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를 찾아서] ③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초간정(草澗亭)
돌아보면 쌔고 쌘 게 ‘정자’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 풍경을 담아내고, 거기 깃든 역사와 삶을 맞춤한 이야기로 풀어내려고 하면 정자를 찾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글 한 편을 마무리할 때마다 다음 목적지를 가늠하며 궁싯거리는 까닭이 여기 있다.
안동과 봉화를 거친 발길은 이번에는 예천으로 향한다. 예천군 용문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지은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세운 초간정이 있는 것이다. 용문사 가는 길에 보일 듯 말 듯 서 있는 그 오래된 정자는 내게 예천에서 산 몇 년간의 시간을 환기해 준다.
1994년도부터 나는 예천역 부근의 철길 옆 한 낡은 국민주택에서 3년 반을 살았다. 다섯 해 만에 복직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으로 읍 외곽의 두 군데 학교를 거치며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거기서 나는 마흔이 되었고, 딸애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예천에 살면서 예천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예천을 떠나서 간신히 예천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읍내에 살면서도 곁눈질만 하다가 남본리의 개심사지 오층석탑(보물 제53호)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 답사기를 쓴 것도 정작 예천을 떠나서였다.
예천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써 온 이름이니 꽤 오래된 지명이다. 사전에서는 예천(醴泉)을 ‘중국에서 태평할 때에 단물이 솟는다고 하는 샘’으로 풀이한다. <장자>에 따르면 예천의 물을 마시는 새가 곧 봉황이다. 예천의 물은 달다. 그래서인가, 예천의 면 가운데에는 ‘감천(甘泉)’이라는 이름도 있다. 관내엔 봉황이 울었다는 신라 고찰 ‘명봉사(鳴鳳寺)’도 있으니 예천은 봉황과의 인연이 꽤 깊어 보인다.
예천과 인연이라면 ‘용’도 빠질 수 없다. 예천군에는 물돌이동 회룡포가 있는 ‘용궁(龍宮)’이 있는가 하면 ‘용문(龍門)’도 있다. 용문에는 고려 태조가 삼한 통합의 큰 뜻을 품고 당대의 고승 두운(杜雲) 대사를 방문하고자 예천에 왔을 때, 쌍룡이 나타나 절로 가는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명명된 용문산, 용문사가 있다.
‘풀[초(草)]’과 ‘물[간(澗)]’의 전통 원림 초간정
예천읍에서 용문으로 가는 길은 외지 사람들이 찾기에는 좀 묘하게 나 있다. 그 길은 읍 외곽으로 빠지는 주도로가 아니라 예천여고 옆의 좁다란 골목길로 빠져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좁고, 구불구불하지만, 가을이면 벚나무 단풍이 아름다운 길이다. 그 길을 10여 분만 달리면 용문사 못미처 초간정에 이른다.
내가 마지막으로 초간정에 들른 것은 2005년 가을이다. 그때 초간정에 이른 가을은 유난히 짙고 강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6년 만에 다시 찾은 5월은 초간정은 초록빛이었다. 언덕길을 내려가자 비스듬히 누운 소나무 저편의 냇가 암반 위에 선 낯익은 정자의 단아한 모습이 나타났다.
내를 건너면 모습을 드러내는 초간정은 종택 별채와 처마를 맞대고 있다. 종택의 살림집은 정자와는 엄격히 구분된 생활공간이어서 초간정은 별도의 문을 통해 출입하게 되어 있다. 주변의 노송과 참나무·느티나무·팽나무 등의 오래된 나무가 어우러지는 풍경 가운데 초간정은 고즈넉하게 녹아 있었다.
초간정은 여느 정자처럼 단일한 건축구조물이 아닌 전통 원림(園林)이다. ‘원림’이란 ‘동산과 숲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것’(유홍준)으로 ‘인위적 조경’ 일색의 일본식 ‘정원’과는 다른 공간이다. 그러니까 초간정은 이 원림을 가리키는 동시에 예천 권씨 종택 별채에 포함된 정자를 이르는 이름인 것이다.
권문해(1534~1591)는 조선 중기 명종, 선조 연간의 문신이다. 본관은 예천, 호는 초간(草澗)이다. 초간은 ‘풀[초(草)]과 산골의 물[간(澗)]’이란 뜻이다. 그는 일찍이 퇴계 문하에서 수학해 류성룡, 김성일과 교유했으며 선조 때 별시 문과로 등과, 대구 부사 등 내 외직을 거쳐 좌부승지를 지냈다.
1579년 죽림리로 낙향한 권문해는 3년 후 금곡천 냇가에 정자를 세운다. 그는 계곡물의 흐름도 나무도 손대지 않고 세운 정자에다 자신의 호를 붙였다. 초간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 2년(1642)에 재건했고 병자호란(1636) 때 무너진 것을 다시 세웠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지정돼 있다.
