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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청년 노동자 전태일, 스스로 자신을 불살라 ‘인간 선언’을 하다

by 낮달2018 202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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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70년 11월 13일 - 전태일 열사, 근로기준법 준수 요구 분신

▲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에서 홍경인이 분한 전태일이 분신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은 금요일이었다. 오후 1시 40분께, 서울 평화시장 앞길에서 한 청년이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 화염에 휩싸여 몇 마디의 구호를 절규하듯 외쳤고, 이내 자리에 쓰러졌다. 청년은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치료받았으나 14일 오전 1시 30분에 숨졌다.

▲ ⓒ 전태일기념관
▲ 전태일의 어린시절과 소년시절. 그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고,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한 채 노동자가 되었다. ⓒ 전태일재단

청년의 이름은 전태일(1948~1970). 대구에서 태어나 상경, 1965년 ‘시다’(견습공)로 평화시장 ‘삼일사’에 입사해, 1966년 ‘통일사’에 미싱사(재봉공)로 들어갔고 1967년에는 재단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공장주에게 착취당하는 어린 여공들의 어려운 생활과 비참한 현실을 대하며 그들을 돕다가 해고를 당하고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다.

▲ 전태일의 청년 시절. 오른쪽은 바보회장 때 명함. ⓒ 전태일재단

노동자들, ‘11시간 작업, 일요일 휴무, 정기 건강진단, 다락방 철폐, 환풍기 설치’를 요구하다

 

전태일은 1969년 6월 근로조건 개선 운동을 추진하려 평화시장의 재단사 모임 ‘바보회’를 조직하였으나 위험인물로 몰려 해고되고 바보회도 와해되었다. 그러나 그는 서울시청, 노동청, 신문사 등을 찾아다니며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를 호소했고 1970년 9월 16일에는 옛 바보회 회원들과 함께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 개선 진정서’를 냈다.

 

삼동친목회는 ‘11시간 작업, 일요일 휴무, 정기 건강진단, 다락방 철폐, 환풍기 설치’ 등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그들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했고 전태일은 분신으로 항거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노동계는 물론, 한국 사회에 통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저임금을 토대로 한 불균형 성장, 재벌 위주의 성장 우선 정책이 국가의 당면과제로 제시되었던 1960~1970년대의 노동 현실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운동은 철저히 통제되었고 어용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았다. 그런 현실을 전태일은 죽음으로 고발 폭로한 것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각성을 급속도로 확산하였다. 또 경제성장의 그늘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유명무실한 노동조합의 문제점을 고발했다. 언론매체에서는 한때 보도조차 꺼리던 노동문제를 다룬 기사와 보도를 쏟아냈다.

 

‘저임금 기초의 불균형 성장’의 응달

 

학생들은 노동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추도식과 시위를 벌여 나갔고 종교계는 추도예배로 노동 행정 실태를 고발하고 노동정책의 일대 전환을 요구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1929~2011)은 근로기준법 준수, 노조 활동 허용 등을 약속하지 않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밝혔고 노동청장이 공개적으로 요구사항 이행을 약속한 후에야 장례를 치렀다.

 

같은 해 11월 17일 전태일의 친구들은 ‘전국연합 노조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최초의 민주노조를 결성하고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청계피복노조와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다. 전태일의 죽음은 한국 사회 민주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1970년대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 아들의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이소선 여사.
▲ 전태일은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 민중의소리
▲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아들의 유언에 따라 청계피복노조와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다 . ⓒ 전태일기념관

전태일 열사는 50년 뒤에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받았지만 …

 

1984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에는 종로구 청계천로 105번지에 전태일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전태일재단에서는 ‘전태일 문학상’과 ‘전태일 노동상’을 시상하고 있다. 1988년 11월 전태일 정신을 기리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대회’가 개최되면서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린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는 전태일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하였다. 전태일에게는 2020년 11월 국민훈장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도 한국 사회의 희생자들,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삶을 살았으며, ‘뭉쳐야 이긴다’라는 신념으로 ‘단결 통일’을 중시하였다. 그는 1990년 4월 18일 사월혁명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사월혁명상’을 수상하였다. 2011년 9월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그는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묘의 뒤쪽에 안장되었다. 2021년 이소선 10주기에는 전태일기념관에서 구술 기록집 <이소선의 기억과 기록>(김대현 편저)을 출간하였다.

▲ 내 서가의 전태일 평전. 1983년에 나온 책이다.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그린 평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조영래(1947~1990) 변호사의 역작이다. 그는 민청학련사건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이소선 여사를 만나거나, 평화시장을 방문하여 전태일의 삶을 기록하였다. 1974년 장기표로부터 전태일 육필 수기를 전달받은 것을 계기로 그는 <전태일 평전>을 쓰기 시작하였다.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조영래는 1976년에 <전태일 평전>을 탈고했으나, 유신체제에서 국내 출판사들은 출간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이 원고는 1978년 일본의 다이마쓰 출판사에서 <불꽃이여 나를 감싸라: 어느 한국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먼저 출간되었었다.

 

전태일 평전이 저자 이름 없이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으로 돌베개에서 출간된 것은 1983년이었다. 내 서가의 그 책을 구매한 것은 아마 1984년 이후였을 것이다. 책에서 처음 만난 전태일의 삶과 죽음은 내게도 충격이었고, 노동조합운동에 참여하면서 나는 여러 해 동안 그를 실천의 준거로 기억하곤 했다. 동료들과 함께 관람한 박광수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도 잊히지 않는다.

▲ 뒷날 나온 <전태일 평전> 절판된 책이다. 원 안은 저자 조영래
▲ 민주노총이 지난 11월 11일 오후 2시 서울 서대문역 사거리에서 베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23 전국노동자대회 ⓒ 노동과세계

전태일 이후 53년, 한국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나

 

2015년부터 써온 <역사 공부 ‘오늘’> 꼭지에 나는 전태일 분신을 다루지 않았다. 광주항쟁의 발발을 직접 다루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 하나로 다루기에는 그 역사의 함의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53년, 2023년의 노동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나. 형식과 내용 면에서 반세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진전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정치 사회적 노동 현실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숱한 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노조와 가정을 파괴해 온,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무분별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은 야당의 주도로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여당은 이를 반대하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요청하겠다고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달 26일, 택시 완전월급제(전액관리제) 시행을 요구하며 택시 회사에 맞서 싸우던 택시 노동자 방영환 씨가 몸에 불을 댕겼고 그는 분신 열흘 만인 지난 6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누구인가. 지난 11일 베풀어진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대회’에서 노동자들이 ‘노동개악 저지’ 손팻말을 들고 ‘퇴진광장을 열자’고 외친 이유다. [관련 기사 : 끝내 숨진 분신 택시노동자무엇이 그를 내몰았나]

 

내일, 전태일 53주기를 앞두고 나는 서가의 <전태일 평전>을 펼쳐보았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서(序)’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 노동자.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 선언’이라고 부른다.

 

인간 선언-가난과 질병과 무교육(無敎育)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먼지 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 번 못 보고 하루 열여섯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그는 죽었다.”

▲ 전태일 연보 ⓒ 전태일 기념관에서 발췌

 

2023. 11. 12.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전태일기념관

· 전태일재단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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