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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세시 풍속·24절기 이야기

한가위, 슬픈 풍요

by 낮달2018 2022.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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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 단장한 청상(靑孀)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默示)하는 축제나 아닐는지.

얼마 되지 않아 달은 솟을 것이다. 낙엽이 날아내린 별당 연못에, 박이 드러누운 부드러운 초가지붕에, 하얀 가리마 같은 소나무 사이 오솔길에 달이 비칠 것이다. 지상의 삼라만상은 그 청청한 천상의 여인을 환상하고 추적하고 포옹하려 하나 온기를 잃은 석녀(石女), 달은 영원한 외로움이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검은 명부(冥府)의 길손이다.
          - 박경리, 『토지』 제1부 제1편 ‘어둠의 발소리’ 중에서

 

한가위, 이 땅의 사람들은 한 해의 가운데 달의 보름날, 그 청정한 만월과 함께 풍요의 제의를 가꾸어 왔습니다. 달의 운행을 중심으로 천체와 자연의 순환을 파악해 온 태음력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작가 박경리 선생의 지적처럼 ‘온기 잃은 석녀’, ‘영원한 외로움이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검은 명부의 길손’으로 비유되는 달에서 연유된 축제를 풍요의 상징으로 가꾸어 온 까닭은 무엇일는지.

 

역학(易學)에서 태양이 양(陽)으로 표현되는 데 반해 달은 음(陰)으로 이해되는데, 그것은 여성의 존재가 음으로 이해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음으로서의 여성이 갖는 위대한 힘은 그 모성을 통한 생산력이지요. 종족보존을 가능케 하는 회임과 출산의 능력은 물리적 생존을 가능케 한 땅의 생산력, 작물의 생장·수확과 똑같은 가치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대지를 여성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뿌리에는 바로 땅의 생산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달을 풍요의 상징으로 만들어 온 것은 달을 통하여 농경의 시종(始終)을 가늠하고 달의 여성성을 경외해 온 선인들의 세계관에서 말미암은 것일 터입니다.

 

 

비싼 제수를 마련코자 저자에 나온 서민들의 마음과 발길은 무겁지만, 소찬으로 이루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제의)’은 저마다의 고단한 삶을 위무하는 따뜻한 손길이 될지도 모를 일. ‘핏줄의 둥지’에서 거듭 확인하게 되는 가족의 유대와 애정만으로도 이 한가위는 참으로 넉넉할 터입니다.

 

 

2007. 9.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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