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푸른 바위 정자’에서 산수유 벙그는 봄을 만나다

by 낮달2018 2019. 9. 26.
728x90

[정자를 찾아서]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청암정(靑巖亭)’

▲ 봉화 청암정. 조선조 중기의 문신 충재 권벌이 봉화 닭실(유곡리)의 연못 속 거북바위 위에다 세운 정자다.

올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연일 계속되는 영하의 날씨, 내복은 물론이거니와 양말도 두 켤레나 껴 신고 나는 지난 1월을 넘겼다. 해마다 겪는 겨울이건만 여전히 멀기만 한 봄을 아련하게 기다린 것은 처음이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한 셸리(P. B. Shelly)의 시구가 싸아하게 다가왔다.

 

‘마음의 여정’, 혹은 ‘기억의 복기’

 

청암정을 찾아 봉화로 가는 길은 ‘마음의 여정’이다. 새로 길을 떠나는 대신 나는 컴퓨터에 갈무리된 2010년의 봄을 불러냈다. 거기, 지난해 3월에 아내와 함께 서둘러 다녀온 닭실마을이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산수유 꽃눈에 내리던 이른 봄의 햇살과 석천계곡에 피어나던 버들개지……. 나는 그저 사진을 통해 한 해 전의 시간을 복기(復碁)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청암정(靑巖亭)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 권벌이 중종 연간에 지은 정자다. 이 정자는 닭실마을로 잘 알려진 봉화읍 유곡리에 있다. ‘닭실’이란 이 마을이 풍수설에서 ‘금닭이 학의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형’ 지세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한자로는 직역하여 ‘유곡(酉谷)’으로 썼다. 안동의 ‘무실’을 ‘수곡(水谷)’이라 쓰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 지난해 봄, 충재 고택의 사랑채 앞에 목련 봉오리가 막 벙글기 시작하고 있었다.

닭실마을은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문수산을 등지고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지막한 뒷산과 시원하게 펼쳐진 앞들 때문일까, 바깥에서 바라보는 마을은 넉넉해 뵌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 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삼남의 4대 길지(吉地)’로 꼽았다니 문외한은 그저 그런가 보다,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닭실, 삼남의 4대 길지

 

마을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널찍한 시멘트 포장길로 마을에 들어가니 이내 안동 권씨 충재 고택에 닿는다. 이 고택은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마흔두 살 때 낙향하여 지은 집이다. 널찍한 마당과 청암정이 서 있는 후원의 규모는 이 마을에 세거해 온 명문가의 위세를 짐작하게 한다.

▲ 충재 고택 마당에 선 산수유 봉오리가 막 벌어지려 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널따란 마당 정면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을 사이에 두고 양쪽의 크고 작은 사랑채가 손을 맞는다. 대개 여염집이 그러하듯 아주 검박해 뵈는 단아한 건물이다. 왼편 큰 사랑채 앞과 옆에 선 목련과 산수유 봉오리가 막 벙글기 시작하고 있었다. 상기도 매운바람 속에 피어나고 있는 꽃봉오리가 오래 눈길을 붙잡았던 것을 뚜렷이 기억한다.

 

권벌은 서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간 이래 밀양 부사, 형조참판,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기도 했고, 일흔에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거기서 죽었다. 선조 초에 신원 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봉화의 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충재집>이 있다.

 

충재는 평생토록 <근사록(近思錄)>을 소맷자락에 넣고 다녔다 한다. <근사록>은 성리학의 중요한 내용만을 골라서 묶은, <소학>과 더불어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중요시했던 수신 지침서다. 경회루를 돌던 중종이 바닥에 떨어진 <근사록>을 보고 ‘권벌의 책일 것’이라며 그에게 책을 돌려보냈다는 얘기는 충재가 <근사록>을 얼마나 가까이했는지를 말해주는 일화다.

 

출사 이래 충재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봉직하였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을사사화 때 병조판서였던 충재는 중신 회의에서 신변의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중신과는 다른 견해를 서슴없이 개진했고, 결국 이로 말미암아 파직되었다. 실록에 실린 사신(史臣)의 논평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감히 구제하지 못했는데, 권벌만은 이에 맞서 그들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음이 명백하다는 것을 힘껏 논계(論啟)하였다. 충성스러운 걱정이 말에 나타나고 의기가 얼굴색에 드러나 비록 간신들이 죽 늘어서서 으르렁거리며 눈을 흘기는데도 전혀 되돌아보지 않고 늠름한 기상이 추상같았으니, 절의를 굳게 지키는 대장부라 일컬을 만했다.”

▲ 청암정은 가내정자로 산간정자에 못지않은 풍광을 자랑한다.
▲ 청암정의 후면. 정자 주변은 향나무와 단풍나무 등을 둘러 공간적 독립을 꾀했다.

