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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 사회 - 누구나 외롭게 죽어갈 수 있다

by 낮달2018 2019.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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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 사회, 고독사와 무연사

지난 7월,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던 탈북 모자의 죽음이 두 달이 지나 발견되었다. [관련 기사 : 탈북 모자의 죽음, 두 달간 아무도 몰랐다]. 이번 한가위 <제이티비시(JTBC)> 뉴스는 ‘무연고 사망이 5년 새 갑절로 늘었다’고 보도했다. [관련 기사 : 쓸쓸한 마지막 길…무연고 사망자 5년 새 2배로 늘어]

 

이런 소식은 더는 놀랍지 않을 만큼 일상이 되었다. 곡절과 무관하게 “곁을 지켜주는 사람 없이 홀로 살아가다, 또 홀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지금도 가족의 해체든, 가난과 병고든 누군가 외롭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2011년 방송대상(지역 다큐멘터리 TV)을 탄, <부산 엠비시(MBC)>의 ‘무연고 사회’를 시청하고 쓴 글이다. 일찌감치 사회적 문제 제기가 되었지만, 후속 조처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제도적으로 무연고사에 대한 장례 지원 등을 시행하고 있는 곳은 서울시가 유일한 듯하다.

 

탈북 모자의 죽음을 계기로 위기 가구를 찾아내는 시스템에 대한 정비 필요성과 함께 복지 사각지대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이웃과의 소통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문제 해결은 여전히 쉽지 않은 것이다.

 

2019. 9. 15.

▲ 혼자 살아가는 노인들은 고독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 부산 MBC <무연고 사회> 화면 갈무리

세상은 넓고 소식도 갖가지다. 그러나 으레 세상이 그런 거니 하면서 심드렁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은 소식도 적지 않다. 어저께 인터넷에 뜬 ‘30대 외톨이 여성 아사 7개월 만에 발견’ 같은 기사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무관심한 사회의 비극?

 

그 기사의 제목은 ‘무관심 사회의 비극’이다. 직업도 친구도 없이 질병을 앓아온 이 젊은 여인은 가족과도 연락을 거의 하지 않은 채 ‘사회적 외톨이’로 살아왔다고 했다. 사인이 어이없다. 넘치는 먹거리가 흔전만전한 세상에 굶주려 죽었단다. 그리고 그 죽음은 무려 7달 만에야 발견되었다.

 

기사의 제목 ‘무관심 사회의 비극’은 이 끔찍한 현실을 가리킨 표현이다. 그러나 이 표현 속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는 변명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역설이다. 어차피 세상이 그런 걸 어떡하겠는가, 하고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고 안타까움의 몇 마디로 이 참담한 현실을 추인해 버리는 것이다.

 

혼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처럼 혼자 죽음을 맞이하고 사후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발견되는 ‘외로운 죽음’을 ‘고독사’라 부른다. 고독사는 주로 배우자와 사별 또는 이혼하고 혼자서 살아가는 노인층에서 잦다.

▲ 고독사, 또는 무연사 등의 외로운 죽음은 공공요금 고지서 따위로 발견된다.

이웃과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므로 이들의 죽음은 주로 생활 주변의 흔적들을 통해서 감지되고 발견된다. 쌓이는 공공요금 고지서, 각종 독촉장 따위가 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는 실낱같은 삶의 흔적이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일상 속에서 그들의 삶은 닳아갔던 것이다.

 

고독사는 친지와 지인 등 주변과의 연락이 끊어지고, 사회복지 서비스의 차단 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1인 가구의 증가와 사회관계망의 해체되는 추세에 비추어보면 고독사가 특정 연령층의 문제로만 머물지 않으리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외롭고 쓸쓸한 죽음, 고독사와 무연사

 

그 외롭고 쓸쓸한 죽음에는 ‘무연사(無緣死)’도 포함된다. 무연사는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장례를 치러 줄 사람조차 없는 죽음을 가리킨다. 이른바 ‘무연(고) 사회’는 일본에서 등장한 신조어다. 그것은 저출산과 고령화, 경제난 등으로 가족을 비롯한 사회적 관계망이 해체된 상태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겪는 사회 현상을 이른다.

 

일본이 먼저 겪은 고독사·무연사의 충격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문제로 떠올랐다. 고독사 위험군이라는 5·60대 중에서도 독거노인은 전체 노인인구 중 비율은 20%에 가까워 2012년 현재 118만 명을 넘었다. 그 가운데 ‘고독사 예비군’으로 불리는 ‘위기 노인’이 10만에 가깝다.(<한겨레> 기사 참조)

▲ <한겨레>가 보도한 관련 통계. 독거노인의 증가 추이와 독거노인 현황.

부산 문화방송(MBC)이 2010년에 제작 방영한 ‘무연고 사회’는 고독사나 무연사에 대한 만만치 않은 문제 제기다. 공중파 본사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사회적 의제를 찾아 나선 지역 방송의 결기가 느껴지는 프로그램이었다.

 

부산에서 2년 만에 발견된 한 60대 남자의 죽음을 추적하면서 시작되는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에게 슬픔과 함께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공포의 감정까지 전한다. 방송이 다룬 숱한 고독사와 무연사가 딱 부러지게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이웃의 문제며, 마침내 ‘자신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시나브로 깨우치게 하기 때문이다.

