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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퇴직일기

퇴직 기념 나라 밖 여행

by 낮달2018 2019.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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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기념으로 나라 밖 여행을 다녀오다

아내와 함께 7박 8일 동안 국외 여행을 다녀왔다. 몇 해 전부터 장거리 국외여행으로 퇴직을 기념하겠다고 생각해 온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른바 직판여행사를 통한 패키지 상품으로 파리와 스위스, 그리고 이탈리아를 도는 여정이었다.

 

한동안 나라 밖 여행은 ‘남의 일’이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는데 여행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집을 떠나서 낯선 고장을 다니고 거기서 새로운 문물을 만나는 것을 즐기는 편이지만 나는 국외 여행에 비교적 덤덤했다. 무엇보다 그걸 쉽게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생활에 여유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국외여행이 일이십만 원으로 치러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해외여행은 우리가 학교를 떠나야 했던 1989년에 자유화되었었다. 일본의 나라(奈良) 교원조합과 결연하고 있었던 전교조 경북지부에서는 해를 걸러 일교조와의 상호 교환 방문을 시행하고 있었다. 인원의 제한은 있었지만, 누구나 소정의 경비로 일본을 다녀올 수 있었다. 주변 동료들이 다투어 일본을 다녀올 때도 나는 우정 그걸 남의 일로나 여겼다.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했다면 섭섭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상하게도 한 번도 그게 당기지 않았다. 복직하고 나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나는 아직도 예의 교환 방문에 참여해 보지 않았다. 조합에 전임하면서 일교조의 손님을 접대하는 일까지 맡았지만, 이후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한 번도 거기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알았던 아내가 언짢아했지만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을 우회하는 백두산 답사 붐이 이어질 때도 나는 여전히 멀찌감치 그걸 지켜만 보고 있었다. 내가 아직도 용정을 찾지도, 백두산을 만나지도 못한 이유다. 운 좋은 동료들은 해외연수 프로그램으로 외국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내겐 그런 기회도 없었다.

 

유일하게 나랏돈으로 다녀온 여행은 금강산이다. 2006년 2월 말께 시행된 금강산 연수는 국어와 사회과 교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나도 거기 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월의 개골(皆骨)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나눈 교감의 시간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관련 기사 : 2006 겨울과 봄 사이, 금강산]

 

내 국외여행은 몇 해 전에 처음 이루어진 이래 두어 차례 이어졌다. 식구들을 데리고 이웃 나라 몇 군데를 돌아본 여행은 대체로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러나 여행 후의 만족감이 거기 들인 비용을 상쇄할 만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국외여행을 비용의 문제로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퇴직을 준비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약속했다. 나오면 어디 유럽이라도 다녀오자고. 연금으로 살아가면서 나라 밖으로 나가는 건 더 어려워질 터, 퇴직 기념으로 한 차례 장거리 여행을 다녀오는 거로 큰돈이 드는 여행은 마무리 짓겠다는 속셈이었다. 가까운 나라로 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퇴직 기념으로 떠난 유럽 여행

 

퇴직하고 나서 생활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은 아시는 대로다. 아내는 두 달 넘게 감기에 시달렸고 나는 나대로 심리적 불균형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되면서 4월 초로 예약해 두었던 출발 일정을 중순으로 미루어야 했다.

 

3월 말께 다소 숙지는가 싶던 아내의 기침은 4월 초순이 지나도 멎지 않았다. 나는 예정된 날짜에 출발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떠올리면서 조바심을 냈다. 이미 출발 날짜가 보름 앞이어서 예약을 취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4월 둘째 주를 넘기면서 아내의 기침도 잦아들었고 기분도 호전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간신히 내쉬었다. 여행사에선 모객(募客)이 여의치 않자, 내가 예약한 날짜보다 이틀 후의 상품을 권했고 나는 시간을 버는 셈이어서 그러기로 했다.

 

내가 예약한 상품의 일정은 외국 항공사 편으로 로마로 갔다가 로마에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틀 후의 상품은 국적 항공사 편으로 파리로 들어가 취리히로 나오는 경로였다. 아무려나, 나머지 일정은 그대로니 굳이 그걸 시비할 일은 없었다.

▲  에펠탑 위에서 내려다본 파리 .  중심부에 센강이 흐르고 있다 .  파리는 근대가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였다 .
▲  고대 로마 유적지인 포룸 로마눔 (Forum Romanum)  전경 .  포룸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
▲  베네치아는 말뚝으로 받친 도시 ,  물 위에서  1500 년 버틴 물의 도시다 .  본섬 선창에서 바라본 풍경 .

떠나는 날까지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했던 아내는 떠나는 날엔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지난 15일 새벽, 우리는 공항리무진 버스로 인천공항으로 갔고, 오후 1시 비행기로 출국했다. 비행기가 파리에 닿는 데는 12시간이 넘게 걸렸다.

