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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군자정은 ‘그의 삶’과 함께 기억된다

by 낮달2018 2019.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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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정자 기행 ②]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 군자정

▲ 군자정은 평면이 정(丁) 자 형인 누(樓) 집으로 된 조선 중기의 별당형 정자다. 보물 제182호.

군자정(君子亭)은 임청각(臨淸閣)의 정침(正寢, 거처하는 곳이 아니라 주로 일을 보는 곳, 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이다. 임청각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로 국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규모가 큰 살림집이다.

 

군자정을 세운 이는 석주의 17대조인 이명(李洺)이다. 그러나 안동에서 임청각은 석주의 생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에서 석주의 무게가 그만큼 큰 탓이다. 이 고택에서 석주를 비롯해 무려 아홉 분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난 것이다. [관련 기사 : “공맹은 나라 되찾은 뒤 읽어도 늦지 않다”]

▲ 임청각 전경. ⓒ 임청각 누리집

임청각은 안동시 법흥동에 있다. 원래는 모두 99칸 집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집 앞으로 중앙선 철길이 나면서 50여 칸만 남았다. ‘임청각’이란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등동고이서소 登東皐以舒嘯)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임청류이부시 臨淸流而賦詩)

▲ 군자정. 2004년 봄.
▲ 뒤편 언덕에서 본 군자정. 왼쪽에 물 마른 연못이 보인다.

군자정은 1515년(중종 10)에 형조좌랑 이명(李洺)이 건립한 평면이 ‘정(丁)’자 형인 누(樓) 집으로 된 조선 중기의 별당형 정자다. 보물 제182호. 안동지역에선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임진왜란을 겪어 낸 목조건물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의 이 정자는 제청(祭廳)으로 쓰이는 남향의 대청이 중심이다. 그 서쪽에 이어서 지은 ‘T’자형의 온돌방이 있다. 그래서인가, 처마도 대청 쪽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인데, 서편 방 쪽은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다. 둘레에는 툇마루를 돌려서 계자난간을 세웠는데, 출입은 앞쪽과 서쪽에 낸 돌층계로 한다.

▲ 석주 이상룡(1858~1932)

석주 관련 기사를 쓰느라고 여러 번에 걸쳐 임청각에 들렀었다. 임청각에 들를 때면 당연히 옆에 있는 국보 제16호 신세동 칠층 전탑을 지나기 마련이다. 반대로 탑을 보러 올 때도 역시 임청각에 들러 보곤 했다.

 

석주 기사를 쓰면서 후손들과 통화해 도움을 받았다. 석주의 증손인 항증 씨는 기사가 나간 뒤에 고맙다면서 임청각에 들러 책 한 권을 가져가 보라고 했다. 임청각에 들른다고 하면서도 차일피일하다 그게 1년이 훌쩍 넘었다. 오늘 임청각에 들러 관리인에게 그 얘길 하니 아, 하더니 책을 한 권 내어 준다.

 

책은 석주의 손부, 그러니까 손자인 이병화(1906~1952)의 처 허은(1907~1997) 여사의 회고록이다. 허 여사가 구술하고 그의 사촌 올케가 기록한 이 책의 제목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다. 허은 여사는 구미의 임은 허씨 집안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처음 교수형으로 처형된 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이 재종조부다.

 

▲ 허은 여사의 회고록

무려 아홉 분이 건국훈장을 받은 이 독립운동가 집안에 허 여사가 시집온 것은 열여섯 살,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이가 겪은 세월은 달리 이 땅의 현대사의 한 부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그이가 구술한 이야기는 크게 셋, 출가 이전의 허씨 일가의 의병 활동, 고성이씨 집안으로 출가한 후 집안의 항일투쟁사, 서간도 땅에서의 이민 개척사가 그것이다. 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며느리가 맨몸으로 겪은 역사의 물결은 어땠을까.

