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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형’을 찾아서

by 낮달2018 2019.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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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에 떠난 벗의 아우, 그의 ‘형’ 찾기

▲ 친구의 아우에겐 그의 형 찾기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피를 나누었지만, 우리는 형제 자매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친구·애인만큼 가족을 ‘진짜’ 알고 있나요?

 

설날 처가에서 처조카 녀석의 컴퓨터를 뒤적이다가(이젠 이 정보통신기기가 책을 대신하고 있으니 이렇게 표현해도 무방하지 싶어서 쓴 표현이다.) <한겨레 21>의 “샐 위 패밀리 인터뷰?”라는 기사를 읽었다. “친구·애인만큼 가족을 ‘진짜’ 알고 있나요? 제삼자가 돼 가족을 바라보고 질문해 보실래요?”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글이다.

 

‘즐거운 나의 집’은 동화 속 얘기다. 대부분의 가족은 오해와 무지와 무관심이 8할이다. 친구, 애인, 직장 동료를 아는 것의 절반만큼이나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동생, 내 누나, 내 언니를 알까.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가족에 대해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묻지 못하고 ‘이해’와 ‘사랑’이라는 ‘보기 좋은’ 단어로 가족을 포장하지 않았나. 설 연휴다.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묻기 좋은 때다. 시어머니, 올케, 조카와 마주 앉기 좋은 때다.
      - 기사 중에서

 

기사는 ① 트랜스젠더 딸이 어머니를 인터뷰하다, ② 가장 슬펐을 때는 시어머니 돌아가신 때, 좋을 때는 ‘밤나’, ③ 대학생, 열일곱 아버지의 길을 거닐다 등 세 꼭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세 기사의 공통점이라면 인터뷰한 자식들이 부모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차례의 대화로 인터뷰로 우리는 어버이의 세계에 얼마만큼이나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까.

▲ 손녀가 할아버지와 함께 빛바랜 사진첩을 보고 있다. ⓒ 한겨레 21

정작 ‘가족’이긴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이 기대 이하라는 건 사실일 듯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당신들과 내가 나눈 대화라야 고작 일상적 의사 교환을 넘지 않았으리라. 나는 당신들을 이해하거나 설득하기보다는 강하게 주장하여 내 생각을 관철하기 바빴던 듯하다. 그런 아들에게 당신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침묵으로 그것을 추인하는 일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이제야 그걸 가늠하게 된 미욱한 자식은 아프게 지난 세월을 되새겨 볼 수밖에 없다.

 

자라고 나면 자식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속내도 잘 말하지 않거니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한다는 게 절대 쉽지 않다. 아이들은 부모의 주문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그게 부모의 뜻대로 하겠다는 의사 표시는 아니다. 우선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척할 뿐 그들이 어버이의 뜻을 좇아 자기 삶을 꾸릴 생각을 하는 것 같지 않다.

 

문제는 여전히 그 소통이 어렵다는 데 있다. 스스로 그리 막힌 구세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 벽을 넘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내가 돌아가신 양친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처럼 아이들도 스스로 어버이가 되고 나서 아비의 삶을, 그리고 그 그림자를 깨우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건 시간이 필요할 터이다.

 

친구 아우의 ‘형 찾기’

▲ 1988 년에 내가 타자해 묶은 친구의 유고집

지난 5일, 오랜 친구 김 선생과 함께 옛 친구의 아우를 만나 술을 마셨다. 친구는 꼭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때 그 아우의 나이는 갓 스물한 살이었다. 그리고 이제 불혹을 넘긴 그 아우는 망형(亡兄)의 옛 친구를 찾은 것이다. 망형이 산 세월보다 더 나이를 먹은 아우는 나이 들면서 형을 새롭게 이해하고 싶다고 말했다.

 

술상 앞에 앉아 우리는 아우를 상대로 띄엄띄엄 망자를 주제로 한 얘기들을 나누었지만, 마음은 스산했던 것 같다. 스무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를 떠올리는 일도 허망했고, 그것이 되 비추어 주는 현재의 삶과 세월을 상기하는 것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우는 꼭 스무 해 전에 내가 정리해 묶은 친구의 글을 내게 되돌려 주면서 백배사죄를 했다. 친구가 그의 고향 뒷산에 묻힌 두어 달 후였을 게다. 나는 그의 아내에게서 받은 친구의 원고를 그 무렵 새로 산 전자타자기로 일일이 타자했고, 복사점에서 그걸 복사·제책해 네 권으로 만들었다. 그 책 네 권은 부모님과 그의 아내, 친구와 내가 나누어 가졌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사실을 잊어버릴 때쯤이었던 두어 해 전, 어느 날 나는 아우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어떤 형식이든 형이 남긴 작품을 책으로 묶고 싶다며 내게 있는 형의 원고를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주저 없이 그의 요청을 따랐다.

