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들의 김치 관련 망언에 부쳐
때아닌 때에 ‘김치’가 화제로 떠올랐다. 일본 우익 케이블 방송 <채널 사쿠라>가 김치에 대한 비하 망언을 쏟아냈고 이 소식을 들은 소설가 이외수 씨가 일침을 가했다는 이야기다. 우익(사실은 극우다)이란 이 나라나 그 나라나 수준이 거기가 거기다.
일본 <채널 사쿠라>의 ‘김치’ 비하
내용인즉, <후지TV>가 일본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냄비 요리가 김치찌개라는 조사결과를 보도하자 이를 의심한 <채널 사쿠라>가 직접 거리 설문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같았다. 이런 내용을 방송하면서 <채널 사쿠라>의 진행자들은 ‘승복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이런저런 토를 달면서 ‘김치’를 깎아내렸다는 것이다.
“코리아타운 외에도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일본인이 많다니 정말 의외다.”
“일본인들의 미각이 얼마나 질 나쁘게 떨어졌나를 반영하는 결과다.”
“김치는 섬세한 맛이 없다. 김치처럼 자극적인 맛을 찾는다는 건 엄청난 억압에 사로잡힌 것이다.”
“일본인들이 김치찌개를 선호한다니 한탄스러운 실태다. 김치 금지령을 내려야 한다.”
“한국인들이 김치 같은 걸 매일 먹는 걸 보면 그 나라의 불행한 역사가 떠오른다. 김치 금지령을 내려야 한다.”
“김치찌개 따위를 먹는 건 아마도 저소득 계층일 것이다.”
“건강과 미용에 좋다는 김치 이미지는 미디어의 정보조작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음식물에 대한 단순한 호오(好惡)가 아니라 폄하니 ‘망언’이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다. 누리꾼들이 격분, 앙앙불락할 만한 일이긴 하다. 이에 이외수 씨가 트위터를 통해 “단무지는 뭐 얼마나 고급한 음식이라고 그따위 소릴 해대는지 모르겠다”고 쥐어박은 것이었다.
<채널 사쿠라>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일본 우익의 주장을 증명하려는 목적에서 제작하는 영화 <난징의 진실>의 제작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우익 채널이다. 방송 내용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 수준이 조악하고 졸렬하기 이를 데 없다.
이들 주장의 근저에는 열등한 조선(한국)인과 그들을 지배했던 위대하고 영용한 대일본 민족이라는 ‘앗싸리’한 이분법이 있다. 그것은 ‘대동아전쟁’을 통해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일본,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현인신(現人神)’ 천황에 대한 숭배로 축약되는 퇴행적 역사·세계관의 결과다.
그들의 이 비틀린 국가주의, 맹목적 인종주의의 논리에서 열등 민족 한국인의 음식인 김치를 위대한 일본인이 선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수치’다. 그런데 모든 연령대의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이 ‘김치찌개’라고? 정말 ‘한탄스러운 실태’일 수밖에 없다. 섬세한 맛은 전혀 없는, ‘맵고 짠’ 이 열등 민족의 음식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일본인의 미각이 ‘저질화’된 결과일 뿐이다…….
대영백과사전에 제힘으로 오른 ‘완전식품’
하다 하다 이들은 ‘저소득층이 선호하는 음식’으로 몰고 가는 계급전까지 벌이지만 글쎄다. 이는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우리나라에서 김치가 모든 음식의 기본, 그 기본 중의 기본이듯 그 맛의 비의(秘儀)를 아는 이들에게 계급 차가 무슨 소용이랴!
건강에 미용에 좋다는 김치의 이미지마저 ‘정보조작’의 결과로 폄하하고 싶은 이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김치가 가진 건강과 미용의 강점은 차고 넘친다. 일찍이 삼국시대 이후 우리 민족이 즐겨온 김치는 채소가 나지 않는 겨울철 비타민 공급의 원천이었다.
김치는 채소로 이루어진 저열량 식품이다. 식이성 섬유를 많이 함유하고 있어 장의 활동을 활성화하면서 체내의 당류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준다. 그래서 당뇨, 심장질환, 비만 등 성인병 예방 및 치료에도 도움을 준다. 김치의 숙성에 따라 증가하는 유산균은 요구르트와 같이 장내의 산도를 낮춰 유해균의 생육을 억제 또는 사멸시키는 정장작용도 수행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김치의 부재료가 발휘하는 덕성도 만만찮다. 고춧가루의 캡사이신 성분은 위액의 분비를 촉진함으로써 소화 작용을 돕고 함유된 비타민 A와 C로 항산화 작용을 통해 노화를 억제한다. 마늘의 스코르디닌은 원기 증진 효과를, 알리신 성분은 비타민 B1의 흡수를 촉진하여 생리 대사를 활성화해 준다.
또 김치에는 절인 수산물도 폭넓게 사용되어 쌀밥 중심의 식생활에 부족하기 쉬운 아미노산을 공급함으로써 영양상의 균형을 유지하여 준다. 일본의 ‘기무치’를 누르고 국제 식품규격에도 채택된 국제 식품 ‘김치’는 완전식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음식인 것이다. 어떠한 정치적 지원 없이 ‘김치(kimchi)’가 대영백과사전에 오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터이다.
작가 이외수가 언급한 단무지는 소금에 절인 무를 쌀겨 등에 파묻어서 발효시킨 음식이다. 단무지는 일본식 김치의 한 종류인 ‘타쿠앙쓰케(澤庵漬)’를 우리말로 순화한 이름이다. 우리는 어릴 적에 단무지를 ‘다꾸앙’(たくあん, takuan)이라고 불렀다.