벼슬길에서 물러나 닭실에 내려와 있던 충재는 마흔아홉 살 때 집 서쪽에 서재를 짓고 ‘충재’라는 편액을 걸었다. 서재 서쪽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는 정자를 짓고 ‘구암정(龜岩亭)’이라 이름 붙였다. 뒤에 이 정자가 이름을 바꾸니 곧 ‘청암정’이다. 물 위에 거북이 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이다. 초가가 딸려 있는데, 정자 안에는 ‘靑巖水石(청암수석)’이라 새긴 허목(1595~1682)의 전서 편액이 걸려 있다.

 

거북바위 위의 정자

 

처음 지을 때는 정자 안방은 온돌이었고 둘레에 연못도 없었다. 온돌방에 불을 넣자 바위가 소리 내어 울었다. 한 스님이 이르기를 ‘이 바위는 거북이라서 방에다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에 아궁이를 막고 바위 주변을 파내어 못을 만들고 온돌을 뜯어낸 자리에 마루를 깔았다고 한다.

 

청암정은 여느 정자와는 다른 개성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다.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점도 그렇거니와 위치에 따라 정자의 높이가 각각 다른 것도 특이하다. 이는 바위를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리느라 주춧돌과 기둥 길이로 그 수평을 조절하였기 때문이다.

 

청암정은 여섯 칸 넓이의 누대에 두 칸 넓이의 마루방을 붙인 ‘정(丁)’자 모양의 특이한 정자다. 그러다 보니 대체로 사면이 일정한 팔작지붕을 취하는 여느 정자와 달리 누대는 팔작지붕, 마루방 쪽은 맞배지붕 건물이다. 바위 위에 올린 정자가 못 미더웠을까. 누대 앞 양쪽 추녀에 활주(活柱)를 받친 점도 특이하다.

▲ 청암정 앞 충재. 쪽마루를 두른 소박한 세 칸짜리 맞배집이다.
▲ 청암정은 더러 사극의 무대로도 쓰인다. ⓒ SBS

연못 속의 정자와 충재를 잇는 것은 장대석 돌다리다. 연못 안에다 작은 교각을 세우고 거기다 긴 장대석을 얹었다. 매끈하지 않고 거친 돌의 질감이 이 정자에 서린 오백 년 세월을 물끄러미 증언한다. 유감스럽게도 연못 속에는 물이 없다. 원래 마을 앞 개울물을 끌어들였으나 연못 바닥이 주변의 논보다 높아서 물이 쉽게 빠져 버리는 까닭이다. 물이 없으니 자연히 연못은 물론이거니와 거기 엎드린 거북바위도 빛을 잃었다.

 

청암정에 오르면 돌다리 건너 충재가 한눈에 들어온다. 충재는 세 칸짜리 맞배집인데, 앞면과 왼쪽 옆면에는 조그만 쪽마루를 두른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붉은 기가 도는 회백색 나무 부재의 질감과 그 앞 돌다리의 그것이 넉넉하게 어울린다. 청암정에 군불을 땔 수 없는 겨울이면 충재는 서재에서 지냈으리라.

▲ 김영택 화백이 펜화로 그린 청암정. ⓒ 김영택
▲ 본채에서 바라본 청암정과 충재. 이 후원은 독립된 공간이다.

청암정과 충재가 있는 후원은 고택에서 별도의 공간이다. 중문을 두고 담을 둘러 공간을 구획하였다. 정자 주변은 담 대신 느티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을 심어서 공간의 독립을 꾀했다. 본채 쪽에서 바라보면 적잖은 규모의 정자가 연못 위로 솟은 모양새인데도 기와 담장 너머 후원이 호젓해 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충재 고택의 보물들

 

청암정은 이른바 가내(家內) 정자다. 그러나 연못이 물이 가득하고 거기 연꽃이 무리 지어 피면 그 풍광은 산간정자가 부럽지 않다. 청암정이 <바람의 화원>이나 <동이>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스캔들> 따위의 영화 촬영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이 정자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힘입은 것이다.

 

안채 서쪽에 각종 고서와 서첩, 서화 같은 유물 480여 점이 보관된 유물관이 있다. 집안에서는 한국전쟁 때 이 유물들을 항아리에 넣은 뒤 땅속에 묻음으로써 분실을 막았다고 한다. 유물 가운데 충재일기(261호), <근사록>(262호), 중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책(896호), 교서와 재산분재기 등의 고문서(901호), 충재와 퇴계의 서첩과 글씨(902호) 등 다섯 점이 보물이니 한 가문의 유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청암정을 떠난다. 그때만 해도 남도의 봄소식은 진작에 만개한 산수유를 전하고 있었지만 원래 봉화의 봄은 더디다. 원색의 나들이옷을 차려입은 단체 관광객들이 벌이는 소란 속, 산수유 노란 봉오리는 시나브로 반쯤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 석천계곡 기슭에 세워진 석천정사. 충재의 맏아들 동보가 세운 정자다.

