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엘뤼아르,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 1895~1952)의 ‘자유’는 고등학교 시절, 그 첫 연을 내 자취방 벽에 붉은 매직으로 휘갈겨 써 놓았던 시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제대로 된 문학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고, 이른바 ‘세계의 명시’ 따위는 싸구려 다이제스트 시집을 통해서 간신히 알게 되었다. 학교 도서관이나 형의 서가에 박혀 있던 흰색 장정판(하드 커버)의 그 시집들에서 그냥 겉멋으로(!) 하이네와 릴케, 워즈워스와 포의 시를 맛보고, 그것들 가운데 제법 멋있는 시구(詩句)들을 외우는 정도로 외국 시에 입문했었다.이후,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거기서 특별히 현대시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프랑스 시인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게 되면서, 비로소 스스로 찾아 공부하면서였다.
이른바 문예사조라는 것은, 막상 아이들에게 가르치긴 했지만, 그 정형화된 지식이란 게 긴요하지 않다는 걸 나는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작품 속에 숨어 반짝이는 아포리즘(잠언)적 시구에 매료되면서 구르몽과 폴 엘뤼아르, 플로베르 같은 시인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정작 자취방에 엘뤼아르의 시를 휘갈겨 쓸 때만 해도 나는 그 첫 연이 그 시의 전부인 걸로 알 만큼 무지했다. 그게 시의 첫 연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엘뤼아르가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저항 시인이었다는 점도 그를 좋아한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레미 드 구르몽이나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는 평이하면서도 그 속에 반짝이는 에스프리를 담고 있는 점이 좋았는데 비겨, 엘뤼아르나 플로베르의 시(그의 시 ‘바르바라’는 정말 마음에 드는 시다.)는 그 초현실주의적 성격 탓인지 격동하는 삶에 대한 예지와 허무적 낭만(?)이 가슴에 와 닿았다.
‘자유’는 가끔 읽을 때마다 자유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경도와 추구가 내 둔감해진 감성을 뒤흔듦을 느낀다. 자유의 전편을 읽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쯤에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시인총서> 가운데 엘뤼아르의 <이곳에 살기 위하여>에서다.
이 땅에서 ‘자유’의 의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수구 정치인들의 이해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되어 온 듯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함’이라는 소박한 사전적 정의가 내포하고 있는 자유의 본질적 의미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폴 엘뤼아르의 ‘자유’는 초현실주의 화가 장 아르프를 추모하기 위해 쓴 시다. 자유는 일상과 욕망과 희망 위에 존재하고, 그것은 모든 인식과 삶의 전제로서 찬란하게 빛난다. ‘오, 자유여’라고 내뱉는 순간, 우리는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자신의 영혼을 어렴풋이 느낄지도 모른다. [시 전문 텍스트로 보기]
2007. 2.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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