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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한 독자와 비평가의 ‘신경숙 읽기’

by 낮달2018 2019.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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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신경숙, 그리고 오길영 교사가 읽은 신경숙

▲ 첫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

나는 고교와 대학 시절에 좀 느슨한 소설 습작기를 가졌던 사람이다. 굳이 ‘느슨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거기에 ‘다 걸기’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소설 쓰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몇 군데 대학문학상을 받았고(이 대목은 그냥 ‘초등학교’ 때 공부 좀 했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이시기를^^) 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내 습작기를 끝내버렸다.

 

주변에선 너무 쉽게 포기한 것 아니냐며 아쉬워하기도 했지만, 나는 우정 모든 미련을 접어 버렸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내 천박한 시각과 세계관 따위로 ‘감자 한 알 적시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신경숙 읽기는 불편했다

 

▲ 신경숙이 등단한 1985년 겨울호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그냥 ‘독자’로 남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실한 독자’란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다. 나는 알량한 내 습작 경험에 기댄 채 주관적 취향과 기호를 잣대로 작가들의 작품을 난도질하면서 30대를 보냈다. 중등학교에서 문학을 맡아 참고서 식의 문학비평을 반성 없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물론 내가 가진 취향과 정서를 적당히 버무려서 말이다.

 

신경숙의 소설을 처음 만난 것은 첫 임지인 여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때 계간지 <문예중앙>을 받아보고 있었는데 어느 해(확인해 보니 1985년이다.)인가 신경숙이 그 잡지의 신인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아주 교과서적인 짜임의 ‘겨울 우화’라는 중편이었는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신경숙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가 나온 게 1993년이다. 내 서가에는 같은 해에 나온 9쇄 본이 있으니 신인 작가로 신경숙의 소설집은 꽤 팔렸던 게 틀림없다. 그 소설집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이나 작품에 대한 인상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좀 불편했던 모양이다. 벗들과 만나서 ‘신경숙의 소설은 더 읽을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얘기를 주절거리고 다녔던 걸 보면.

 

내가 불편했던 것은 소설집 끝에 실린 해설에서 박혜경이 언급한 대로 ‘시간의 흔적들만을 묻혀 가지고 있는 삶’이었다. 그가 즐겨 쓰는 줄임표와 줄임표 사이에 정밀하게 묘사된 심리 묘사를 읽어내는 데 내 인내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그런 미시적 삶의 흔적들만으로 꾸려가는 그의 감상적 스타일(문체)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 작가 신경숙(1963∼  )

자신에게 약속한 대로 나는 그 후로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이후 일간지나 문예지 월평(月評) 난에서나 그의 소설 소식을 가끔 접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 나름의 문학적 선고(?)에도 불구하고 신경숙은 대중적 지명도를 높여갔고 어느덧 문단의 중견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돌아와서 문학을 가르치면서 나는 다시 신경숙의 소설을 만났다. 언어 영역에서 다루는 현대소설 가운데 신경숙의 소설이 가끔 나오기 때문이다. ‘외딴 방’이나 ‘풍금이 있던 자리’가 그것이다. ‘외딴 방’은 짤막한 지문을 통해서 만났고, ‘풍금이 있던 자리’는 아이들이 발표할 소설 과제로 두어 해쯤 가르쳤다.

 

‘외딴 방’은 창비에서 주관하는 만해문학상 수상작인 자전적 장편소설이다. 어떤 온라인 서점에선 이 작품을 ‘한 외로운 영혼의 진지한 행로를 따뜻하게 포용하고 있는 감동적인 노동소설이자 뛰어난 성장소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노동소설’로 매기는 게 그리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이 소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일하면서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던 작가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이력을 독자에게 고백한 셈이 되었고, 결국 이 소설은 한 시골 소녀의 문학적 입지전으로 독자들에게 알려졌다.

 

나는 창비가 이 작품에 만해문학상을 주고 신경숙의 문학적 후견인처럼 그의 문학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일찍이 1970년대부터 진보 문학 진영의 맏형 노릇을 해 왔고,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문학적 대응을 선도해 왔던 창비의 선택으로 신경숙이란 카드는 낯설었기 때문이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이태쯤 아이들이 준비하여 발표하는 소설 텍스트가 되었던 작품이다. 나는 수업을 위해서 그걸 다시 읽었는데, 예전의 기억은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작품에도 신경숙 특유의 ‘줄임표’가 군데군데, 잊을 만하면 나타나곤 했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막 봄이 와서,
여기저기 참 아름다웠습니다. 산은 푸르고……푸름 사이로 분홍 진달래가……그 사이……또……때때로 노랑 물감을 뭉개놓은 듯, 개나리가 막 섞여서는……환하디환했습니다. (중략)
저, 저만큼, 집이 보이는데,
저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질 못하고, 송두리째 텅 빈 것 같은 마을을 한 바퀴 돌고도……또 들어가질 못하고…서성대다가 시끄러운 새소리를 들었어요. 미루나무를 올려다보니 부부일까? 두 마리의 까치가, 참으로 부지런히 둥지를……둥지를 틀고 있었어요.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둘이 서로 번갈아 가며 부지런히 나뭇잎이며 가지들을 물어 나르는 것을.
    - 「풍금이 있던 자리」 중에서

