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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만주와 한국 지배권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맞붙다

by 낮달2018 2024.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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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04년 2월 8일, 도고의 일본함대 뤼순 군항 기습으로 ‘러일전쟁’ 발

▲러일전쟁을 거인과 난쟁이의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는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의 삽화 .

1904년 일본의 뤼순항 기습으로 러일전쟁 발발

 

1904년 2월 8일 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일본함대가 뤼순(旅順) 군항을 기습함으로써 러일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기습 공격으로 전쟁을 시작했지만, 정작 일본은 2월 9일,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 군함을 격침한 이튿날인 10일에야 선전을 포고하였다.

 

20세기 초반을 장식한 이 전쟁은 한국과 만주(중국 동북지방)의 분할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격돌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을 두고 나누어진 거대 강대국 동맹 간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보면 영일동맹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배후로 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극동의 국제적 대립 관계는 중국 분할 경쟁으로 전개되었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인 ‘삼국간섭’(1895: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요동 반도를 차지하자 삼국이 외교적 개입으로 일본의 철수를 요구해 관철한 사건)으로 일본의 만주 진출을 저지했다.

 

러시아는 1896년에는 러청동맹 밀약을 맺고 일본이 중국·한국·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원조할 것을 약속, 만주 북부를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청(東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이후 중국은 러시아(관동저우)와 독일(자오저우만), 영국(주룽반도, 웨이하이웨이), 프랑스(광저우만) 등에 조차권(租借權)을 내주면서 분할되고 있었다.

▲ 포트 아서로 불린 뤼순항 . 전쟁은 일본군이 이 군항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

이처럼 극동에서는 영국·미국과 러시아·프랑스·독일이라는 열강의 대항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3국간섭 이래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일본은 1900년 청나라의 의화단사건 진압에 참여하면서 마침내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 수 있었다.

 

일본은 ‘만한 교환론’으로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 노려

 

그러나 여전히 중국 본토에 대한 이권을 얻지 못한 일본은 1902년 영일동맹을 결성하면서 러시아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러시아는 의화단운동 이후의 만주 주둔군의 제1기 병력은 철수하였으나 이듬해 4월의 제2기 철수는 미룬 채 만주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 압록강 연안까지 진출함으로써 남하 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러시아의 강경한 태세에 위협을 느낀 일본의 여론은 주전과 반전으로 나뉘었지만 대세는 점차 주전론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1903년 일본 각료·원로들의 어전회의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과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우선권을 각각 인정하는 만한(滿韓) 교환론으로 러시아와 교섭하기로 하였다.

 

1904년 2월 4일 마침내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 개시와 국교단절을 결정했다. 2월 8일, 육군 선발대가 한국의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진격했고 도고의 함대는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 이후 일본은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 위키백과

서울로 들어온 일본군은 대한제국 황궁을 점령한 뒤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한일의정서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중립을 주장하는 한국을 세력권에 넣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일(朝日) 공수동맹이었다.

 

일본, 한국과 강제로 ‘조일공수동맹’ 체결

 

4월 하순 한국에 상륙하여 북상한 일본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같은 달 랴오둥(遼東)반도에 상륙한 제2군은 난산(南山)과 다롄(大連)을 점령하고 뤼순을 고립시켰다. 6월에는 만주군 일본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8월 라오양(遼陽) 부근에서 두 나라 군대가 첫 번째 대규모 접전을 벌였고, 10월의 사허후이(沙河會) 전투, 1905년 1월의 헤이거우타이(黑溝臺) 전 등에서 일본군은 고전하였지만 모두 승리하였다.

▲ 랴오둥반도에 상륙한 일본군 . 1904년 5월 초 일본 제 2군은 반도에 상륙하여 뤼순을 고립시켰다 .
▲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 4월 13일 뤼순항 밖에서 기뢰로 폭침하면서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이 전사했다.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황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 안에 봉쇄당하였다. 뤼순 공략을 맡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제3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공격으로 큰 손실을 보았지만 1905년 1월 드디어 공략에 성공하였다.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크로폿킨 지휘 하의 러시아군 32만과 육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嚴)가 이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펑톈(奉天:현 심양)에서 맞닥뜨렸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패퇴시켰지만, 일본군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를 정도의 손실을 보았다.

