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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내와 산의 만남, 천지갑산

by 낮달2018 2021.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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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길안면 대사리 천지갑산(天地甲山)

▲ 천지갑산에서 바라본 길안천. 불문의 동료가 찍은 사진.

천지갑산(天地甲山, 안동시 길안면 대사리)을 처음 찾은 것은 2004년 9월, 한가위 대목 밑이었다. 지금도 변함없이 ‘묻지 마[(不問]’의 원칙(어디로 가는가, 누가 가는가)을 지키며 여러 해째 안동 인근의 산과 언덕과 들을 더듬고 있는 불문산악회의 동료들과 함께였다. 그리고 지난 주말, 다시 천지갑산을 찾았다.

 

‘천지갑산’은 정작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조그만 산이건만, 그 이름이 좀 별나다. 그것은 조선조 유배지였고, 이 나라에서 가장 험한 산골로 알려진 ‘삼수갑산’을 떠올리게 하고, 그 갑산과 이 갑산은 어떤 인연이 있는가를 궁금해 하게 하는 이름인 까닭이다.

 

그러나, 그 이름의 연유는 다소 싱겁다. 고작 462m 높이의 산에다 ‘천지’를 붙인 건 예의 ‘백발 삼천 장’쯤의 어법일 테고, 갑(甲)은 ‘으뜸’이라는 뜻이다. 신교육 초기에는 학생들 성적을 매기면서 ‘수(秀)’를 ‘갑’이라 했고, 요즘도 무슨 경기든 승리에 이바지한 선수를 ‘수훈 갑’이라고 일컫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천지갑산 등산로 입구. 산을 끼고 흐르는 내가 길안천이다 .

그 으뜸산이라는 이름에 고개를 주억거리려면 두 시간쯤이 필요하다. 안동시 길안면 송사리에서 바라보는 산은 그저 하고 많은 산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가파른 산길을 올라, 여러 봉우리를 거치다 보면, 산 위에서의 조망이 제법 운치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또, 눈 아래 굽어보이는 길안천의 맵시나 빛깔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도 접어주어야 하는 데가 바로 천지갑산이다.

 

세 해 만에 아내와 함께 그 산에 다시 올랐다. 좁은 데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면 군데군데 매어놓은 밧줄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날씨는 잔뜩 흐렸고 산등성이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아내는 비를 만날지 않을까 저어했지만 이런 상태라면 안동에선 웬만해선 비가 오지 않는다.

▲ 가파른 산길 곳곳에 이런 밧줄이 매여 있다.
▲ 길안천은 오른쪽에서 흘러와 갑산을 끼고 한 바퀴 돌아 낙동강으로 흐른다.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정상에 이를 수 있었다. 정상이라야 돌비 하나가 서 있는 두어 평의 공간일 뿐이다. 오래 묵은 듯한, 그러나 척박한 토양 탓에 구부러지고 그리 굵지 않은 소나무가 비탈길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 산의 소나무는 백 년이 넘은 노송이라고들 하는데, 글쎄, 나무의 나이를 헤아릴 만한 눈이 내겐 없다.

 

울창한 숲 덕분에 정작 산 아래를 조망할 기회는 많지 않다. 산에서 굽어보면 길안천이 이른바 태극형을 이루며 흘러가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나중에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길안천은 전형적 사행천(蛇行川)이다. 오른쪽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은 천지갑산을 끼고 한 바퀴 몸을 뒤채며 다시 오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 천지갑산 정상 (462m)
▲ 천지갑산에는 7봉우리가 있는데, 각각 이런 팻말을 걸고 있다 .
▲모전석탑 주변은 온통 키 높이의 개망초밭이다.

천지갑산의 깊은 맛은 하산길에 있다. 정상에서 대사리 모전석탑에 이르는, 밧줄에 의지하여 내려와야 하는 하산길은 좁고 가팔라 정작 주위 풍광을 곁눈질할 겨를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다 눈길을 주면 멀쩡하던 골짜기가 이른바 천인단애(千仞斷崖), 가파른 벼랑으로 변하는가 하면, 낯선 풀꽃 따위가 길을 막곤 하는 것이다.

