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훈련소, 추억과 역사
오늘 보도에 따르면 육군은 신병훈련 기간을 지금처럼 5주로 유지하고, 20㎞ 철야 행군도 시행하기로 했다고 한다. 복무기간이 21개월에서 18개월로 단축됨에 따라 신병훈련 기간도 5주에서 4주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5주를 유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1977년 5월에 징집된 나는 흔히 ‘논산훈련소’로 불리는 육군 제2 훈련소에서 6주간 신병훈련을 받고 이등병 계급장을 달았다. 훈련이 거의 끝나 갈 때, 우리 다음 기수는 신병훈련 기간이 4주로 준다는 걸 알았다. 모두가 불운을 한탄하고 말았는데, 4주로 줄었던 기간은 다시 5주로 바뀌었던 모양이다.
다음은 2008년, 제2 훈련소 57주년에 쓴 글이다. 11년이 흘러 올해, 논산훈련소는 68돌을 맞게 된다. 우리는 입소해서 퇴소할 때까지 편지 외에는 외부와 어떠한 연락도 할 수 없었으나 요즘은 영외 면회도 가능하다고 한다,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마땅히 병영과 그 문화도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2019. 9. 10.
육군훈련소 57년
어젯밤에 논산의 ‘육군훈련소’가 부대 창설 57주년을 맞았다는 뉴스를 보았다. 아, 논산훈련소가 나보다 나이가 많구나 싶었고, 입대해서 거기서 보낸 젊음의 한때를 아주 막연하게 떠올렸다. 나는 정확히 1977년 5월 13일 입대하여 바로 논산훈련소에 입소했고, 신병훈련 6주를 포함해 약 7주쯤을 거기서 머물렀다.
군 복무는 이 땅의 젊은이라면 피하기 어려운 통과의례다. 군대는 이른바 ‘신의 아들’이 아닌 ‘인간의 아들’이라면 으레 부득이 다녀오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다. 그게 본질적으론 ‘신성’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부모의 경제력이나 권력에 따라 그게 고무줄처럼 운용되면서 결국 그 ‘신성함’은 빛이 바랬다.
젊음의 한때가 귀중한 시간이라는 데는 아무도 예외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기득권층에게만 그 시간의 귀중함이 제대로 허용되는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국군통수권을 가진, 민간 출신의 대통령 중 병역을 제대로 마친 이가 겨우 한 사람뿐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권력이 클수록 현역 복무율이 떨어지는 기현상 앞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공염불일 뿐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사지육신이 멀쩡한 건장한 남자 연예인이 공익근무요원으로 빠지는 걸 보면서 딸애는 그런다. 저러니, 현역으로 ‘끌려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게다가 현역 복무는 운수가 틀리면 ‘무사 귀환’을 보장할 수 없다.
젊은 병사들은 총기 사고로, 교통사고로, 초소가 무너져 죽고, 오발 사고로 죽는다. 구타 등 가혹행위로 인한 자살까지 생각하면 ‘돈 있고 빽 있는 부모’들이 적당히 ‘손을 써서’ 아들을 ‘빼는’ 게 남의 일이 아니다. 죽는 당자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 기른 멀쩡한 아들을 어처구니없이 잃은 부모 심정은 어떠할까 말이다.
아들 녀석은 지난해 여름에 정확히 24개월의 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좀 힘들게 군 생활을 해서였는지 녀석은 군 복무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다. 군 복무를 통해서 젊은이들이 배우는 가치라는 게 기껏 ‘약육강식의 논리’나 ‘면종복배의 기회적 처신’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쉰세대’여서인가, 나는 아이의 얘기에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거기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영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편이다. 남자의 생애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때에 집단적 사고와 규율을 강제당하고 개성을 스스로 억눌러야 하는 경험이란 고통스러운 만큼 값진 경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인 것이다.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병사들이 경험하는 군대 사회란 꼼짝없이 사회의 복사판이다. 그들은 거기서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으면서 조직의 메커니즘을 배우는 것이다. 거기서 익히는 것은 달리 말하면 어디 하나 내 편이라곤 없는 막막하고 낯선 공간에서 ‘살아남기’의 기술이다. 마음과 몸을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조화시켜야 하는 게 좀 끔찍하긴 하지만 말이다.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얘기 중 하나라는 ‘군대 이야기’가 남자에게 지치지 않는 술안주가 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듯하다. 경험은 고통스러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난 이야기’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은 자’인 것이다. 끔찍한 병영의 추억 속에서 피 흘렸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자신이 ‘생존자’라는 인식인 것이다.