 

한편 러시아는 육지 전투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 벤츠기 지휘하의 발트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일과 28일 대한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와 맞붙었다. 그러나 이 쓰시마 해전에서 수백 년간 러시아의 가장 막강한 해상전력이었던 발트함대는 불과 이틀 만에 궤멸하였다.

▲ 러일전쟁의 상황 지도 ⓒ 나무위키
▲ 러일전쟁을 이끈 양국의 지휘관들. 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일전쟁의 승리 후에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함대 총사령관 로제스트 벤츠기 제독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고 49척이나 되었던 대함대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한 군함은 겨우 3척이었고 전사자는 5천을 넘었다. 일본은 당시 일본군 전사자가 200명도 되지 않았다며 ‘전 세계 해전사에서 전무후무한 대승리’라고 자찬했고, 이후 총사령관 도고는 국가적 영웅, 군신(軍神)으로 여겨져 추앙되었다.

 

쓰시마 해전서 러시아 발트함대 궤멸

 

양국의 전쟁 수행능력은 펑톈 전투 전후부터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계속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데다가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로 비롯된 군대의 반란과 농민폭동(제1차 혁명)이 일어나 혁명을 진압하는 것이 급했다.

 

상황은 일본에도 유리하지 않았다. 약 20억 엔의 전비(戰費) 가운데 12억 엔의 공채 모집에 응함으로써 일본을 지원하였던 영국과 미국도 일본의 승리가 만주의 단독 점령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미국과 프랑스는 3, 4월경 양국에 강화를 종용하였고, 쓰시마 해전 후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알선으로 8월 포츠머스 강화회의가 열렸다. 우여곡절 끝에 9월에 남 사할린섬의 할양을 내용으로 한 조약이 조인되고, 마침내 휴전이 성립되었다.

▲ 포츠머스 조약을 맺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표들. 조약은 1905년 9월 5일 조인됐다. ⓒ 위키백과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남만주에서 일본이 지배권을 확립하였다는 것이었다. 전승국이 된 일본은 1905년 7월과 8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각각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인받았다.

 

이어 9월의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한국의 독점적 지배를 확인받음으로써 한국의 일본 식민지화는 사실로 굳어지고 있었다. 일본은 11월 17일에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마저 박탈했다. [관련 글 : 일본의 강압으로 불평등 을사늑약(한일협상조약) 체결]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일본의 침략성을 꿰뚫어 보았지만, 장지연은 뒷날 친일 부역으로 <친일인명사전> 에 올랐다 .

독점적 한국 지배권, 식민지화로 이어져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그 명분으로 동양평화론 또는 아시아 연대론을 내세웠다. 러일전쟁은 서양 세력의 침략에 맞서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며 아시아 삼국이 힘을 합쳐 러시아를 막아내야 하며, 일본은 당연히 그러한 아시아연대의 맹주라는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초기만 해도 이러한 주장에 넘어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일본을 돕자는 모금 운동을 벌이기까지 했을 정도였고 당시 한국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을사늑약 체결 뒤 11월 20일 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발표한 장지연이 논설 도입부에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지연은 이 조약이 한국뿐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만들어낼 것이라면서 그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요하면서 온갖 감언이설을 총동원하였지만, 논설에서는 이를 꿰뚫어 보면서 일제의 침략성을 정확히 비판하고 있다.

 

이후, 한국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국권 회복 운동과 함께 거국적인 항일운동이 이어졌다. 그러나 늑약을 통해 일본 통감부가 외교권을 장악함으로써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실질적 식민지로 떨어졌다. 그리하여 5년 후,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2018. 2. 7. 낮달

 

· <두피디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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