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길윤형의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식민지 시대’를 정리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다. 아주 단순할 듯하면서도 뜻밖으로 꼬이는 게 이른바 ‘친일파’, 부일(附日) 인사에 대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오랜 시간 공들여 내놓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소한도 일제의 권력기관, 군과 경찰, 식민지 관리 업무에 종사한 일정 직위 이상의 관료들 경우에는 친일부역자로 처리하는 데 지장이 없는 듯하다.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되면서 만주국 장교가 된 박정희가 사전에 오른 것이 그 실례다.
조선인 ‘가미카제’,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그런데, 정작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민족문제연구소조차 그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비행기를 타고 미군 함선에 돌격한, 이른바 ‘자살특공대’라 불리는 조선인 ‘가미카제’ 대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일제의 조종사 양성기관에 들어가 일본군 하사관이나 장교로 임관해 연합국 전함을 향한 자살공격으로 전사했다. 이들의 행위는 어떤 기준으로도 ‘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이들은 마땅히 ‘친일파’로 분류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한겨레신문> 길윤형 기자가 쓴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는 ‘일본군 자살특공대원으로 희생된 식민지 조선인’을 본격적으로 다룬 저술이다. 책을 통해서 저자는 “1920년대 초에 태어나 출생과 동시에 일제의 황민화 교육을 받고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10대 중후반의 소년 비행병들에게 ‘친일파’라는 돌을 던지는 것이 온당한가”라고 묻는다.
경남 사천 출신의 특공대원 탁경현(창씨명 미쓰야마 부미히로 光山文博)의 위령비를 사천에 세우는 문제로 불거진 갈등을 전후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은 성명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연구소는 이들이 “철저한 황민화 교육하에서 강요된 지원에 의해 동원돼, 거부할 수 없는 출격명령에 몸부림치다 꽃다운 나이에 비극적 생을 마감”한 피해자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무고한 오키나와현민이나 연합군의 관점에서는 가해자인 성격도 부정할 수 없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연구소는 또 “조선인 특공대원에 대한 진상규명과 역사적 평가를 통해 적절한 방식으로 억울한 원혼을 위로하고 추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마련해 나갈 것을 희망한다.”라고 전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조선인 특공대원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한 언론인의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쟁 말기의 무모한 전술, ‘자살특공대’
정상적인 군대에서 ‘자살특공대’ 따위를 편성하거나 그런 작전을 감행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작전하다 전사할 수는 있지만, 애당초 죽음을 전제하고 짜는 작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작전이 기획·수행되었다는 것은 그 시기가 그런 것을 용인할 수 있는 체제였고 그 시기적 급박성이 높았다는 뜻일 터이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10월, 필리핀 방어를 위한 레이테 해전에서 처음으로 기획, 집행되었다. 절대 열세인 항공 전력으로 미군과 맞서야 했던 일본군은 해군의 항공모함 탑재기 ‘제로센’에 250kg의 폭탄을 실은 뒤 적 항공모함의 갑판에 몸체 공격을 감행하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특공대의 정식명칭은 ‘신푸(神風) 특별공격대’였다. 그러나 당시 아나운서가 ‘신푸’라 음독하는 대신 ‘가미카제’라고 훈독한 이후에는 ‘가미카제’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다섯 대의 비행기로 감행된 첫 출격은 믿기 어려울 만큼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는 불행하게도 자살특공대를 전세 역전을 위한 ‘필승의 전술’로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중략]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런 우리의 하늘이여
- 서정주 <마쓰이 오장 송가>(매일신보 1944. 12. 9.) 중에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모두 17명이다. 서정주의 친일시 <마쓰이 오장 송가>의 주인공인 인재웅이 첫 희생자였고 1944년 6월 오키나와 주변 해역에서 사망한 한정실이 마지막 전사자였다. [관련 글 : 서정주, ‘친일은 하늘뜻에 따랐다’? / 레이테만 전투와 마쓰이(松井) 오장의 행방]
마지막 희생자는 본명 불상의 야마모토 타츠오(山本辰雄). 그는 특공기 방화범으로 몰려 해방 일주일 전인 1945년 8월 8일 총살되었다. 그가 방화범으로 몰린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야마모토 타츠오뿐 아니라, 이들 특공대원의 죽음은 일본을 위한 전쟁에 자원 참전, 목숨을 바친 조선인 청년들의 죽음을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걸 역설적으로 시사해 준다. 이들의 ‘원수의 나라’를 위해 군인이 되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 죽음이 일제가 원했듯 ‘천황을 위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본군이 비행기 조종사를 충원하는 통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하여 육군 특별조종 견습 사관(특조), 육군 소년 비행병(소비) 등 셋이었다. 육사를 졸업한 조선인 특공대원은 최정근(56기)뿐이고 나머지는 특조 출신의 장교나 소비 출신의 하사관이었다.
열일곱 명의 조선인 가미카제들
특공대원 가운데 첫 전사자인 인재웅(창씨명 마쓰이 히데오 : 松井秀雄)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인 소학교를 다니며 전형적인 황민화 교육을 받았다. 그는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때문에 일기 시작한 항공열에 들떠 지내다가 소년 비행병이 되었다.
