에 따라’ 실시하게 되었다는 창씨개명은 지지부진, 1940년 5월까지 창씨 신고 가구 수가 7.6%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는 전가의 보도인 권력 기구에 의한 강제 조치를 시행했다.

 

1. 창씨(創氏)를 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을 거부한다. 학교 차원에서 거부할 경우 해당 학교는 폐교한다.
2. 아동들을 이유 없이 질책·구타하여 아동들의 애원으로 부모의 창씨를 강제한다.
3.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공·사 기관에 채용하지 않으며 현직자도 점차 해고조치를 취한다. 다만,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창씨개명 한 후에는 복직할 수 있다.
4. 행정기관에서는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의 모든 민원사무를 취급하지 않는다.
5.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단정하여 경찰 수첩에 기입해 사찰을 철저히 한다.
6.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우선적인 노무징용 대상자로 지명한다.
7.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은 식량 및 물자의 배급대상에서 제외한다.
8. 철도 수송화물의 명패에 조선식 씨명이 쓰인 것은 취급하지 않으며, 해당 화물은 즉시 반송 조치한다.
9. 창씨개명령 제정 이후 출생한 자녀에 대하여 일본식 씨명으로 출생신고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그 신고를 계속 반려하여 자녀와 그 부모가 창씨 하도록 강제한다.

 

조선총독부는 관변 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동원하여 창씨 신고를 강제로 밀어붙여 기한 마감인 8월 10일까지는 총 320만 116호, 창씨 비율을 80.3%로 끌어올렸다. 나머지 19.7%도 조선총독부의 직권에 의하여 각자의 ‘성’이 일본식 ‘씨’로 호적부에 등재되었다.

▲ 창씨개명 신청서. 경북 영덕 강구의 한 가족이 창씨 하여 가족들의 이름을 바꾸려 하고 있다.
▲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들은 서둘러 총독부의 창씨개명 명령을 따랐다.

창씨개명에 모든 한국인이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에 앞장선 친일지식층을 대표하는 이광수 등 일부 친일파 지식인들은 창씨에 앞장서기도 했다.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 한 이광수는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을 통하여 창씨개명을 선동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진무 천황께옵서 어즉위(御卽位)를 하신 곳이 가시하라(橿原)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가구야마(香久山)입니다. 뜻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아 ‘향산(香山)’이라고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수’의 ‘광’ 자를 붙이고 ‘수’ 자는 내지(內地) 식의 ‘랑’으로 고치어 ‘향산광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 지도적 제씨(弟氏)의 선씨 고심담(<매일신보> 1940.1.5.) 중에서

“창씨의 동기 : 내가 향산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랑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改)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 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좀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 ‘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2.20)

 

평론가 김문집(1907~?)은 “대구(大邱)에서 태어나 도쿄, 즉 에도(江戶)에서 성장하고 용산(龍山)역에서 전사해 돌아오는 황군 장병을 맞아 운 적”이 있다며 그 각각의 지명에서 한 자씩 따서 ‘오에 류노스케(大江龍之助)’로 창씨개명 했다.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1900~1979)은 총독부의 내선일체 체제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일본어 시집까지 낼 정도의 극렬 친일파였는데 그의 창씨명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였다. 바꾼 이름 고이치는 일제의 황도(皇道) 정신인 ‘팔굉일우(八紘一宇)’를 딴 것이었다.

▲ 문인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에 앞장섰던 이광수, 주요한, 김문집.

그러나 대부분 식민지의 조선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들은 이 정책에 ‘외형적으로는 순응하면서 내용으로는 정책의 목표와 취지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대응해 갔다. 비록 두 글자로 된 일본식 씨명을 만들더라도 자신의 가문이나 조선인임을 나타내는 씨명을 선택하는 방식을 통하여 민족의식과 긍지를 잃지 않았다. 이를 유형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① 자신의 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유형:
   金 → 金家, 金村, 金山, 金海, 金光, 金江, 金河, 金川, 金本, 金田, 月金 등등.
② 자신의 본관을 그대로 사용하는 유형:
   능성 具 → 綾城. 풍천 任 → 豊川. 우봉 李 → 牛峰. 평산 申 → 平山 등등.
③ 본관에서 한 자를 취하거나 본관의 옛 지명을 나타낸 것:
    풍양 趙 → 豊田. 단양 禹 → 丹山. 광산 金 → 金光. 안동 권 → 安權, 權東 등등.
④ 시조나 유명한 선조의 이름, 호, 고사 또는 전설 등에서 취한 것:
   밀양 朴 → 新井(시조가 우물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에서), 경주 李 → 岩村(시조가 바위 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에서), 한산 李 → 牧山(목은의 후예임을 나타냄) 등등.
        - 구광모, 「동화정책 사례연구」 중에서

 

창씨개명에 대한 저항

 

