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탑 이야기 ④] 예천지역의 석탑 기행
[안동의 탑 이야기 ①]저 혼자 서 있는 탑들
[안동의 탑 이야기 ②]소멸의 시간을 건넌 돌탑들
[안동의 탑 이야기 ③]‘국보 맞아?’ 잊히고 있는 우리 돌탑들
주변에 아주 바지런한 후배 교사가 있다. 수학을 가르치는 이 김 선생은 인터넷 아이디를 전공과는 한참 거리가 먼 ‘탑도리’로 쓴다. 짐작했겠지만 그는 탑에 관한 공부가 깊어 그 내공이 이미 수준급이다.
내가 탑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은 유홍준의 ‘답사기’를 읽고, 해 질 녘의 ‘감은사탑’을 마음속에 담아 두면서부터지만, 탑에 대해 두어 마디라도 지껄일 수 있게 된 것은 두어 번 그와 함께한 ‘탑 기행’ 덕분이다.
그는 탑의 구조에서부터 역사, 시대별 양식과 특징 등을 뚜르르 꿰는 사람이지만, 나는 여전히 탑을 ‘멋있는 탑’이나 ‘마음에 드는 탑’ 정도로 가려서 바라보는 ‘초짜’이고, 다만 탑이 침묵으로 증언하는 오래된 시간과 역사를 느꺼워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애당초 내게 탑에 관한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땅의 풍경과 숨결을 더듬어보다 얻은 가외의 소득에 가깝다. 안동과 인근 지역을 돌다가 나는 버려진 유적처럼 서 있는 아름다운 탑 여러 기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탑들이 감내한 숱한 세월과 그 시간의 지층 속에 서려 있는 서원
바람처럼 스쳐가는 풍경일지라도 사진에 담기면 그것이 전해주는 사연은 새록새록 깊어지기도 한다. 그렇듯 우연히 만난 탑들을 이미지로 갈무리하게 되면서 나는 그 탑들이 감내한 숱한 세월과 그 시간의 지층 속에 여전히 서려 있는 서원(誓願)을 하나씩 이해하게 되었던 듯하다.
무심한 이에겐 한 무더기의 돌 구조물에 지나지 않을 터이지만, 탑이 전하는 사연은 부처의 나라를 꿈꾸는 서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시대의 흥망성쇠뿐만 아니라, 그 시대가 담고 있던 정신의 지향과 민심의 흐름 따위를 알려주기도 한다. 탑의 양식적 특징을 통해서 한 시대의 미적 규범이나 그것을 규정짓는 변수 따위를 짐작할 수도 있음도 물론이다.
고려의 건국은 석탑의 발전과정에서 일정한 전환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신라 시대의 탑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는데도 주로 왕도 경주 인근에 밀집해 있었던 데 반해, 고려에 들어와서는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한 것이다. 이는 절정에 이른 불교의 교세, 태조의 훈요십조에도 반영된 도참사상의 영향, 국가적인 조영(造營)에 의해 탑이 세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왕도 중심으로 일률적으로 탑을 지었던 데 비해 고려에서는 각 지방 토착세력이 건탑(建塔)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조탑(造塔) 활동에 순수한 지방 세력과 민중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은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조성형지기(造成形止記)와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의 명문 등으로 증명된다. 탑이 국가나 왕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지방민의 발원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고려시대의 탑에서 과거의 일률적 규범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식적 특징을 드러내는 실마리가 되었다. 지방적 특색을 별로 찾아볼 수 없었던 전 시대와는 달리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지방별로 특징적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경북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의 개심사지(開心寺址) 오층석탑(보물 제53호)은 바로 그러한 조형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고려 석탑이다. 이 탑에 드러난 변화는 물론 전체적인 변형이 아니라, 기단에 그 윗면의 몸돌을 받치기 위한 연꽃무늬의 괴임 돌을 놓아 마치 공예탑과 같은 인상을 주는 정도의 부분적인 변화다.
개심사는 신라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 역사나 폐사연대는 전하지 않는 절인데, 탑 주변에 절터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010년(현종 원년)에 세워진 이 탑은 예천읍의 동쪽을 흐르는 한천 건너편 논 가운데 서 있다. 높이 433㎝. 기단 폭 215㎝. 그 규모가 작은 편이 아닌데도 전체적으로 주는 인상은 ‘아담하다’.