고락을 같이했던 전우들을 잊지 못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그들이 어떤 인물이었든 고통의 체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큼 친화력을 발휘하는 게 또 어디 있겠는가. 훈련의 강도와 고통이 크면 클수록 전우들과의 결속과 공감의 크기도 커지는 것이다.
육군훈련소 누리집에 따르면 이 부대(육군 제2 훈련소)가 창설된 것은 전쟁 중이던 1951년 11월 1일이다. 한 달 후쯤에 23연대를 창설했다는데, 훈련소 시절 내가 그 연대 소속이었다. 육군훈련소로 부대 이름을 바꾼 것은 1999년이다. 30년도 전의 일인데, 어떤 부분은 아주 명료하게 어떤 부분은 앞뒤를 잇는 중요한 고리가 뭉개진 채로 떠오른다.
1977년 5월부터 7월까지
1977년 5월 13일은 지금 확인해 보니 금요일이다. 나는 머리를 박박 깎고 뚜껑 없는 챙모자 하나를 덮어쓰고 집결지에 모였고, 오후 6시께는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열차에 올랐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호송관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지금까지 사근사근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서슬이 시퍼레진 것이었다.
장정들은 모두 저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덤덤하기만 했다. 가긴 가는 건가……, 어쩐지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건너편에 앉았던 좀 거친 인상의 젊은이 하나가 울기 시작했는데, 그는 구미를 거쳐 김천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울어댔다. 나는 나중에 그에게 살의에 가까운 적의를 느꼈는데, 그건 결국 내 마음도 심상치 않았다는 뜻이었으리라.
역에 도착할 때마다 호송관은 ‘등화관제’를 소리쳤고, 우리는 복창하면서 차창에 달린 커튼을 내리고 머리를 다리 사이에 처박아야 했다. 김천을 지나면서부터 어둠이 짙어졌는데 처음으로 열차에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간절해졌다.
우리가 연무대에 도착한 것은 아마 자정이 가까워서였던 듯하다. 수용연대(1986년에 이 이름은 ‘입소대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행정반 앞 자갈밭에 모여 섰는데, 굼뜬 동작에 화가 난 기간병이 달려왔다. 그는 내 바로 앞 장정의 뺨을 후려쳤고, 이내 대열에 살얼음이 끼었다. 잠시 후에 볼을 문지르던 그 친구의 중얼거림이 지금도 생생하다. 야, 나 좀 조용히 살게 내버려 두라…….
수용연대의 한 내무반에서 나는 향도(嚮導)를 맡았다. 대학 재학 중인 장정 손을 들라 해서 들었더니 연대 내 최고 고참이라는 내무반장은 나를 향도로 지목했던 것이다. 첫날, 일석 점호 때 보고를 했는데 한바탕 침상 위를 굴러야 했던 다른 내무반과 달리 우리 내무반은 조용히 취침할 수 있었다. 난생처음 하는 보고였지만, 나는 별 실수 없이 보고를 마쳤기 때문이다.
수용연대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새로 실시한 신검에서 ‘귀향’ 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정들이었다. 그들은 연신 싱글거리면서 쓰레기장에 산처럼 쌓인 모자 하나를 주워 쓰고 자랑스레 연대를 떠났다. 나는 고등학교 때 앓았던 늑막염의 흉터가 한 번 더 걸리기를 바랐지만, 결국 갑 1종 판정을 받았고 이삼일쯤 후에 교육연대로 배속되었다.
야전 변소의 추억
23연대는 훈련소 초입에 있었다. 2층 슬래브 건물인데 수세식 변소까지 비치된 깨끗한 현대식 막사였다. 그러나 수세식 변소는 그림의 떡이었다. 내가 배속된 중대는 2층이었다. 아마 수압이 시원찮았던 모양이고 무엇보다도 물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화장실에서 소변만 해결할 수 있었고, ‘큰 것’은 연병장 저편의 야전 변소를 이용해야 했다.
야전 변소란 게 그렇다. 그것은 널찍한 터에다 구멍을 수십 개 뚫어 놓고 가녘에는 가마니를 둘러친 그야말로 원시적 시설이었다. 거기서 병사들은 전후좌우로 동료들의 배설 장면을 지켜보면서 볼일을 보는 것이다. 모두, 도난을 우려해 작업모를 벗어 앞 가슴패기에 집어넣고서. 그러나 야간에 몰래 수세식 변소를 이용했다가 물이 시원찮아서 전전긍긍하는 것에 비기면 거기선 훨씬 편하게 배설을 즐길(?) 수가 있었다.