 

장거리 비행을 넉넉히 견딜 만큼 건강할 때 여행을 다녀야 한다는 이웃들의 조언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레버넌트(revenant)>와 <스포트라이트(Spotlight)> 등 무려 네 편의 영화를 감상했다.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리하지 않고는 시간을 견디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리고 일주일여에 걸친 여행은 순조로웠다. 숙소가 다소 아쉬웠고 버스로 장거리를 이동하는 게 만만찮았지만, 화면에서나 만나던 이국의 풍광과 명승이 그 수고를 상쇄해 주고도 남았다. 비슷한 풍경과 정서의 이웃 나라에 비길 수 없는 낯섦이 장거리 여행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출발하여 루브르박물관, 에펠탑과 개선문을 도는 동안 파리의 낡고 어두운 거리를 지나며 나는 막연하게나마 거기 담긴 문명의 의미를 잠깐 생각했다. 열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이른 스위스 루체른, 산악열차로 리기(Rigi)산을 오르며 한 약소국가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상상해 보았다.

 

밀라노와 피렌체, 로마와 베네치아의 오래된 유적들을 찾으며 나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착시를 느끼곤 했다. 유럽대륙을 풍미했다 쇠망해 버린 한 고대국가의 흔적을 더듬으며 아둔한 머리로 인류 문명사의 맥락을 돌이켜보곤 했다. 이 여정과 견문은 따로 여행기로 쓸 작정이다.

▲ 리마트 강변에 있는 스위스 최대의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인 그로스 뮌스터 (Gross munster)  대성당 .

전체적으로 볼거리는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럴 수가 있었다면 나는 거리나 시장, 공원 따위를 어슬렁거렸을 것이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지평선과 잘 정리된 논밭, 밀과 유채밭 따위의 풍경 앞에서 버스를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창 너머로 그것을 일별하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인솔자가 지적대로 우리의 여행은 ‘요점정리’였다. 짧은 일정에 더 많은 유적과 명승을 찾는 방식이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라는 게 여행사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촉박한 일정을 다투어 보다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적지 않은 경비를 들여 찾아온 국외여행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이라는 걸 그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다

 

여정이 빡빡한 데다가 말도 글도 낯선 외국이다. 견문에 대한 정보는 전적으로 현지 안내원의 해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정작 스쳐 지나온 유적들에 대한 이해는 얕을 수밖에 없다. 돌아와 사진 속의 유적들을 바라보며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머리를 주억거리며 해설을 들었지만 정작 그 이름마저도 헷갈리는 경우가 적잖아서다.

 

여행 자체를 심드렁해 했던 아내도 여행의 내용에 대해선 만족했다. 지면이나 화면을 통해서나 만나던 역사와 유적들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느낌은 신선했다. 2천 년의 시간이 압축된 로마의 판테온 신전의 돌 앞에서 나는 역사의 압도적 중력을 느꼈다. 그것은 인간과 그 문명에 대한 외경감 같은 것이었을까.

 

돌아오는 비행기는 갈 때보단 두 시간쯤 덜 걸렸던 것 같다. 누적된 피로 탓이었을까. 아내와 나는 비행기에서 7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내내 잤다. 깨어나서는 개인 모니터를 통해 케이트 블란쳇과 로버트 레드퍼드가 주연한 영화 <트루스(Truth)>(2015)를 흥미롭게 시청했다.

 

오후 3시에 인천에 닿았지만, 공항 리무진버스를 타고 귀가하니 밤 9시가 겨웠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우리 내외는 지난 여행을 돌아보았다. 이번 여행, 괜찮았지? 좋았어요, 강행군이긴 했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어. 고마워요.

 

▲  파리에서 맞은 첫 아침 식사

아내는 마지막에 들른 스위스 취리히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거기 머문 시간은 고작 두어 시간일 뿐인데도 그랬다. 리마트 강가에서 만난 한국 관광객들도 스위스가 ‘너무 좋다’고 말했다. 주로 유적지를 돌아다니다가 모처럼 밝고 깨끗한 도시와 시민들의 모습을 만나서였을까.

 

나는 아내에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스위스 여행을 한번 해 보자고 말했다. 그러나 글쎄, 다시 이렇게 장거리의 국외여행을 나갈 일이 다시 있기나 할까, 나는 미심쩍기만 했다. 장거리 여행을 너끈히 견딜 만한 건강과 생활의 여유를 지켜나가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을 터이므로.

 

호텔에서 아침마다 나오는 빵에 질렸던 우리는 딸애가 마련해 놓은 된장과 상추쌈으로 반갑게 식사를 했다. 역시 제집이 좋고, 제 나라가 편한 것이다. 제 음식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라 밖 여행이 가르쳐 주는 건 그런 지극히 원초적인 깨달음도 있는 것이다.

 

어제, 나는 찍어 온 사진을 정리했다. 천오백여 장이 넘는 사진 가운데 몇 컷이나 마음에 찰는지. 이제 남은 것은 사진 속의 여정을 복기하는 일이다. 가능하면 나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천천히 여행기를 쓸 작정이다. 그 과정에 서양사의 일부라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건 덤이라고 여겨도 좋으리라.

 

 

2016. 4.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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