닭실마을 건너편 산등성이를 끼고 흐르는 시내를 따라 산길을 돌아가면 석천계곡이다. 잘 다져진 황톳길 주변에 길을 향하여 구부정하게 자란 소나무가 인상적이었다. 바람은 쌀쌀하지만, 계곡에도 봄은 당도해 있었다. 계곡 이편 물가에 은빛 머리털의 버들개지가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물 건너 산그늘은 여전히 음습했고, 골짜기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도 차다. 우리는 내를 내려다보는 언덕바지에 차를 대고 준비해 간 점심을 먹었다. 현미밥에 김치, 연근조림, 풋고추와 된장의 소박한 밥상이었다.

 

석천계곡 기슭에 충재의 큰아들 동보가 부친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535년에 지은 석천정사(石泉精舍)가 있다. 정자라 하기에는 지나친, 모두 서른네 칸의 큼직한 건물이다. 계곡 위에 선 정사는 좀 오연(傲然)해 뵌다. 꽤 높다란 축대 위의 버티고 선 정자는 붉고 푸른 단청으로 자못 화려함을 뽐내는 듯하기 때문이다.

 

판장문이 닫힌 누대의 난간 마루에 서면 계곡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올 듯싶다. 그러나 어쩐지 거기 오르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은 것은 단청 때문일까. 계곡 입구의 바위벽에 새겨진 ‘청하동천(靑霞洞天)’이라는 글귀가 높다란 단청 입힌 정자 앞에서 무색했다. 석천정사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거로 답사를 갈음했다.

▲ 석천계곡에 놓인 허술하고 위태로운 널빤지 다리. 물가에 버들개지가 무리 지어 피었다.

초봄, 계곡의 수량을 그만하다. 내를 가로지르는 널빤지 다리가 엉성하고 위태롭다. 물가에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갯버들의 꽃은 지난겨울의 추위를 견디며 기어이 봄을 맞았다. 문정희 시인이 ‘고승(高僧)’이라 부른 ‘솜털이 즐거운’ 버들꽃이다.

 

고승을 만나러
높은 산에 가지 마라
절에도 가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산그늘 아래
새로 눈뜨는 햇살을 들추면
거기 은빛 머리 부드러운
고승들 무더기로 살고 있다
조그만 바위 암자처럼 곁에 두고
얼었던 상처 맑은 물로 풀어 편안한 뿌리
살랑살랑 마음으로 흔들며
솜털이 즐거운 고승들
거기 무더기로 살고 있다

   문정희 ‘버들강아지’ 전문

 

‘얼었던 상처 맑은 물로 풀어 편안한 뿌리’, ‘살랑살랑 마음으로 흔들며’ 무더기로 핀 버들강아지를 렌즈에 담는다. 시인은 버들개지에서 ‘큰스님’을 보았지만 나는 버들개지가 그것이 겨우내 꽁꽁 언 냇물에 뿌리를 담그고 견뎌낸 시간이 맞이한 봄을, 그 감격을 생각해 본다. 역시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은 것’이다.

 


도암정, 그리고 봉화의 정자들

▲ 조선 후기의 정자인 시도민속자료 제54호 도암정(陶巖亭). 효종 대의 문신 김종걸이 세웠다.

유곡리와 멀지 않은 봉화읍 거촌2리에 조선 후기의 정자인 시도민속자료 제54호 도암정(陶巖亭)이 있다. 효종 때의 문신 황파(黃坡) 김종걸이 효종 원년(1650)에 세워 당대 유림이 교유하며 시사공론(時事公論)과 시영(詩詠)을 즐기던 정자다.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의 팔작집인데 가운데 칸은 마루를 놓았고 양쪽에 온돌방을 둔 간결한 구조다. 누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정자 앞의 연못에는 인공섬인 당주(當洲)가 있고, 정자 오른쪽에는 큰 바위들과 노송이 우거져 있다.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진 이 정자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뛰어난 심미관을 잘 드러내 주는 건물의 하나로 평가된다.

 

봉화는 나라 안에서 정자가 가장 많은 고장이다. 현재 확인된 곳만 100여 개에 이르고 사라진 것까지 합하면 약 170여 개소에 달하니 ‘정자의 고장’이라는 이름이 지나치지 않다. 봉화의 정자는 풍류 목적보다 강학, 즉 후학 양성을 목적으로 한 경우가 많고 풍광이 수려한 곳은 물론이거니와 집안에 세운 경우도 많다는 특징이 있다.

 

봉화에서 널리 알려진 정자로는 경체정(景棣亭), 창애정(滄厓亭), 옥계정(玉溪亭), 사미정(四未亭)(이상 법전면), 한수정(寒水亭), 와선정(臥仙亭)(이상 춘양면), 야옹정(野翁亭)(상운면) 등이 있다.

 

2011. 3. 6.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