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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둘러보기

by 낮달2018 2021.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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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본향, 안동에 ‘독립운동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세워졌다.

안동시의 시정 구호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인 것처럼 일제하 독립투쟁과 관련해 안동은 자신을 ‘독립운동의 성지’, ‘독립운동의 본향(本鄕)’이라고 매긴다. ‘성지’나 ‘본향’이란 표현은 그것을 떠받치는 만만찮은 역사와 인물을 갖지 않고는 쉽사리 하기 어려운 자부고 긍지다.

 

안동은 항일 의병의 효시랄 수 있는 갑오의병(1894)의 발상지요, 1905년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10명을 낳은 고장이다. (전국 66 명) 안동은 갑오 이후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 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51년 동안 쉼 없는 독립투쟁을 전개하여 단일 시군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 유공 포상자(310여 명, 포상받지 못한 이를 포함하면 1천여 명)를 배출했다.

 

안동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민족시인 이육사를 낳았을 뿐 아니라 6·10만세 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등 일제하 사회주의 투쟁의 주요 인물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항일 운동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국가보훈처와 안동시의 지원으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총사업비 93억여 원을 들여 부지 25,424㎡에 연건평 2,842㎡ 지하·지상 1층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전국 지방자치 단체로는 독립운동 기념관이 건립된 것은 처음이다.

 

기념관은 임하면 천전리(내앞 마을) 옛 천전초등학교 자리에 세워졌는데, 이곳은 1907년 영남 지역 최초의 근대학교인 협동학교가 세워지면서 애국 계몽 운동이 전개된 곳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대거 만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벌였는데,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은 이 마을 출신의 대표적 독립지사이다.

 

오전에, 어제 문을 연 기념관을 들렀다. 기념관은 올 연말까지 무료로 개방한다. 기념관은 전시실 3곳, 수장고와 자료실 등 전시 기능과 함께 객실·강당·식당과 같은 연수 교육 시설을 갖추고 있다. 제1전시실은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국내 활동상, 제2전시실은 만주로 망명한 애국지사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전시돼 있다. 영상관인 제3전시실은 안동의 독립운동가 700인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운영된다.

 

전시된 유물로 을미의병 당시 지휘부 편제 및 명단인 ‘안동의소파록(安東義疏爬錄)’을 비롯해 협동학교 설립의 주역 동산 류인식이 쓴 우리 역사 <대동사(大東史)>,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임명장, 안동 조선물산장려회 취지서 등 80여 점. 특히 1926년 6·10만세 운동을 주도한 권오설이 소장하고 있던 ‘신간회 국내외 정세보고서’는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과 관련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유물 중심의 박물관이 아니라 주로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전개,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소개가 중심이다. 공을 들인 흔적은 역력하고 곳곳에 동영상이 펼쳐지는 등의 시청각적 전시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나는 요즘 내앞 마을과 관련한 <항일의 땅과 인물>이라는 기사를 쓰고 있다. 이 조그마한 마을을 비롯한 내앞 문중(의성 김씨)에서 무려 36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았는데, 그것은 단순히 통계적 수치의 문제는 아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벌인 독립투쟁, 그 풍찬노숙의 여정을 짚으면서 나는 ‘독립투쟁’이란, 박제된 기록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새롭게 성찰하는 살아 있는 역사라는 것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모처럼 하늘이 맑았다. 내앞 가는 길의 육사로에서.
▲ 전시실 입구
▲ 이준태(1892~?)
▲ 권오설. 고려공산청년회 제2대 책임비서 역임.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 신간회 안동지회의 기념사진
▲ 감방 체험 시설
▲ 고문체험 시설
▲ 위에서부터 차례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전체적으로 가장 조악한 형식으로 만들어진 전시물이다.
▲ 영상관의 상영물을 찍었다. 좌우에 각각 이육사와 이상룡 선생.
▲ 기념관 앞 광장

 

2007. 8.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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