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열(烈)’과 ‘절(節)’을 가르치며
지난 연말에 고등학교 ‘국어(하)’ 마지막 단원을 배웠다. 단원의 이름은 ‘국어가 걸어온 길’. ‘용비어천가’와 ‘동국 신속 삼강행실도’(삼강행실도)가 실려 있다. ‘용비어천가’가 조선왕조 창건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는 목적시라면 ‘삼강행실도’는 ‘지배층이 백성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실천에 옮긴 책’(강명관, 이하 같음)이다.
지배층이 백성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가상히 여길 일은 없다. 이는 지배세력이 국가권력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전파하고 교화시키는 과정일 뿐이니까.
‘양반 체제는 한글로 된 책을 다양하게 인쇄해 백성들에게 공급하거나, 원하는 백성이면 모두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백성을 무식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통치에 필요한 만큼 적은 지식만을 주입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충·효·열을 실천한 신하와 자식, 아내의 사례를 뽑아 책으로 엮으라는 세종의 명을 따라 만들어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여러 번 언해(諺解)하여 위의 책이 되었다. 교과서에 이 글이 실린 까닭은 중세국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일 뿐 거기 담긴 가치관과는 무관하다. <삼강행실도>가 전하는 ‘충·효·열’은 전근대적 세계관일 뿐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는 ‘충’의 예로 임란 때의 의병장 김천일(1537~1593)과 ‘효열(孝烈)’의 예로 의령현의 여인 ‘석 씨’의 삶을 싣고 있다. 석 씨는 스물에 남편이 죽자 친정 아비가 개가시키고자 했으나 거절하고 병든 시어미를 극진히 봉양했다는 여인이다.
지난해 국어 교과서에도 <삼강행실도>가 실려 있었다. 정유왜란 때 왜적에게 남편과 아들을 잃자 돌을 가지고 덤벼들어 왜적을 죽이고 살해당한 양민 여자 최금의 이야기다. 최금의 열(烈)은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내려서 기렸다.
<삼강행실도>, 국가-남성이 요구한 ‘열녀 이데올로기’
최금이 열녀였다면 석 씨는 효부이자 열녀다. 친정 아비가 개가시키려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녀도 최금과 같이 양민인 듯하다. 사족이 지아비 잃은 딸을 개가시키려 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녀 최금에게 내려진 정문이 석 씨에게는 내려지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최금이 목숨을 버린 데 비겨 석씨는 수절과 효행을 다했지만,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긴 정문은 아니더라도 삼강행실도에 그 존재가 오른 것만으로도 양민 부녀자로서는 황공한 노릇이다.
중세 봉건국가 조선에서 충효열은 국가가 백성들에게 요구한 도덕률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열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된 것으로 여성의 ‘신체’와 ‘생명’을 희생하는 행태를 통해서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강명관 교수는 <열녀의 탄생>을 비롯한 저작들을 통해 이러한 조선시대의 여성 잔혹(殘酷)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삼강행실도> 열녀 편은 ‘열녀(烈女) 이데올로기’ 확산의 도구로 기능했다. 남성보다 우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 등 다양한 사례들이 수록된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 등과는 달리, 거기에 생명과 신체를 희생한 ‘열녀’만 채택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남성-양반이 국가권력이 장악한 인쇄·출판기구를 동원해 남녀 차별과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담은 텍스트를 생산한 후 여성의 의식에 내면화시키는’ 과정이었다는 얘기다.
조선조의 ‘열녀’들이 가문과 가족의 묵시적 강요로 만들어지곤 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열녀’는 고려 말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조에선 <경국대전>에서 배우자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여성의 윤리로 강제하기 시작했다. 재가(再嫁)를 부도덕한 행위로 몰고 수절을 권장했다. 사족의 부녀자가 재가하면 자녀의 관직 진출을 제한했지만, 수절할 땐 정문(旌門)을 내리거나 경제적 이익을 주는 방식이 동원되었다.