초간정은 원래 정자에 붙은 현판대로 ‘초간정사(精舍)’, 학문에 정진하는 집이었다. 풍류를 위한 정자였다기보다는 강학과 집필을 위한 공간이었다는 말이다. 현판은 당시에 대사간을 지낸 박승임(1517~1586)이 썼다.
초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누마루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고 분합문을 달아 3면이 밖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 5월의 한낮, 무성한 녹음 속에 정자는 말끔하면서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자를 볼 때마다 우리 고건축의 아름다움은 ‘단아함’으로 뭉뚱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초간정도 예외는 아니다.
대문을 밀고 마당에 들어서자 텅 빈 마당에 고인 적요가 일렁이는 듯했다. 초간정은 왼쪽 2칸에 온돌방을 들였고 오른쪽 1칸에 누마루를 깔았다.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 뒤편 난간 앞에 서자 아래로 흐르는 계류와 바윗돌이 한눈에 들어왔다. 물은 정자 바로 밑에서 소를 이루었다가 정자를 감돌면서 방향을 바꾸어 죽림리 쪽으로 흘러간다.
우리가 초간정을 기억하는 것은 오래된 정자와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 때문이지 그것을 세운 지역의 권문세가를 기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초간 권문해가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은 따로 기억할 만하다.
10년 만에 완성한 백과 전서 <대동운부군옥>
권문해는 여기서 <대동운부군옥>을 썼고 10년 만(1589)에 이를 완성했다. 초간정은 <대동운부군옥>뿐 아니라 초간의 아들 권별이 부친에 이어 최초의 인명사전이라 할 수 있는 <해동잡록(海東雜錄)> 14권 14책을 쓴 곳이니 기념비적 저술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초간은 우리 역사에 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는 아우에게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문헌이 없다. 그래서 선비들이 중국 역사에 대해선 마치 어제의 일같이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수천 년간의 역사를 모르기를 문자가 없던 옛날의 일처럼 아득하게 여긴다. 이는 눈앞의 물건도 보지 못하면서 천 리 밖의 것을 주시하려는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려는 뜻을 가졌다.
대동운부군옥은 초간의 이 같은 역사적 천착의 결과물이다. 그는 삼국사기와 계원필경 등 한국 서적 174종과 사기와 한서 등 중국 서적 15종을 참고, 중국의 음시부(陰時夫)가 지은 <운부군옥>의 체제를 빌려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20권 20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대동(大東)’은 우리나라를, ‘운부군옥’은 한문의 운(韻)별로 분류한 사전이라는 뜻이다. 1589년에 완성한 이 책은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문학, 철학, 예술, 풍속, 인물, 성씨, 산, 나무, 꽃, 동물 등이 망라돼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된다. 이 책의 책판(冊版)은 보물 제878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동운부군옥은 실전(失傳)된 한국 최초의 설화집 ‘수이전(殊異傳)’에 실렸던 이야기 몇 편도 전하고 있다. 선덕여왕을 사랑한 젊은이 지귀(志鬼)의 사랑과 화신(火神)의 내력을 담은 이야기 ‘심화요탑(心火繞塔)’이 그것이다.
초간은 ‘대동운부군옥’과 함께 ‘초간일기’ 등 일기 3책(보물 제879호)도 남겼다. 그는 개인의 기록도 역사의 자료가 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 일기들은 1580년부터 1591년까지의 임란 전 사대부가의 일상생활과 중앙·지방의 관가 상황 등을 담고 있어 당시의 정치, 국방, 사회, 교육, 문화 등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정자 아래 암반 사이로 흐르는 물은 며칠 전 내린 비로 흐리고 탁하다. 아직 수량도 많지 않다. 그러나 시냇가의 괴석이 만만찮고 건너편 초간 신도비 주변의 잔뜩 휘어진 소나무와 숲의 녹음이 시원하다. 우리 선인들이 숲에 이는 바람 소리, 물에 비친 달,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를 통해 삶과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데 과부족이 없는 풍경이다.
정자를 포함한 원림에는 우리 선인들의 자연관이 매우 잘 드러난다. 그들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물아일체, 즉 자연과의 동화를 관계의 최고 형태로 이해했다. 따라서 물과 바위,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시내마다 다소곳이 그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정자가 들어앉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초간정 원림의 경관은 정자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조망과 함께 외부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조망으로 완성된다. 정자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조망은 창틀을 통해 이루어져 제한적이지만 응축되고 선명하다. 반면에 외부에서 정자를 바라보면 원경으로는 울창한 송림 사이로 초간정의 지붕과 하늘을, 근경으로는 시냇물과 바위, 그리고 정자를 완상할 수 있으니 매우 포괄적인 조망이 이루어진다.
초간정 앞 언덕은 잘 가꾸어진 송림이다. 구부정하게 서 있는 노송의 모습은 주변 풍광과 잘 어우러진다. 2008년 12월에 초간정 원림은 국가 명승지 5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는 이곳 경관이 나라의 인정을 받은 결과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군데군데 앉혀 놓은 나무 벤치가 오히려 쓸쓸하다.