훈련소 누리집에 보니 중대당 7대씩 자동식 비데까지 비치하고 운용하고 있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란 이런 데 쓰는 말인 모양이다. 또 훈련병들은 목욕은 주 2회, 샤워는 필요시마다 실시한다고 되어 있으나 우리는 6주의 훈련 기간 중 딱 한 번 목욕을 할 수 있었다.
5월 중순께 훈련이 시작되었으니 훈련은 7월 초순에 끝났다. 날은 더웠고, 비도 제대로 오지 않았는데, 병사들의 몸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목욕에 들어갔는데, 반쯤 씻다가 몸만 헹구고 나온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편지는 두어 차례 썼는데, 그것도 교육의 일부였다. 정해진 시간에 침상 바닥에 엎드려 편지를 쓰고 있는 훈련병들의 모습은 좀 딱해 보이기도 했다. 검열을 강조하니 마땅히 쓸 내용이 없었다. 나는 그저 건성으로 날씨 얘기나 하다가 편지를 마무리하곤 했다.
밤마다 한 내무반에 전 중대원을 모아서 이론 교육을 했다. 고된 훈련 때문에 잠은 쏟아지고 눈을 부릅뜨고 강의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고통은 끔찍했다. 교육받은 내용은 심심하면 시험을 쳐서 기준 점수에 미달하는 친구들은 재시험을 치거나 얼차려를 받았다. 이 땅의 젊은이들은 군대까지 와서도 시험을 치러야 했고, 그 점수로 괴로움을 당했던 셈이다.
특식 시간의 행복
가장 행복한 시간이 식사 시간과 어쩌다 한번 허용되는 야간 특식 시간이었다. 입소하면서 부정의 소지를 없앤다고 모든 현금은 쿠폰으로 바꾸어야 했다. 개별적 PX 이용은 불허여서 취침 무렵에 내무반장의 허가 아래 쿠폰을 걷어 빵과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곤 했다.
빵은 단팥빵이었고, 아이스크림은 ‘브라보콘’이었다. ‘열두 시에 만나요, 브라보콘’이라는 시엠송이 유행할 때여서 우리는 크림을 핥으면서 그 노래를 ‘열두 시에 끌러요, 부라자끈’으로 개사해 부르곤 했다. 천천히 가능하면 오래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맛을 즐기기 위해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혀를 놀렸던 것 같다.
훈련소의 교육훈련장은 대부분 야외에 있었다. 아침에 행군해 30분 내외의 장소에 있는 야외 교장으로 이동 거기서 오전 훈련을 한 뒤, 추진해 온 점심을 먹고 오후 훈련을 했다. 야외 교장 가는 길에 어쩌다 민간인을 만나기라도 하면 우리는 자신이 군인이란 사실을 거듭 확인하곤 했다. 민간인, 특히 여자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상한 열패감에 젖고는 했던 듯하다. 미추를 떠나 여자들이란 존재는 우리 자신의 부재 증명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훈련소에서의 최고의 시간은 딱 한 번 나갔던 대민지원이었다. 모내기 철이어서 인근 농가로 나가는 기회는 쪽지 시험에서 일정 점수를 받은 병사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우리는 민가에서 한나절 모내기를 거들고, 제대로 끓인 돼지고기 찌개와 함께 ‘사제(私製) 밥’을 먹었다. ‘짬밥’에 길든 혀였지만 우리의 미각은 그 고향의 ‘옛 맛’을 용케 기억해 냈던 것 같다.
지금은 자유시간에 훈련병들이 마음대로 신문이나 진중 문고를 읽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때 영내에 있는 인쇄물이라곤 각자에게 지급된 군인수첩뿐이었다. 그리고 액자에 넣어 게시한 ‘군인의 길’이나, 영내 곳곳의 입간판에 새겨진 ‘전투수칙’이 고작이었다.
나는 인쇄물에 대한 갈증을 야외 교장에서 휴식시간마다 주변을 굴러다니는 신문 조각이나 과자 봉지 따위에 쓰인 문구를 읽는 것으로 달랬다. 누렇게 바랜 신문지와 라면 봉지 등에서 읽은 분묘개장 공고, 라면 조리법 등은 오래 잊히지 않았다.
지겹던 6주가 끝날 때쯤 우리는 슬픈(?)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리 다음 기수부터 신병 교육 기간이 4주로 준다는, 우리의 불운을 확인해 주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너무 억울해서 10원짜리를 입에 달면서 우리의 불운을 확인해 준 국방부의 정책 당국자를 저주했다.