남성, 양반으로 대표되는 국가는 남성의 성적 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여성에게는 성적 종속을 강제하면서 그것을 잔혹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조선조 내내 <소학>·<삼강행실도> 열녀 편·<내훈(內訓)> 등이 여성용 도덕 교과서의 앞머리를 차지한 것은 그런 과정이었던 셈이다.
<삼강행실도> 열녀 편은 여성이 어떻게 열녀가 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것은 성적 종속성이 위기에 처할 때 ‘자기 가학적 방법’을 통해 여성이 신체 일부를 희생하거나 자결할 것을 제시하였다. 보통사람은 실천하기 어려운 행위였기 때문에 이는 당연히 ‘열행(烈行)’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조의 가부장제는 임병양란(壬丙兩亂) 이후 17세기 중반부터 완벽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는데, 열녀의식도 훨씬 심화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전과 달리 죽음이나 죽음에 버금가는 희생이 있어야 열녀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의 발발로 여성들이 왜적의 강간, 납치의 위협에 놓이게 되면서 열녀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동국(東國) 신속(新續) 삼강행실도>에는 이 시기에 열녀가 된 441명의 사례를 싣고 있으니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희생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왜적의 위협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열녀의 지위에 올랐다.
재가 금지, 봉건사회의 족쇄
죽어서 영예를 얻었지만 그들의 열행은 남성 중심의 봉건사회를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여전히 ‘과부 개가 금지’의 사회제도는 완고했다. 여성의 재가(再嫁), 삼가(三嫁)가 부자연스럽거나 부도덕한 일이 아니었던 조선 건국 초기에 비하며 엄청난 퇴행이었다.
부녀의 재가를 법으로 금지하고자 한 것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간 고려 공양왕 때부터였다. 그러나 당시의 법은 형식적이어서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고 일반 서민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성종 때에 경국대전에 오른 이 재가 금지의 내용은 ‘사족의 부녀자가 개가할 경우, 자녀의 관직 진출에 제한을 가하는’ 형식이었다.
어느 때 없이 찬반이 있었지만, 성종은 재가 반대론자였다. 그는 “절개를 잃는 것은 큰일이요,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라고 하면서 다수의 재가 찬성 의견을 누르고 과부의 개가에 불이익을 주는 법을 제정한 것이었다.
18세기 이후, 시대의 진전에 따라 다시 재가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늙은 과부와 홀아비를 결합해 주는 일이야말로 목민관이 진정으로 백성을 배려하는 일”이라 주장하며 개가를 찬성했다. 그러나 정조는 “예전의 법을 선뜻 바꿀 수 없고 수절하는 풍습을 바꾸어 개가하도록 하는 것은 좋지 않아 보인다.”라고 하며 소극적 태도를 보이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연암 박지원(1737~1805)도 이 ‘열’의 문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개진했다. 그가 지은 <열녀 함양 박씨전>에서다. <열녀 함양 박씨전>은 연암이 만년에 안의 현감을 지낼 때 지은 한문 소설이다. 아전 출신인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고 난 뒤 자결한 한 여인 ‘함양 박씨’의 죽음에 대해 느낀 바를 적었다.
“우리나라 법전에도 ‘개가한 아낙의 자식은 반듯한 공직에 임명하지 말라.’고 하는 규정이 있지만, 이것이 어찌 여느 백성이나 시골 농사짓는 사람들 때문에 만든 것이겠는가. 우리 왕조 사백 년 동안에 이미 백성이 임금님의 가르침에 깊이 물들어, 여자는 귀하거나 천하거나, 집안이 높거나 낮거나, 과부라면 절개를 지켜서 드디어 하나의 풍속을 이루고 말았다.
옛날의 이른바 열녀라는 것은 요즘의 여느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시골의 어린 아낙이나 도회의 젊은 과부나 친정 어버이가 억지로 다시 시집을 보내려 한다든지 자손들의 벼슬길이 막히는 부끄러움을 당한다든지 하는 일이 없는데도, 혼자 과부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깨끗한 절개라 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스스로 대낮의 촛불을 꺼버리고 남편을 따라 묻히기를 바라며, 물과 불 속에 몸을 던지고, 독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달기를 마치 즐거운 곳을 찾아가듯이 한다. 열녀는 열녀지만 어찌 지나치지 않겠는가.”