 

서쪽 계단을 올라 대청에 들었다. 빛이 들지 않아 어둑한데 벽을 더듬어 불을 켠다. 대청 바닥은 우물마루다. 서쪽 벽에 ‘임청각’ 현판이 걸렸는데 이는 퇴계의 친필이라 한다. 현판 아래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액자에 모셔져 있다. 그렇다. 임청각을, 그리고 군자정을 석주 일가의 고통스러운 독립투쟁의 역사와 떼어 이야기할 수 없다.

 

임청각은 지금 고택체험으로 군자정을 개방하고 있다. 일반 숙박업소에 비기면 결코 편하지 않은 이 고택을 숙소로 선택하는 이들은 이 불편한 잠자리에서 무엇을 느끼고 갈까. 한갓진 조선조 양반집에서의 하룻밤으로 이날을 기억할까, 아니면 독립운동가들의 풍찬노숙을 떠올릴까.

 

사진 몇 장을 찍고 밖으로 나오자, 관리인 아주머니가 군자정의 계자난간에다 네모나게 썰어 실에 꿴 무를 주렁주렁 걸치고 있다. 무말랭이 김치, 안동말로 하면 ‘골짠지’를 담기 위한 준비다. 겨울이 오고 있다.

 

▲ 임청각과 군자정 현판

군자정은 마루 밑이 사방으로 터진 누마루 식이다. 군자정은 아주 단아하면서 시원한 건물이다. 단아함은 그리 크지 않은 팔작집의 기본이다. 군자정은 거기다 기단과 누마루로 성큼 높이 올라앉았으니 자연 호쾌함을 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군자정 바로 옆에는 물이 말라버린 네모난 연못이 있고, 그 위쪽 언덕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사당에는 원래 불천위(不遷位)와 함께 4대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석주가 간도로 망명하면서 신주를 땅에 묻고 길을 떠난 까닭에 현재 봉안된 신위가 없다.

 

석주는 “공자·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서간도 망명을 감행했다. 사당에 나아가 망명의 사유를 아뢴 석주는 친척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신주를 땅에 묻고 길을 떠났고, 끝내 한 줌 유골로 돌아왔다.

▲ 군자정은 사방이 터진 누마루 형식의 정자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군자정. 오른편 난간에 걸린 게 무말랭이다.
▲ 대문간에서 바라본 군자정. 외등에 걸린 빨랫줄이 눈에 거슬린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에 계단식 기단을 쌓아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의 건물을 배치하여 채광 효과를 높인 집이다. 또 각 건물 사이에는 크고 작은 다섯 개의 마당을 두어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다. 정면에서 보면 임청각의 전체 모습은 ‘용(用)’자를 눕힌 형태라고 한다. 높이가 다른 세 기단 위에 건물을 가로로 배치한 다음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세로로 건물을 연결한 까닭이다.

 

군자정에서 중문을 지나면 바로 사랑채고 그 옆은 안채다. 안채의 마당에 잠깐 서 있는데 뭐랄까, 말할 수 없이 편안한 느낌이다. 안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안정감이 마당에 서려 있다. 그건 이 집이 겪고 넘겨온 기나긴 세월의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관리인과 하직하고 임청각을 빠져나온다. 대문 앞에 바투 들어선 중앙선 철길이 집의 조망을 완벽하게 막고 있다. 대를 이어 독립지사를 배출한 이 명가의 내력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가 저지른 졸렬한 짓거리의 결과다. 세계적 경제 대국으로 발전했지만, 아시아에서조차 ‘큰 나라’ 대접을 못 받는 일본 국격(國格)의 내력이 여기 있는 셈이다.

 

임청각 대문 앞에 서면 저만큼 앞에 신세동 칠층 전탑이 외롭게 서 있다. 국보 제16호. 천년의 세월을 지켜낸 이 벽돌탑은 오백 년 고택과 함께 발치를 오가는 철마의 쇳소리를 들으며 시방도 이 땅의 고단한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 신세동 칠층 전탑과 고성이씨 탑동 종택. 오른편은 중앙선 철길이다.
▲ 임청각 앞 안동호 변 도로에서 바라본 풍경. 단풍이 한창이다.

 

 

2008. 11.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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