 

그러나 그는 이후 어떤 연락도 없었다. 말이 그렇지 책을 묶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지나가는 얘기로 내가 묶은 책은 돌려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했는데 이를 전해 들은 아우가 사죄 겸해 이 술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아우에게 형은 참 ‘두려운 존재’였다고 했다. 가끔 시골집에 들르면 형은 동생에게 소주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그는 밤새 소주를 마시며 책을 읽곤 했다고 한다. 열두 살 차이, 띠동갑이었던 맏형을 바라보는 아우의 마음에 두려움과 함께 일종의 신비주의의 그림자가 끼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늘 형은 두려웠습니다. 밤새 소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요……. 
나이를 먹으면서 형에 대해 알고 싶었지요. 형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우는 형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성년에 진입했고, 동시에 형을 여의었다. 어렵고 두려웠던 형은 불의의 죽음으로 동생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조차 빼앗아 버린 셈이었다. 아우는 성장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삶과 겹쳐 형을 이해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우에게 형과의 추억을 하나씩 꺼내 펼치면서 우리는 저도 몰래 스물몇 해의 시간 속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서글프면서도 한편으론 따뜻한 회상으로 다가왔다. 그때 우리는 20대 후반의 복학생으로 문학과 학업 사이를 어정쩡하게 오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를 처음 만난 건 교정의 어느 벤치였다. 3학년 때였다. 후배 하나가 그를 소개했고, 우리는 그날 밤늦도록 소주를 마시며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졸업 때까지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몇 명의 친구와 함께 소설 동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졸업 후 친구는 고향으로 돌아가 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같은 학교에서 만난 여교사와 결혼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많았던 것 같다. 내가 가족 부양의 의무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짓눌려 있을 때, 그는 어느 날 사표를 던짐으로써 내게 엄청난 열패감을 안겨 주었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았던 세상에 뛰어들어 87년 6월 항쟁과 그 당시 시작된 ‘새 신문 창간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 ‘새 신문’, 즉 <한겨레>가 창간되기도 전에 그는 가족과 친구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한밤, 영주에서 돌아오던 그의 오토바이가 시가지 들머리에 주차해 있던 트럭을 들이받은 것은 88년 1월이었다. 그때 김 선생과 함께 일급 정교사 자격연수를 받고 있던 나는 수업을 제쳐놓고 안동에 와서 그의 장례를 치렀다.

 

내 삶에서 그의 죽음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가족을 잃은 것보다 더 큰 비통에 목놓아 울었고,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도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슬픔을 어찌 가족의 그것과 견줄 수 있으랴. 부모님의 고통은 차마 여기 쓸 수 없다.

 

마음씨만큼이나 고왔던 그의 아내, 나는 애증 없이 그이를 떠올리지 못한다. 그가 죽고 나서 삼 년 후인가 그녀는 재혼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었지만, 그것은 이성이었을 뿐이었다. 여전히 내 마음속에 깃들인 친구의 얼굴 위에 그녀의 모습을 쉬 떼어낼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세월은 인간의 마음, 그 강퍅한 부분을 무화해 버린다. 나는 그녀가 딸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걸 축복하고 있다. 그 아이는 자라서 어느새 고등학생이 된다던가. 나는 어느 날 어떤 장례식에서 스치듯 그이를 만나기도 했다. 지금은 남이 된, 옛 형수에 대한 아우의 생각도 따뜻했다. 형수는 제게 아직도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지요…….

 

우리는 맥줏집을 거쳐 노래방까지 갔고 거리에서 헤어졌다. 아우는 좀 겨웠던 모양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고향에 올 때면 우리를 찾겠노라고 아우는 다짐했다. 섣달 그믐날에 쓴 그의 전자우편을 받은 건 설을 쇠고 나서다.

 

“왕성한 사회활동…, 경서 형님이 살아계셨어도 형님들 사는 모습과 흡사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전 너무 단조로운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나 반성이 되기도 하구요. 누구한테 나를 소개할 때 달랑 명함 한 장 이외에는 자료가 전무한 삶이니까요. 하지만 전 아직 젊으니까 위안이 되긴 되네요. 하지만 이것도 저에겐 벅차니까 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맘가짐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긴 듭니다.

두 분 형님들 어젠 정말 돌아가신 우리 형님도 같이 술자리에 동석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한 차례 망형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으로 아우가 형의 자취를 찾고 그를 이해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미 세상에 없는 망형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의 ‘가족 찾기’가 시작된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형의 흔적에 그치지 않고 자기 삶을 톺아보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2008. 2.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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