- <열녀 함양 박씨전> 중에서
<열녀 함양 박씨전>의 서문에서 박지원은 이미 귀천을 막론하고 너나없이 수절해서 드디어 하나의 풍속이 되었다면서 수절이 여느 아낙이나 청상과부에게 강요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리고 한 늙은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 평생 수절에 필요한 피나는 노력과 눈물겨운 사정의 고백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본능을 절실히 드러낸다.
한 여인의 수절은 엽전의 테두리와 글자를 닳게 할 만큼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혼자 잠 못 드는 괴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엽전을 굴리는 수절과부의 모습을 통해 연암은 여성에게 강요된 윤리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열녀 함양 박씨는 열아홉에 출가했으나 남편은 반년이 못 되어 죽었다. 박씨는 예를 다하여 초상을 치른 뒤 며느리의 도를 다하여 시부모를 섬기다가 남편의 대상 날에 약을 먹고 죽었다. 연암은 그의 죽음을 두고 젊은 과부로 세상을 살아가자면 친척들의 연민을 받고 이웃의 망령된 생각을 면치 못할 것이라 여겨 남편의 상이 끝나는 날 죽어 처음의 뜻을 이룬 점을 기리고 있다.
연암, <함양 박씨전>으로 수절을 풍자
그러나 연암이 이 글을 쓴 것은 박씨의 열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함양군수 윤광석 등 3명이 <박씨전>을 써 그녀를 기렸기 때문이다. 연암은 박씨와 같은 행위를 두고 열을 지키기에 얼마나 피눈물 나는 극기가 필요한가를 역설함으로써 그 지나침을 풍자한 것이다.
결국, 과부의 개가 금지가 풀린 것은 갑오개혁(1894)에 이르러서다. 연암 사후 거의 90년이 지나서였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요구한 폐정개혁의 요구를 받아들인 이 조항은 ‘과부의 재혼은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자유에 맡길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백 년이 훌쩍 지났다. 이혼율이 10%에 육박하고 전체 결혼 가운데 재혼의 비율은 10%를 넘겼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의 재혼이 건수와 비중, 증가 폭에서 모두 남성을 앞선다는 점이다. 또 초혼 여자와 재혼 남자의 결합이 전체 혼인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증가율보다 초혼 남자와 재혼 여자의 결합이 세 배 가까이 높아졌다. 시절이 달라진 것이다.
내 고향 동네에는 청상(靑孀)에 과부가 된 이가 있었다. 아이도 없이 집안에서 양자 하나를 들이고 평생 혼자 산 사람이다. 우리가 스무 살 무렵에 그이는 마흔을 훌쩍 넘어 있었던 듯하니 지금 살아 있으면 여든이 넘었을 것이다. 얼굴에 드리운 짙은 그늘, 수건을 덮어쓰고,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던 그이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이가 시대가 바뀌어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수절의 풍습’을 지킨 마지막 세대였을까.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각인되어 상속되는 국가-남성으로 대표되는 완고한 가부장제는 여전하다. 그건 호주제의 폐지 같은 제도의 변화조차도 그 틀을 쉬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명목상 양성평등을 지향하고 경우에 따라선 ‘여성 상위’를 부르대기도 하지만 실제로 여성의 성적 종속성은 예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끔 매스컴을 달구는 여성들의 성적 일탈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감추고 있는 성적 종속성의 반증일지도 모른다.
<삼강행실도>를 마치면서 교사의 머릿속이 꽤 복잡해진 걸 모르는 아이들은 마치 외계의 이야기처럼 교과서를 멀거니 들여다본다. 하긴,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에게는 중세어로 표기된 글을 새기는 게 더 바쁘겠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과의 작별도 얼마 남지 않았다.
2012. 1.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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