고운 흙모래처럼 차분한 빛깔 띠고 있어 주변 풍경에 살갑게 녹아들고…
해거름 무렵의 예천 삼거리는 한산하다. 예천은 면적 661㎢, 인구 5만여 명(2004), 동쪽은 안동시·영주시, 남쪽은 의성군·상주시, 서쪽은 문경시와 접하고 북쪽은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계를 이룬 1읍 11면의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동북쪽은 소백산맥의 산악지대, 서남쪽에는 낙동강과 내성천 변에 일부 평야를 끼고 있다.
‘수주촌(水酒村)’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 예천이,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다. 고려 태조 때 보주(甫州)와 양양(襄陽)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조 태종 때에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다. 예천에는 고려 태조와 관련된 전설이 전하는데, 후삼국통일 과정에서 여러 차례 왕건과 인연을 맺은 안동 지역과 견주어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태조가 삼한 통합의 큰 뜻을 품고 당대의 고승 두운대사를 방문하고자 예천에 왔을 때, 쌍룡이 나타나 절로 가는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명명된 용문산, 용문사(龍門寺)가 이 지역에 있다. 왕건이 세운 고려왕조가 각 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호족세력과의 연립 정권이었다는 사실과 그것은 어떤 인과 관계를 맺은 것일까.
지방 호족들과 독실한 불자들의 조직인 향도 1만 명이 발원해 세운 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거기 고인 세월과 역사의 부침을 헤아려 본다. 석탑기의 명문에 이르기를 탑은 “사방으로 널리 몸과 마음을 위하여(四弘爲身心), 위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上報之佛恩), 국가를 위하고 공덕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爲國正功德), 일체의 만물에 퍼지게 하기 위하여(普及於一切)” 세운다고 했으니 6년이 모자란 1천 년 세월에 그 발원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읍내를 가로지르는 한천 북쪽 둑 너머 석조 여래 입상(보물 427호)앞에 동본리 삼층석탑(보물 426호)이 서 있다. 탑과 불상이 남아 있으니 절터였음이 분명하지만, 도량의 흔적과 그 이름은 묘연하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몸돌이 줄어드는 비율과 지붕돌의 크기 등에 ‘짜임새가 있는 아름다운 탑’으로 평가받는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가 줄어들고 있는 점이나 각 부분의 아래에 새긴 괴임 돌이 간략해진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건립된 탑으로 문경시 가은읍에 있는 봉암사의 석탑들과 비슷한 형식이라 한다. 개심사지의 오층탑에 비하면 나이를 좀 더 먹은 셈인데 그래서인가, 이 화강암 탑은 매끈하기보다는 좀 거칠고 질박한 느낌이다.
한미 FTA 반대 현수막에 서린 농심은 지치고 고단하다
무엇보다 탑 오른쪽을 막아선 한천의 둑길과 보호구역을 삥 둘러싼 철책 때문에 탑은 옹색하고 답답해 보인다. 탑 뒤편은 비닐하우스, 왼편은 주택가가 이어지고 있다. 예천에 사는 이들에 따르면 예천은 통일신라 때부터 절집이 지천으로 세워져 있었다 한다. 얼마만큼 근거 있는 얘기인지는 확인할 길 없으나, 이 땅 어디인들 불국토를 꿈꾸지 않은 고을이 어디 있으랴.
다시 삼거리로 나와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린 개심사지 오층탑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동본리와 지척에 새로이 오층탑을 쌓으며 이 땅의 1만여 불자들이 그린 ‘부처님의 나라’는 여전히 멀다.
시가지 곳곳에 내걸린 한미 FTA 반대 현수막에 서린 농심은 지치고 고단하다. 볼품없이 세워진 인근의 낮은 빌딩과 음식점 따위에 둘러싸였지만, 돌탑은 외롭고 고적했다. 마지막 석양을 온몸으로 비켜 받으며 돌탑은 바야흐로 그가 건너온 천년의 세월 속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2007. 3. 29.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안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 사라졌다고? (0) | 2019.10.03 |
---|---|
허물어진 절터에 마주 선 돌탑과 서당 (0) | 2019.10.02 |
‘국보 맞아?’ 잊히고 있는 우리 돌탑들 (0) | 2019.09.30 |
소멸의 시간을 건넌 돌탑들 (0) | 2019.09.30 |
군자정은 ‘그의 삶’과 함께 기억된다 (0) | 2019.09.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