 

소설에서 줄임표는 마치 그녀가 버리지 못하는 ‘감상성’의 징표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줄임표는 소설이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감상으로부터 화자가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절제’의 장치처럼 쓰이고 있다. 이 기묘한 균형 사이에 작가는 위태롭게 서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작가 신경숙의 만만찮은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008년 발표한 ‘엄마를 부탁해’를 최단기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리고 최근 다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화제작으로 펴내면서 신경숙은 쉰이 되기도 전에 문학적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하다. 나는 최근작은 물론, ‘엄마를 부탁해’도 읽지 않았다. 나는 일간지의 작품 소개를 통해 그 소설이 IMF 환란 당시에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프레시안 북스> 11호에 실린 오길영의 비평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듯하다.

최근 <프레시안 북스>에 실린 신경숙 비평(☞ 바로 가기 비평가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면신경숙을 부탁해!’ - 신경숙의 베스트셀러와 비평의 위기)은 지금껏 내가 신경숙의 소설에서 느꼈던 불편함과 아쉬움을 아주 명료하게 확인해 준 글이었다.

 

영문학자 오길영 교수의 신경숙 읽기

 

▲ 오길영 교수와 그의 저서(생각의나무, 2008)

충남대 오길영 교수(누리집 http://bloom.pe.kr/)는 문학비평 쪽의 책을 잘 읽지 않는 내게는 매우 생소한 이름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더니 탈근대 문예론, 문화이론, 현대 영미 소설에 관심을 두고 가르치고 연구 중인 영문학자다. 저서로는 『이론과 이론 기계 : 들뢰즈에서 진중권까지』,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공저)가 있다.

 

그는 우리 문단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정실주의’와 ‘주례사 비평’의 한 예로 신경숙의 최근작 두 편을 든다. 그는 ‘신경숙은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에서 이제 대중문학으로 완연하게 넘어갔다’라고 판단한다. 그러면서 그는 신경숙이 작가로서 잃어서는 안 되는 ‘긴장을 잃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현실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냉정함’을 위에서 말한 경계의 근거로 이해하면서 그것은 신경숙의 소설에서 발휘되는 “신경숙 소설의 전매특허인 아름답게 포장된 미문의 ‘감상성’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지적한다. 문체가 ‘사유의 표현’이라면 신경숙 문학에서 문체에서 느낄 수 있는 ‘느끼할 정도의 아름다움은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경숙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사표’라면서 생활인으로서 작가가 아니라, 작가의 ‘정신’이 천사의 시각에 머문다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균열적이고, 위선적인데도 신경숙 소설은 물론, 요즘 한국소설에 진정한 의미에서 ‘악한’이 없다는 것도 한국소설이 처한 곤경의 한 징후로 읽는다.

 

오길영은 신경숙 문학의 문제와 위험성을 그녀의 고유한 문체에서 찾는다. 그의 ‘서정적이고 섬세’한 감상적 문체는 ‘대상에 대해 냉정하고 냉철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할 때, 현실을 관념으로, 관념을 전달하는 유려한 문체로 덮어버리게 된다.’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신경숙이 ‘자기복제의 위험에 빠져 있다고 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 오길영은 자기 누리집에서  2-2.5 개(엄마를 부탁해), 1.5-2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별표를 매겼다. 만점은 5개.

이러한 관점에서 평자는 ‘훌륭한 소설’이 아닌 이 작품들이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반문한다. 그러면서 이를 한국 비평계의 고질병의 하나인 ‘주례사 비평’과 ‘정실 비평’의 좋은 예로 바라보는 것이다. 임규찬과 신형철의 실제 비평을 직접 분석하면서 얻은 그의 결론은 그렇다.

 

“안목이 있는 비평가라고 항상 공감할 만한 글을 쓸 수는 없다. 그리고 임규찬이나 신형철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독할 대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읽기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내가 신뢰할 만한 비평가라고 여겨온 이들조차 이해할 만한 글을 못 쓰는 이유가 혹시 작품 외적인 데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그는 비평가들이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출판사에서 각각 신경숙의 소설을 펴냈다는 사실이 ‘납득할 수 없는 신경숙 론’과의 상관관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거기서 ‘비평의 위기’를 느낀다고 고백한다. 글의 말미는 적어도 정실 비평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 땅의 비평가들에게 섬뜩하게 다가갈 만하다.

