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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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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호(宅號)…, 그 아낙들에겐 이름이 없다

by 낮달2018 2019.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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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이름 대신 쓰이는 ‘택호’

▲ 구미시 인동동 전경. 인동은 인동 장씨의 관향이다. ⓒ 구미시 인동동 주민센터

지난 주말에 벌초를 다녀왔다. 내 본관인 인동(仁同)은 칠곡군 인동면이었으나 구미시가 커지면서 거기로 편입되어 구미시 인동동이 되었다. 인동 인근에 우리 집안의 선영이 꽤 많다. 구포동의 솔뫼 부근에 6기를 비롯하여 구평동에도 9대조 내외분을 합장한 산소가 있다.

 

구평동 산소는 뒷산에 벼락 맞은 큰 바위가 있어 ‘불바우’[화암(火巖)]라고 불리는 동네에 있다. 그 동네는 지금은 코앞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는 도시 변두리로 편입되었지만, 예전에는 불바우라는 이름이 친근한 촌 동네였었다.

 

마을 입구에 예전에 없던 ‘불바위’와 ‘火巖’이라 새긴 커다란 자연석이 서 있었다. 우리 집안에는 이 마을 이름을 택호로 쓰는 어른이 두 분 계셨다. 내게 삼종조부가 되는 ‘화암 할배’와 내게 재당숙이 되는 ‘불바우 아재’시다. 두 분은 모두 내겐 할머니, 아주머니가 되는 마나님을 이 마을에서 맞은 것이다. 두 분은 물론 돌아가신 지 오래다.

 

‘용전댁 막내’ 혹은 ‘부암댁 맏사위’…

 

나는 집안 동생들과 함께 솔뫼의 벌초를 마시고 인동에 들어가 인근에 살고 계신 재당숙 ‘닥실 아재’와 삼종 숙모인 ‘논실 아지매’에게 인사를 드렸다. 연세가 연세인데도 아재는 강건하셨고, 아지매는 지난해 가을 뇌출혈로 쓰러진 이래 기력이 많이 쇠해 있었다.

 

고향이나 처가에 들를 때면 나는 종종 사람들로부터 ‘용전댁 막내’, 혹은 ‘부암댁 맏사위’로 불린다. 용전댁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부암댁은 장모님의 택호(宅號)다. 할머니의 택호는 ‘양골댁’이었는데 집안의 어른이 되면서는 ‘양골 마느래(마누라)’로 불리셨다. (‘마누라’는 고어에서 ‘높은 사람’의 뜻하는 어휘였다고 한다.)

 

택호는 원래 이름 대신 처의 출신지명이나 벼슬의 명칭, 또는 호를 붙여 부르는 이름이다. 우리의 전통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름이 있으면서도 그것 대신 택호를 즐겨 썼다. 택호의 연원(淵源)은 알 수 없으나 남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관습이나 오랫동안 처가살이를 하는 혼인풍속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모양이다.

▲ 택호는 지역 고택의 이름으로도 널리 쓰인다. 왼쪽은 구미 해평의 임당댁, 오른쪽은 군위 한밤마을의 상매댁이다.

택호로는 주로 그 집의 주부가 혼인하기 이전에 살던 동네 이름이 사용된다. ‘대율댁’보다는 ‘한밤댁’이 ‘수곡댁’보다는 ‘무실댁’ 등 자연마을 이름이 많이 쓰인다. 부인이 ‘하동’에서 시집 왔다면 그 집은 ‘하동댁’이 되면서 그들 부부는 각각 ‘하동댁 아저씨’, ‘하동댁 아주머니’라 불리는 형식이다.

 

여느 사람들과 달리 관직에 있었거나 시호를 받은 이들의 택호는 볼 것 없이 이를 사용한다. 대하소설 <토지>의 ‘최 참판’이나 <소나기>의 ‘윤 초시’가 그것이다. 마치 지방에다 ‘학생’이나 ‘처사’ 대신 ‘이조판서’를 쓰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보면 되겠다.

 

그러나 내 어릴 적에 마을에서 쓰던 택호는 그 형식과 내용이 조금 달랐던 듯하다. 애당초 한 집안의 사회적 지체와 격을 뜻하기도 했던 이 택호는 시골 마을에서 주로 부담 없는 ‘호칭’으로서 유력하게 쓰인 것이다. 옛 관직명 택호로 불리던 집이 없었던 고향 마을에선 ‘아무댁’이라는 택호가 이웃을 지칭하는 부름말이었다.

 

신식의 관직 이름을 붙인 택호로는 ‘면장댁’이나 ‘지서장댁’, ‘교장댁’이 있었다. 아버지 친구로 평양에서 월남한 의사 선생의 부인은 ‘의사댁’으로 불리었다. 뒷집에 세 들어 살던 초등학교 교사의 부인은 자신은 ‘사모님’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댁’으로 부르는데 한동안 앙앙불락했다는 얘기도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 ‘용전댁’이었으므로 아버지는 자연스레 ‘용전 어른’이 되셨다. 물론 ‘용전 어른’은 한참 아랫사람들이 부르는 칭호고 비슷한 또래의 부녀자들은 ‘용전 양반’이라 불렀다. 이 택호는 이웃 사이에만 통용되는 게 아니라 친척 간에도 생광스레 쓰인다. 부모님께선 ‘용전 형님’이나 ‘용전 오라버니’, ‘용전 아지매’ 등으로 불린 것이다. 그러나 시골에서 택호는 남자들보다는 아낙네들을 지칭하는 말로 주로 쓰였던 것 같다.

 

택호, 세대의 순환과 함께 사라져가는…

 

택호로 이웃을 부르던 풍습은 아마 우리 윗세대까지였던 것 같다. 열아홉 살 차인 내 맏형님에게도 따로 택호가 없었으니, 더 말할 게 없다. 당연하게도 나도 아내도 택호 따위는 없다. 아내에게 만약 택호가 있다면 ‘개내미댁’이거나 ‘하포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시골에도 택호를 가진 이들은 노인들뿐이다. 4, 50대의 아낙들도 아이들의 이름을 따서 ‘아무개네’ 또는 ‘아무개’로 불리는 것이다. 남자들은 별문제 없이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이름을 잃고 살았던 이전 세대의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이름보다는 자식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는 셈이다.

 

택호는 TV나 영화 따위에서 ‘온양댁’이니 ‘순천댁’이니 하여 대체로 ‘있는 집’의 가정부를 이르는 이름으로 주로 쓰였다. 그것은 세련된 집주인 가족들과 대비되는 촌스럽고 전근대적인 인물의 대명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에서는 주방을 맡은 이조차 ‘세련되게’ ‘미세스 아무개’였으니 더는 택호가 드라마에 등장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내 유년과 소년 시절에 우리 집에 드나들던 이웃 사람들을 희미하게 떠올린다. 큰몰댁, 돌밭댁, 월국댁, 관호댁, 밤실댁, 모리실댁, 웃골댁, 갓골댁, 반지댁, 말가실댁……. 그들 중의 대부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 이름들은 마치 이 세대의 순환과 함께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공연히 그런 이름들을 떠올리는 기분은 수수(愁愁)롭기 그지없다. 아버지 용전 어른께서 가신 지 어언 24년, 어머니 용전댁이 세상을 뜨신 지도 벌써 6년째인 것이다. 부모님 산소 주변에는 칡이 무성했다. 그놈들은 걷어내느라 나는 땀깨나 흘려야 했다. 까치밥 하나로 남은 홍시 너머로 바라뵈는 푸른 하늘은 어쩐지 쓸쓸하기만 하다.

 

 

2009. 9.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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