 

게다가 오르던 길과는 달리 내려오는 길은 하마나 끝날 것 같은데도 여전히 다시 산굽이를 돌아야 하고, 그늘 짙은 가파른 벼랑길에선 웬 섬뜩한 귀기마저 느끼게 한다. 길안천이 잡힐 듯이 보이는 냇가를 따라 이어진 길은 다시 가파른 산길로 되돌아가는 등 여러 굽이를 거쳐 중턱의 갑사터에 이른다.

▲ 대사리 모전석탑. 자연석인 바닥돌 위에 기단과 몸돌을 올렸다.

갑사(甲寺)였다는 빈대 잡으려다 태워 버렸다는 절집 터 언덕에 대사리 모전 석탑이 있다. 탑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모전(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이라고는 하지만 잘 다듬은 돌이 아니라 평평한 자연석을 쌓아 올린 탑이다.

 

전체적으로 실한 자연석을 쌓아 올린 기단은 짜임새가 있어 보이지만, 일층에 그친 탑신과 지붕돌은 엉성한 돌들을 얼기설기 쌓아 놔 마치 석탑리 방단형 석탑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탑은 규모와는 달리 상당한 안정감과 균제미(均齊美)를 보여준다. 낙수 면에 무성하게 자란 이끼꽃은 이 탑이 견뎌온 세월이리라.

▲ 하산 등산로의 끝부분은 길안천 가녘의 철제 다리다 .

 

길안천은 맑았지만, 장마철인데도 수량은 많지 않았다. 천변에 설치한 철제 다리를 건너면서 아내는 ‘안동 인근에 다녀 본 산 중에서 경치는 기중 낫다’고 말했다. 그렇다, 모두 그런다. 무어 대단한 높이도 그에 걸맞은 골짜기도 갖지 못한 이 조그마한 산이 감추고 있는 속살을 쉬 설명하기는 어렵다.

 

누구는 기암괴석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길안천이 천지갑산을 만나며 이루는 절경이 보는 이의 넋을 뺏는다고 하지만, 막상 산에서 내려오면 기암괴석도, 길안천과 어우러진 빼어난 경치도 따로 기억되지 않는다. 다만 짧은 산행으로 만났던 갑산이 펼쳐 보인 풍경 하나가 마음에 오롯이 그 그늘을 드리우고 있음을 깨달을 뿐이다.

 

갑산에 오르기 전에 송사리에 있는 길안초등 길송분교 뒷마당에 들러 천연기념물(174호)인 소태나무를 둘러보는 것도, 그 옆에 서 있는 당집을 사진기에 담는 것도 가외의 즐거움일 수 있겠다. 송사리를 떠나면서 우리는 가을에 다시 오마고 마음속으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정말, 가을이 깊으면 이 산과 내의 아름다움은 더욱 그윽해질 거였다.

▲ 길안초등 길송분교 뒷마당의 천연기념물 소태나무와 당집. 왼쪽이 소태나무, 오른쪽은 회나무다 .

 

2007. 7. 14. 낮달

 

 

*덧붙임:

안동시에서 천지갑산에다 7억여 원의 예산을 들여 인공폭포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거센 반발과 비난을 샀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11월에는 공사가 끝나야 하나 지금 어떤 공사도 시작되지 않고 있다. 안동시에 물어보았더니, 아직도 계획이 최종 확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여론 때문에 슬며시 꼬리를 내린 형국인 듯하다.

 

지방자치 덕분에 땅과 물조차 관광 상품화하고파 안달이 난 관리들의 눈엔 경치 좋은 천지갑산에다 폭포를 만들면 더 많은 사람이 꾈 것 같겠지만, 그건 거대한 시멘트 흉물 하나를 세우는 거나 진배없는 일이다. 담당자에게 철회되어야 마땅하지 않으냐고 건넸더니 대답은 안 하고 웃기만 했다. 지자체 단체장이야 임기를 채우고 물러나면 그뿐이지만, 길안천과 천지갑산은, 그 물과 산은 영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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