그는 1944년 11월 29일 여섯 명의 대원과 함께 출격해 레이테만에 정박 중이던 미군의 수송선단에 몸체 공격을 감행해 숨졌다. 그의 공격으로 연합군의 함선이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소심하고 정 많던 소년 인재웅은 스무 살의 생애를 마감하는 대신 일제에 의해 ‘반도의 영웅’으로 기려졌다.
경흥의 수재였던 최정근이 일본 육사를 나와 가미카제 특공대원이 되었듯 특공대원이 되었던 젊은이들은 대부분 식민지 조선의 유능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일본군 비행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런 선택도 궁극적으로 차별로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
이들은 육사와 특조, 소비를 통해 비행사가 되었지만, 신분적 차별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며 그예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비행기 조종사는 그들의 선택이었지만 ‘자살특공대’는 그들의 자발적 선택은 아니었다.
가미카제가 되었지만, 이들이 일제가 원했던 것처럼 ‘천황’을 위해서 죽은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 것 같다. 자신의 선택으로 일본군이 되었지만, 조국을 식민지로 만든 천황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육사 출신의 특공대원 최정근은 ‘천황을 위해 죽을 수 없다’는 전언을 남겼다. 탁경현과 김상필, 윤응렬은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아리랑’을 불렀다고 했다. 최연소 특공대원이었던 박동훈은 부친에게 ‘동생들은 절대 군에 보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일본인 동기에게 그렇게 말했다.
“내선일체라고 말하지만 거짓말이야. 일본은 거짓말쟁이야. 나는 조선인의 배짱을 보여 줄 거야.”
그것은 결국 그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을까. 자신의 모순적 선택을 정당화하는 남루한 명예였을까. 17명의 조선인 가미카제가 희생되고 나서 일본이 무조건항복 하면서 태평양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이 곤혹스러운 젊은이들의 선택은 역사적 과제로 남았다.
‘깻잎 한 장’의 두께로 갈린 운명
‘운명은 깻잎 한 장 정도의 두께로 갈렸다.’ 일본군 비행기 조종사로 특공작전에 나가 전사했던 특공대원들은 ‘친일파’가 되었지만 살아 돌아온 이들은 신생 대한민국의 ‘항공계 아버지’가 되었다. 최연소 특공대원이었던 박동훈의 소년 비행병 동기 가운데 공군참모총장 셋, 작전사령관 다섯, 공군사관학교장 넷이 배출된 것이다. 인생은 참으로 얼마나 역설적인가.
조선인 특공대원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없다. 지금까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 피해 사실을 인정해 달라고 서류를 낸 이는 최정근, 박동훈, 인재웅, 노용우 등 넷뿐이다. 이 가운데 육사 출신인 최정근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유족이 지원 신청을 철회했고 박동훈과 인재웅은 피해자로 소정의 위로금을 받았다.
노용우는 ‘일본군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한 경우로 위로금 지급 대상에 제외되었다. 박동훈과 인재웅이 하사관(오장)이었던 반면에 노용우는 경성법전을 나온 특조 1기 출신으로 소위로 임관해 전사했기 때문이다.
국군의 수뇌부를 역임한 일본 육사 출신 ‘친일파’들의 인생유전의 한가운데에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도 있다. 그는 한편에선 조국 근대화를 이룬 불세출의 지도자로 기려지지만 다른 한편으론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을 선명하게 올린 ‘친일파’다.
박정희는 사범학교를 나와 소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칼 찬 군인’이 되고 싶어 만주로 갔다.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으로 신경군관학교에 지원했고 뒤에 일본 육사를 나와 만주국 장교가 되었다.
태평양전쟁의 종전이 다소 미루어졌다면 앞서 다룬 사람들의 운명도 다시 한번 뒤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살특공대로 자신의 목숨을 오키나와 인근 해역에 버린 사람이 더 늘 수도 있었을 게고 신생 독립 조국에서 영화를 누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삶과 운명은 깻잎 한 장의 두께로 갈렸다.
다행히 종전되면서 살아서 돌아온 소년 비행병 출신의 민영락은 특공대에 배속된 직후인 1945년 5월에 어머니의 엽서를 받았다. 그러나 한글을 모두 잊은 그는 엽서를 읽을 수 없었고 일본어로 답장을 써 보내고 몹시 울었다고 했다. 민족 정체성마저도 부정하고 말살하고자 한 일제 식민지배가 가져온 비극이다.
과거의 역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시나브로 화석이 된다. 35년이 넘는 식민지 시기의 기억은 근대사 교과서에서 삭아가고 청산하지 못한 그 시기 역사 앞에 우리의 현재는 참으로 남루하다. 뉴라이트들의 ‘식민지 근대화론’ 따위가 공공연히 운위되는 이 21세기에 다시 되돌아보는 우리 근대사는 아직도 아프고 쓰리기만 하다. [관련 글 : 논란의 <한국사> 교과서, 정부의 직무유기]
2012. 4.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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