창씨개명에 대한 저항은 전면 거부와 함께 창씨개명은 하되, 창씨 속에 이를 조롱·풍자하는 내용을 넣는 것과 원래의 성을 그대로 살려 두는 형식이 있었다. 경상남도 양산군 금융조합 직원 엄이섭(嚴珥燮)이 이름 밑에 ‘야(也)’ 자만 붙여 ‘엄이섭야(嚴珥燮也)’로 신고하여 온 가족의 성이 ‘엄이(嚴珥)’가 되었는데 이는 창씨를 풍자·조롱한 것이었다.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란 뜻으로 ‘견자웅손(犬子熊孫)’, ‘개똥이나 먹으라’는 뜻으로 ‘견분식위(犬糞食衛, 이누쿠소 구라에)’라 신고한 예도 있었다. 이들은 물론, 창씨를 모독했다고 퇴짜를 맞았다. 또한 ‘병하(炳夏)’라는 이름 위에 ‘전농(田農)’이란 창씨를 얹어, 일본어로 ‘덴노헤이카(天皇陛下)’로 부르게 하려다 경을 친 농부도 있었다.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의 유건영(柳健永)은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아래와 같은 항의서를 총독과 중추원에 제출하고 결연히 자결하였다.

 

“슬프다. 유건영은 천 년의 고족(古族)이다. 일찍 나라가 망할 때 죽지 못하고 30년간의 욕을 당하여 올 때에, 그들의 패륜과 난륜(亂倫), 귀로써 듣지 못하고 눈으로써 보지 못하겠더니, 이제 혈족의 성까지 빼앗으려 한다. 동성동본이 서로 통혼하고, 이성을 양자로 삼고, 서양자가 제 성을 버리고 계집의 성을 따르게 되니, 이는 금수의 도를 5천 년의 문화 민족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나 유건영은 짐승이 되어 살기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노라.”

 

전라북도 고창읍의 설진영(薛鎭永)은 창씨하지 않으면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위협을 받자, 창씨개명을 하겠다는 신고서를 제출하여 아이들을 학교에 다니게 한 다음 투신자살하였다.

 

이와는 달리 일제가 창씨를 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로부터 예외로 인정되어 ‘성’을 그대로 ‘씨’로 유지할 수 있었던 특권층이 있었다. 이들은 ‘이왕가(李王家)’로 불리던 조선의 왕족, 일본군에 복무하는 조선인 고위 장교, 친일파 거두 등이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창씨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이러한 특권을 허용했다.

 

특권층은 아니지만, 창씨를 하지 않아도 묵인해 준 집단도 있었다. 연희전문과 보성전문학교 등의 교수들과 기독교 계통의 학교 교사들, 총독부 산하 반관반민 기관에 근무하는 양반 출신 사무원들이었다. 총독부는 이들의 행위를 ‘배일’이나 ‘독립 고취’가 아니라, 학자와 양반 후예로서 최소한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옹고집으로 보았다. 그래서 강의실과 사무실 등 공식 석상에서 그들이 자신의 ‘성’을 일어로 발음하는 것이 확인되면 창씨 신고를 하지 않아도 불이익을 주지 않고 그것을 ‘씨’로 묵인해 준 것이다.

▲ 이광수 가족의 창씨개명을 다루고 있는 〈매일신보〉 기사(1940.8.27.)

일본군 중장까지 오른 홍사익, 귀족원 의원 윤덕영, 중추원의 한상용, 김대우 전북지사, 기업인 박흥식 등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창씨를 따로 할 필요가 없는 집단은 일본에도 조선의 ‘성’과 동일한 ‘씨’가 존재하는 柳(야나기), 南(미나미), 林(하야시), 桂(가쓰라) 등의 종중들이었다.

 

광복으로 되찾은 ‘성과 이름’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조선인들은 일본식 씨(氏)로부터 해방되었다. 창씨 제도가 시행된 지 5년 6개월 만이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0월, 미 군정청은 법령 122호로 ‘조선 성명 복구령’을 공포하여 일본식 씨명을 소급하여 폐기하는 조처를 했다.

 

“일본 통치시대의 법령에 기인한 창씨 제도에 의해 조선 성명을 일본식 씨명으로 변경한 호적 기재는 그 창초일로부터 무효임을 선언한다.”

 

그리하여 나카지마 이켄(中島一權)은 정일권으로, 마쓰우라 히로(松浦鴻)는 노덕술로 돌아왔다.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는 다시 이광수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는 주요한이 되었다. 만주에서 돌아온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는 부모가 지어준 반듯한 우리 이름 박정희가 되었다.

 

이민을 가서 다른 나라에 사는 동포들도 이름은 그 나라 식으로 따르면서도 성은 쉽게 버리지 않는다. 이는 일본이나 중국도 비슷하다. 신분의 표지와는 관계가 없어졌지만 자기 성을 지키는 것을 민족적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거기엔 식민지 치하에서 견딘 5년여 세월, 잃어버린 성씨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일까.

 

 

2016. 11. 9. 쓰고

2019. 11.9. 더하고 기움

 

참고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구광모(중앙대 ), 「동화정책 사례연구-창씨개명 정책을 중심으로」, 한국정책학회 세미나 자료(200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