교육을 마치고 수료식을 치른 다음, 우리는 배출대대로 전속되었다. 거기서 이틀쯤 머문 뒤에 우리는 다시 연무대역으로 가서 열차를 탔다. 열차가 떠나기 전에 우리는 삼십 분 이상을 차창 밖을 향해 손을 흔드는 연습을 해야 했다. 우리는 그러나 기분 좋게 호송관의 구령에 따라 정해진 인사말을 외치면서 손을 흔들었다. 연, 대, 장, 님, 안, 녕, 히, 계, 십, 시, 오…….
저녁 6시께 출발한 열차는 곳곳에 멈춰서 병사들을 부리느라 이튿날 정오가 가까워서야 용산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호송병에게 우리가 가는 곳을 물어댔지만,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너희는 재경(在京) 부대로 간다. 재경 부대란 서울에 있는 부대겠지만, 우리는 어떤 부대가 서울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호송병의 말대로 나는 재경부대로 전속되었다. 뒷날 안 일이지만, 재경 부대란 육군 본부 직할부대인 보안사, 정보사, 수경사, 특전사 따위를 이른 것이었는데 나는 팔자에 없는 특수전 사령부로 배속되었다.
알다시피 특전사는 일종의 비정규전 부대다. 거기서 나는 공수교육과 특수전 교육을 받았고, 사령부 산하 여단에서 전투 중대와 대대본부에서 근무했다. 공수교육을 포함, 전역할 때까지 모두 10여 회의 걸친 강하훈련을 치렀다.
말년이던 1979년 10월에 박정희가 시해되었다. 우리 대대는 육본으로 출동하였고, 마지막 휴가 중이던 12·12 때는 쿠데타군을 막으러 출동하다 아군 간의 교전 우려 때문에 회군하기도 했다. 운 좋게도 나는 한 번도 시위 진압이나 계엄군으로 출동하지 않았다. 이듬해 2월 초순에 나는 만기 전역했다. 꼭 일주일이 모자란 33개월이었다.
군, 상처의 경험들
예비역에게 군 경험은 일종의 상처고, 피해갈 수만 있다면 피해가고 싶은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다. 많은 예비역이 전역 후 오랫동안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불안할 때마다 그들은 재소집되는 꿈을 꾼다. 나는 40대 초반까지 재소집되거나 공수교육 재입교 명령을 받는 꿈을 꾸면서 고통스러워했다. [관련 글 : ‘군대’란 무엇인가, 전역병의 ‘통과의례’- ‘재소집’의 악몽]
군 경험을 통해 청년들은 사회를 학습한다. 군대란 개인의 뜻과 무관한 사회란 사실부터 층층시하 윗사람에게는 절대복종해야 하는 이 비정한 조직의 관습까지. 삶의 고단함을 깨닫는 일이야 어떠랴만, 그것은 ‘요령을 통한 탈법과 편법’이 세상을 사는 방법이란 가외의 역리(逆理)까지 가르친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얼렁뚱땅은 거기서부터 원천적으로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논산에선 훈련병들은 금연이 강제되고 교육이 끝나면 면회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나신 내 맏형님께서 입대하셨을 때, 솥을 준비하여 면회를 가셨다는 어머니의 얘기가 생각난다. 부대 바깥엔 솥을 걸고 밥과 국을 끓이는 연기가 자욱했다던가. 그 시절일 듯한 정부 기록사진집의 사진 한 장을 무심히 들여다본다.
33개월 동안 복무하면서 나는 내가 국가에 충성한다는 생각 따위는 한 적이 없다. 모두가 그랬듯이 어서 이 의무 복무기간만 때우고 나가자는 생각뿐이었다. “뺑이를 쳐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거나 ‘군인의 길’ 내용을 바꿔 “나의 길은 제대에 있다.”고 외치는 병사들에게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언감생심일지도 모른다.
방위병으로 근무하는 보충역 처분을 받는 것을 은근히 창피해하는 친구들도 있었던 예전에 비기면 요즘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의 생각은 상상을 넘어 버린다. 그들은 군 복무기간 동안 유예되어야 하는 자기 삶에 대한 기대가 무엇보다 큰 친구들이다. 편법과 탈법으로 병역을 면제받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한, 그들에게서 ‘조국 수호’의 ‘신성한 의무’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친한 친구와 동반 입대도 할 수 있고, 입대 날짜도 고를 수 있다. 자대로 전속되면 집으로 전화하여 근무부대를 가르쳐 주기도 하니 자식을 군에 보내고 노심초사하는 부모에겐 적잖은 위안이다. 그러나 세상이 변해도 자식을 군에 보내는 어버이의 마음은 그대로다.
어떤 삶이든 그걸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자식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자식을 군에 보내는 모든 어버이가 바라는 것은 자식의 ‘안전’이다. 나라나 군이 자식의 안전이 군의 안전이나 나라의 안전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08. 11.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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