 

다시 묻는다. 우리 시대의 비평가들, 당신들은 누구인가? 세간에 떠도는 말대로 출판 자본에 종속되어 수준도 안 되는 작품을 예쁘게 포장해주는 ‘문학 코디네이터’인가? 아니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비평가인가? 신경숙 소설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드는, 한 까칠한 독자의 질문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어정쩡한 습작기를 거쳐 중고생에게 문학을 가르치지만 내가 가진 문학적 소양이란 기실 보잘것없다. 한때는 비평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정작 외계의 언어 같은 현학으로 일관한 비평을 읽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어서 나는 진작에 그걸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프레시안>을 통해 만난 영문학자 오길영은 비록 낯선 평자였지만, 외계가 아닌 ‘세상의 언어’(?)로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와 작가를, 그리고 그를 둘러싼 비평의 문제를 아주 친절하고 분명하게 짚어주었다. 글쎄, 그것은 끝에 쓴 글처럼 그가 ‘까칠한 독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올해는 1학년을 가르치므로 신경숙의 소설을 가르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른다. 어디 모의고사나 언어 영역 문제 가운데서 그의 소설을 새롭게 만날 수 있을지도. 그러나 그때는 불편한 독자로서가 아니라 중립적 문학 교사로서 그의 소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듯하다.

 

 

2010. 10. 26. 낮달

 

그날의 댓글들

호박 2010/10/27 09:03
오길영 교수 글, 저도 같은 독후감입니다.

최근 한 케이블 방송의 ‘슈퍼스타 K’가
심사위원의 점수보다 대중의 문자투표에 더 많은 점수를 주던데
우리 문학도 그렇게 닮아가는 것인지...
대중성이 나쁜 것이기야 하겠습니까만.

신경숙을 대하는 창비의 태도...
최근 표절의혹을 받은 황석영을 감싸는 창비의 태도...
내가 창비를 잘 알지 못했던가... 아쉽더군요.

낮달 2010/10/27 16:20
동감이시라니 반갑습니다. 호박님.
대체로 신경숙의 소설 읽기가 불편했던 이들이 느끼는 것은 비슷한 듯합니다.
그의 만만찮은 작가적 역량이 퇴행이 아니라 발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창비의 입장은 입장대로 이해가 어려운 것은 아닌데 조금 어긋난 부분이 없잖아 있지요.^^

올리브 2010/10/27 10:09
저도 오길영 교수의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더랬지요.
참으로 잘도 짚었구나, 싶어서요.
예전에는 이따금 신경숙의 소설들을 읽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관심권에서 멀어지더군요.
엄마를 부탁해, 는 책장에 꽂혀 있기는 하나 손이 안 가서 그냥 놔두고 있는 중이지요.
언젠가 읽어야지, 했는데 오 교수의 글을 읽은 뒤 그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낮달 2010/10/27 16:22
저는 불편함이라고 했는데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나 관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의 문학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그것대로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그것을 본격문학인 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평자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플라치도 2010/10/27 11:16
저는 신경숙의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아서 패스합니다. ㅡㅡ;;

낮달 2010/10/27 16:23
굳이 비판할 일이 아니라면 안 읽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미의여신 2010/10/27 11:31
대중은 쉽고 눈물에 열광합니다. 노래도 작품성 보다는 트로트를요.
전문가나 글빨 좀 있는 사람은 이게 아닌데 해도 대중은 아니거든요.
쉬우면서 반복되는 리듬에 동화되죠.
오교수님의 지적에는 동감하지만 신 경숙은 대중 소설가죠. 이를테면 주간지에 연재하면 맞는 ...
창비도 실리를 쫓아 간거죠. 뭐.

낮달 2010/10/27 16:24
비평가는 따로 대중문학에 대해 폄하하려는 뜻은 없답니다. 단지 그걸 대단한 문학인 양 인식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지요.
신경숙을 대중작가로 보는 것은 자윱니다만 그는 자신을 대중작가로 매기지 않고 있을 테니 그게 문제인 셈이지요.^^

비단맘단비 2010/10/27 19:19
제목조차 아슴 아슴한 신경숙의 저작물이 무엇이었드라
한참을 생각하다보니 글 내용이 이끄는대로 첨부터 끝까지
좋은 글 모다보고서 즐겨찾기까지 하고서야 갑니다.
모든 만남 하나같이 소중한것 늘 강건하셔서 香福하십시요.

낮달 2010/10/28 17:21
감사~
즐겨 이웃이 되어 주시겠다니 더욱 감사~

청산이 날 부르거든 2010/10/27 21:13
일종의 팬 클럽 같은 건데
은희경을 좇는 그룹도 있다고 들었구요.
출간만 하면 어느 정도의 부수는 확보가 된답니다.
신경숙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던가.
저는 차라리 요즘의 ‘한강’이라든가 ‘천운영’ 등의 소설은 몇 편 읽었습니다.
일종의 극작가 김수현 신드롬 같은 것이겠지요.

낮달 2010/10/28 17:22
은희경도 ‘새의 선물’ 등 초기작은 좋았는데 뒤로 갈수록 자꾸 작위적으로 가는 듯해서 마음이 멀어졌습니다. 재주가 재주에 그치지 않고 지혜로 발전해야 하는데 그런 점이 우리 문학에는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풍경과 시 2010/10/28 01:11
저도 신경숙 소설을 읽은 게 없어서요...ㅎ
저도 그 기사를 봤습니다. 끼리끼리 모여서 주례사 비평 주고 받고 그런 거는 거의 확실한 거 같긴 합니다.

낮달 2010/10/28 17:23
주례사 비평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문학은 늘 그만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듯합니다.
시에도 주례사 비평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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