추억의 ‘다쿠앙’에서 ‘단무지’로 돌아온 일본 발효식품
내가 이 음식을 처음 맛본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학교를 이틀이나 못 갈 만큼 호되게 앓고 있었는데 할머니께서 어디선가 얻어온 ‘다꾸앙’을 밥상에 올려주셨다. 할머니께서 떠먹여 주시던 그 달큼하고 아삭한 낯선 맛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꾸앙을 다시 맛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 단무지를 만난 것은 인근 대도시의 중학교에 진학해서였다. 형수님은 미제 거버(gerber) 병에다 노란 단무지 반찬을 넣어주곤 했는데, 나는 그것을 불평하지 않고 즐겨 먹었다. 중국집에서 자장면이나 짬뽕을 먹을 때 곁들여 나오던 그걸 여전히 우리는 ‘다꾸앙’이라고 불렀다.
그게 내가 노랗게 물든 단무지의 빛깔로도 식욕을 느끼게 된 사연이다. 우리가 일본말 ‘다꾸앙’을 ‘단무지’로 순화해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마 80년대에 들어서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 무렵에 인공색소가 유해하다면서 단무지는 색소를 쓰지 않는 희멀건 모습이 되었다. 꽤 오랫동안 색소 없이 쓰던 단무지가 다시 노란 옛 빛깔을 회복한 것은 인체에 해가 없다는 치자로 물들이게 되면서부터다.
‘우리말 다듬기’에선 ‘무를 시들시들하게 말려 소금에 절여서 만드는 일본식 짠지’를 가리켜 ‘단무지’ 대신 ‘무절이’라고도 부른다는데 정작 나는 ‘무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단무지의 ‘단’은 ‘달다’에서 왔다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마지막 ‘지’는 좀 다르다. 네이버 지식 사전에서는 “절인다는 뜻의 한자 ‘지(漬)’”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홍윤표 교수(단국대)는 ‘지’가 토박이말이라고 한다. 김치야 한자어 침채(沈菜)에서 왔지만 ‘지’는 ‘오이지, 짠지, 싱건지, 똑딱지(깍두기), 단무지’ 등에서 쓰이듯 우리말이라고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 지금도 우리 고향에선 ‘젓 김치’를 ‘젓지’라고 부르니까 말이다.
단무지를 만드는 길쭉한 무는 품종이 따로 있다. 안동 인근에도 이 단무지 무를 제법 재배한다. 이 무를 수확이 끝날 때쯤이면 지역의 부녀자들이 시래기를 엮을 무청을 주우러 다니기도 한다. 무 중에서도 맛이 으뜸인 단무지의 무청을 자연 건조한 ‘무청 시래기’는 이 지역의 특산물로 팔리고 있다.
같잖은 이유로 김치를 깎아내리니 그랬겠다. 작가 이외수는 ‘단무지는 얼마나 고급한 음식’이냐고 되받았다. 그러나 음식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의 고하는 있겠지만 음식을 굳이 고급과 저급이라고 나누는 건 그리 알맞아 보이진 않는다.
주변 환경의 조화 속에서 정착한 합리적 음식 문화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음식 문화의 비밀을 문화 생태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민음사, 1992)에서 ‘한 지역의 문화적 전통은 인간이 생태계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주어지는 생물학적인 강제’라고 주장했다. 이상해 보이는 관습이나 문화적 이데올로기에도 생물학적인 합리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 행위가 생태적 적응을 위해 이뤄진다고 하는데 이는 음식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유대인들은 돼지고기 먹는 것을 율법에서 금하고 있지만, 이는 단순히 계율의 문제가 아니다. 중동의 기후와 생태, 유목민족의 특성이 돼지를 기르는 것을 힘들게 한데다가 먹어보지 못해 익숙지 않고 불확실한 음식인 돼지고기를 기피한 것이 그 문화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마빈 해리스는 육식의 관습부터 벌레, 애완동물(다른 지역에서 애완동물로 간주되는 동물들)을 먹는 전통, 식인 관습에 이르는 다양한 음식문화가 주변 환경의 조화 속에서 정착된 합리적인 문화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역사란 인간들이 서로 다른 생태적 환경 속에서 적응해 온 과정이라는 것이다.
굳이 마빈 해리스를 인용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김치와 일본의 단무지가 각각 그 땅과 사람이라는 생태적 환경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음식 문화의 일부임은. 건조한 한국의 기후와 습도 높은 일본의 기후가 각각 그 터에 적응할 수 있는 발효식품으로서 김치와 단무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일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라는 괴질이 돌아 사람들이 쓰러질 때도 우리나라에서만 이 질병의 희생자가 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우익 떨거지들이 주장한 이 ‘저급한 음식’ 덕분이었다. 이제 그 생태적 환경의 제약을 넘어 인위적 저장능력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지기 시작한 나라 사이의 음식 교류를 철 지난 인종적 관점으로 재단하려는 것은 어리석을뿐더러 무익한 일일 뿐이다.
일본인들이 김치의 매운맛에 길들어 이질 등의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기르거나 한국인들이 일본의 단무지를 분식의 필수 반찬으로 여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국가 사이의 음식 교류일 것이다. 그러니 거기다가 뜬금없이 인종적 편견과 무지한 계급적 도그마를 들이대는 것은 다른 걸 떠나서 음식에 대한 모독이다. 해방 반세기를 훌쩍 넘기고도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를 면치 못하는 두 나라 사이가 그런 비정치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갈 수 있다면 그것은 좀 좋은 일인가 말이다.
2011. 7.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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