솔숲에 서자 초간정 원림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느티나무 고목에 둘러싸인 종택의 살림집과 초간정은 무척 안온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암반 위의 초간정이 다소 위압적으로 보이는데 비기면 뜻밖의 풍경이다. 먼저 간 아내에게 바친 제문에 드러난 초간의 사무친 그리움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은 그래서다.
“…… 나무와 돌은 풍우(風雨)에도 오래 남고 가죽나무, 상수리나무 예대로 아직 살아 저토록 무상한데 그대는 홀로 어느 곳으로 간단 말인가. 서러운 상복을 입고 그대 영제 지키고 서 있으니 둘레가 이다지도 적막하여 마음 둘 곳이 없소.
…… 오오, 서럽고 슬프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우주에 밤과 낮이 있음 같고 사물이 비롯함과 마침이 있음과 다를 바 없는데, 이제 그대는 상여에 실려 저승으로 떠나니 그림자도 없는 저승, 나는 남아 어찌 살리. 상엿소리 한 가락에 구곡 간장 미어져서 길이 슬퍼할 말마저 잊었다오."
남녀의 법도와 범절이 엄연히 달랐던 시대다. 그 시절에 반가의 사대부가 어찌 이런 애절함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10년에 걸쳐 백과 전서를 저술했던 학자였으되 스스로 지아비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한 사나이의 순애보를 떠올리며 나는 초간의 원림을 떠났다.
병암정과 권원하 의사, 혹은 역사와 삶
병암정(屛巖亭, 경북 문화재자료 제453호)은 초간정에서 나와 예천읍으로 가는 길목 성현리에 있다. 경치로 말하면 이 정자도 만만찮다. 하긴 KBS 드라마 <황진이>를 촬영한 곳이니 오죽하겠는가. 병암정은 1898년에 금당실에 살던 법부대신 이유인(李裕寅)이 천변의 암벽에 세운 정자다. 처음엔 ‘옥소정(玉蕭亭)’이었는데 예천 권씨 문중에서 매입하여 병암정으로 바꾸었다.
예천 권씨 문중에서는 병암정을 조선 전기의 학자 권오복(1467~1498)의 학덕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정자 오른쪽의 별묘(別廟)는 원래 인산서원(仁山書院)의 사당이었으나 서원이 훼철되면서 사당만 이곳으로 옮겨 권맹손, 권오기, 권오복, 권용을 모시고 있다.
정자는 정면 4칸 반, 측면 1칸 반 규모의 일자형 겹처마 팔작집이다. 정자로서는 작지 않은 규모인 데다가 높다란 암벽 위에 덩그러니 올라앉아 있어 다소 위압적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담장 때문에 추녀 아래 정자의 현판이 겨우 보이는 정도다. 담장 밑 암벽에는 ‘屛巖亭(병암정)’ 석 자가 새겨져 있다.
정자 아래 연못은 꽤 큰 연못이다. 암벽 위의 정자, 연못, 연못 안의 작은 산, 갈대 등과 어우러진 병암정의 풍경은 빼어나다. 뭇 시인 묵객들의 시심을 흔들 만한 풍경인 것이다. 그러나 한말에 지어진 정자라 이 정자는 시인 묵객보다는 예천이 낳은 독립운동가 중산(重山) 권원하(權元河, 1898~1936) 선생과의 연이 깊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제4기생으로 졸업한 뒤 군정서의 밀명을 띠고 입국하여 군자금 조달 및 무관생도 모집 등 활동을 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예천에서 신문 지국을 운영하면서 은밀히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7년에는 예천군 내 청년대회를 개최하고 신간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하는 등 구국운동을 폈다.
선생이 낙향해 기거한 곳이 이곳 병암정이다. 그는 용문으로 그를 찾아오기도 한 민세 안재홍(1891~1965),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 등과 교우하였다. 신간회, 교직원 사건, 소작인 사건, 민중 소요 사건, 대동 국권 회복단 사건 등 수많은 항일사건에 앞섰던 선생의 삶은 옥살이, 예비검속, 출옥과 투옥으로 점철되었다.
선생은 일경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뒤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가 1936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서른아홉. 조국 해방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그로부터 9년이 모자랐다. 1977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2011. 7. 14.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안동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자정은 ‘그의 삶’과 함께 기억된다 (0) | 2019.09.28 |
---|---|
그 정자에 ‘안빈낙도(安貧樂道)’가 보인다 (0) | 2019.09.28 |
‘푸른 바위 정자’에서 산수유 벙그는 봄을 만나다 (0) | 2019.09.26 |
고산정, 푸른 절벽을 끼고 깊은 못을 굽어보다 (0) | 2019.09.25 |
고별(告別)의 말씀 – 안동을 떠나면서 (0) | 2019.09.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