 

방송사가 자체 조사를 통해 파악한 2010년도 무연고 사망자는 757명. 이들의 사망이 확인되면 한 달 동안 공고를 내 유족을 찾는다. 유족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들의 주검은 ‘무연고 시체 처리에 관한 규정’에 따라 처리된다. 지자체가 대신 화장을 하고 이를 일정 기간 납골당에 안치하는 등의 절차를 거친다.

 

부산시의 경우는 영락공원 무연고 사망자 가매장지에 묻힌다. 가매장 10년이 지나면 화장해 납골당에 안치했다가 일정 수가 되면 합장묘에 매장한다. 영락공원 한쪽, 무연고 사망자 가매장지엔 사망 연도와 일련번호가 매겨진 거친 빗돌이 가득했다.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외로운 죽음은 단지 무심한 숫자 두 개로만 남아 있다.

▲ 부산 영락공원의 무연고 사망자 가매장지. 이들의 죽음은 사망년도와 일련번호로 남는다.

고독사에 관한 한 변변한 통계조차 없는 상태, 방송은 일본의 경험을 빌린다. 일본의 한 고독사 예방센터 관계자와 대학교수는 고독사하는 사람은 아래와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고독사 위험군’의 특징이다.

 

인사를 안 한다. 친구가 없다. 친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가족 친지와 연락을 안 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남은 남, 나는 나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고독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 나카자와 회장 / 일본 마츠도 고독사 예방센터

우선 ‘여러분은 하루에 몇 명의 사람들과 인사를 하십니까’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두 번째는 ‘자신이 갑자기 없어졌을 때 걱정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에 대해 잠시 생각해 주세요.
세 번째는 ‘긴급 상황 시, 바로 연락해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그 세 가지를 생각해 보고, 만약 아무도 없으면 고독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유우키 야스히로 교수 / 일본 슈쿠도쿠대학

 

얼핏 고독사는 인간관계 맺기에 실패한 사람,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이 감당해야 할 개인적 문제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진단은 현대사회의 비정한 작동 방식과 그 속에서 자신을 추슬러야 하는 숱한 무력한 개인들을 간과하고 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강요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문제, 의미 있는 개인으로 존재하기를 단순히 개인적 문제로만 다룰 수는 없다. 정글과 진배없는 사회에서 사회적 관계 맺기란 단순한 교유를 넘는 사회적 현상이니 말이다.

 

우리 안의 보이지 않는 섬, 무연고 사회

 

여성보다 남성의 고독사가 심각한 것은 그 좋은 예다. 배우자에게 의존하는 비율이 높은 남자 노인의 경우, 자녀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노인 단독가구의 비율은 67%에 이른다. 이런 가족구조 형태는 결국 자녀세대들은 노부모와 같이 사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노인세대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상호 접촉이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외롭게 죽은 사람들 모두가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랫동안 관계를 단절하며 살아와 유족들이 시신 인수를 거부하기도 한다. 가족 간 단절에 어떤 곡절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이런 가족 관계가 고독사 가운데 드물지 않다.

 

방송은 한 노인을 통해 가족의 유대가 해체된 한 가정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위층과 아래층에 살고 있는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같은 집에 산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한 끼의 밥도 같이 먹은 적이 없다. 아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들 가족의 유대는 실낱처럼 가늘어졌다. 컴퓨터 게임을 하기 위해 조부에게 들르는 손자도 손님 같을 뿐이다.

▲ 상처 후 자식들과 연락이 두절된 채 혼자서 사는 노인에겐 납골당의 아내를 찾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날마다 달력의 날짜에다 동그라미를 치는 문 노인(77)도 그런 이다. 6년 전 상처한 이후 자식들과 관계가 멀어져 한가위지만 자식들로부터 어떤 연락도 없다. 그는 추석날 아침을 라면으로 때우고 집을 나선다. 거의 매일처럼 영락공원 납골당의 아내를 찾는 게 그의 일상이다.

 

“여보, 내가 왔소. 보고 싶었소.”
“이상하지, 여기만 오면 눈물이 자꾸 나니 말이야.”

 

납골함 앞에 붙은 아내의 화사한 미소 앞에서 노인은 말을 건넨다. 꺼억꺼억 울음을 삼키는 노인의 모습이 남 같지 않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죽음뿐이다. 그는 아마 어느 날 혼자서 외로이 죽어갈 것이다. 나라가 이들의 삶을 보듬지 않는 한, 고독사든 무연사든 이들의 죽음은 온전히 죽은 자의 몫일 뿐인 것이다.

 

논의에서 배제되어 있지만, 시골도 고독사에서 예외가 아니다. 혼자 사는 안노인들의 죽음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인근 지역에서는 밭에 나갔다 쓰러진 노인의 죽음이 하루가 지나서야 발견되었다던가. 시골이어서 이웃들의 교류가 있었으니 그나마 하루를 넘기지 않은 것이다.

 

프로그램 시청을 마치면서 문득 방송에서 다룬 사례가 ‘남의 일’일 수만은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면서 마음이 스산해진다. 혼자 사는 노인들이 아무도 모르게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버리지 못한다는 얘기도 새삼 마음에 밟힌다. 프로그램 끝머리의 해설이 성큼 마음을 울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우리 안의 보이지 않는 섬,
무연고 사회.
이곳에선 지금 가까운 누군가가
혹은 바로 옆의 누군가가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2. 12.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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