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옛 ‘전우’
지난 7일, 4·3 70주년 국민문화제에 참석한 날, 밤에 1978년부터 1980년까지 군대 생활을 같이한 옛 동료 ‘허(許)’를 만났다. 그는 정보과, 나는 인사과 행정병으로 일과 중에는 다른 공간에서 근무했지만, 일과가 끝나면 대대본부 내무반에서 같이 생활한, 군대식으로 말하면 ‘전우’다.
신병 교육을 같이 받은 것도, 공수교육이나 특수전 교육을 같이 받은 동기도 아니었다. 입대는 내가 한 달쯤 빨랐지만 비슷한 시기에 입대한 작전과 행정병 ‘김(金)’과 함께 우리는 동기로 지냈다. 더러 술도 같이 마셨고, 동기끼리 나눌 수 있는 이런저런 사연을 주고받으면서 삭막했던 시절을 함께 이겨냈다.
38년 만의 해후
허는 나처럼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 바로, 김은 3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교련을 이수하여 6개월 복무 단축 혜택을 받은 김은 1979년 후반기에 제대했고 우리는 이듬해에야 만기를 채우고 전역했던 이유다. 김을 배웅하면서 우리는 일종의 박탈감을 공유했던 것 같다.
두 친구 다 호남 출신이었지만, 나는 같은 영남 출신들보다 이들과 훨씬 더 친하게 지냈다. 허는 전북 부안, 김은 전남 승주 출신이었다. 아마 내가 둘보다 훨씬 심하게 영남 사투리를 썼겠지만, 나는 둘이 잘 쓰는 사투리로 이들의 이름을 대신 부르기도 했다. ‘긍게’와 ‘나가’를 입에 달고 있어 나는 둘을 각각 ‘허긍게’, ‘김나가’로 부르기도 했다.
1980년 2월과 3월에 나와 허가 제대한 뒤 우리는 한 몇 년 동안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나누었다. 대학에 돌아간 허와 나는 새로 대학 생활을 시작했지만 김은 1년 후 공대 토목과를 졸업, 어떤 공기업에 취업하고 곧 결혼했다. 4년 후,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여학교 국어교사로 임용되었고, 그는 어떤 기업에 들어갔다. 이는 죄다 주고받은 편지로 알게 된 사실이다.
어느 날부터 소식이 끊어졌는데 왜 그랬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살아가는 일이 너무 바빴거나 고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줄여 주지 못했던 시대였다. 꼭 그래서가 아니라도 우리네 삶에 소식이 끊어지는 일이 어디 한둘인가 말이다.
내가 다시 그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은 2010년 겨울, 그러니까 2011년 2월이다. 벗들과 전북 부안에 들러 지역 문화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을 만나서 보낸 2박 3일의 여정에서다. 나는 혹시 싶어서 지역 토박이인 정 선생에게 혹시 ‘허’를 아느냐고 물었다. 문득 그의 주소가 부안이었던 걸 기억하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그는 단박에 자신의 친구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관련 글 : 우정과 연대 - 변산, 2010년 겨울]
그날 밤 나는 정 선생을 통해 알아낸 전화번호로 그와 해후했다. 이튿날에 다시 통화하면서 녀석은 밤새 만나 소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운 것은 때로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언제 서울에 가면 연락하마고 했지만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시골 사람이 서울 가는 건 흔치도 않지만, 간다 해도 치를 소관이 한두 가진가 말이다.
모두 예사롭지 않은 삶,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7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중간에 몇 차롄가 연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동안 나는 퇴직했고, 은퇴자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지만, 허는 예사롭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가 보았다. 그는 그동안 폐암과 대장암,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한 번도 아니고 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다니!
다행히 그의 장남이 의사라고 했다. 어쨌거나 이 나라에선 의사 아들을 둔 아비는 훨씬 수월하게 암 수술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둘 다 다른 부위로 전이되지 않은 초기 상태였고 수술도 잘 됐다고 했지만, 그 투병 과정이 힘겨웠으리라는 건 겪지 않은 사람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있다고 했다. 거참, 그런 병을 앓고 나면 스스로 건강을 챙기려 할 터인데……. 머리를 갸웃하면서 나는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를 상상해 보았다.
그는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그런 그의 성정은 그의 온화한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고지식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얼렁뚱땅’인 사람도 전혀 아니다. 호남 사투리를 섞어서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내가 실속도 없이 거칠고 성마른 모습으로 일관했다면 그는 늘 차분하고 조용했다. ‘안존(安存)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이랄까. 술을 마셔도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았다. 나와 김은 술기운에 호기로워져서 언행이 넘치기도 했지만, 그는 취한 상태에서도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웠던 친구였다.
애당초 나는 그를 다음날 점심 때쯤 만나서 밥이나 먹을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는 큰 수술을 두 차례나 받은 이가 아닌가. 그러나 밤 8시쯤에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당장 내게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기어코 왔다. 나는 회기역 앞에서 그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미소지으며 악수했다.
“몇 년 만이야? 이게.”
“제대하고 처음이지? 스물다섯에 제대를 했으니, 예순셋, 38년이 지났어.”
그렇다. 중간에 가끔 통화하긴 했지만 만난 건 꼭 38년 만이었다. 우리는 이면도로의 한 술집으로 가서 안주를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한 시간 남짓, 우리는 소주 2병을 비우면서 서로에게 부재했던 세월의 삶을 토막토막 나누었다.
그는 내게 살이 오른 모습이 예전보다 보기 좋다고 말했고 나 역시 그에게 옛날 모습이 남아 있지만, 그때보다 더 좋아 보인다고 했다. 하긴 그때도 그는 얌전한 얼굴이긴 했다. 지금은 머리숱이 빠져 이마가 더 넓어졌지만, 그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말하는, ‘인물’ 좋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가 쌍꺼풀진 큰 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는 맞춤한 양복 차림이었다면 곱게 늙은 대학교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세련된 모습이었다. 살빛이 희지 않다는 것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여린 심성의 그가 서울에서 산 세월을 우정 생각했다.
“그려. 정말 열심히 살았어.”
내가 그랬듯 정말 그도 열심히 살았다. 그는 가정을 건사하면서 10년 가까이 신장 투석을 해야 했던 부인을 보살폈고 얼마 전에 신장 이식 수술까지 마쳤다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의학 공부를 하는 아들 뒷바라진들 쉬웠을까. 요즘은 아픈 부인 대신 가사노동이 주요한 일과인 모양이었다.
지금 지방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하고 있는 장남은 곧 결혼도 한다고 했다. 며느리 될 사람도 같은 의사라고 했다. 어쨌든 그가 열심히 살아온 만큼, 자식들이 노후를 책임져 줄 수 있을 터이니 다행한 일이다.
엽서를 받고 싶다는 친구……, 그러나
우리는 40여 년 전의 병영을 화제에 올렸지만 그건 이어지다 끊어지곤 못했다. 그건 어쨌든 강산이 변할 만큼 오랜 세월이 아니던가. 그가 문득 내가 더러 쓰곤 하던 잔글씨로 빽빽하게 채운 엽서 이야기를 꺼냈다.
“나, 그 엽서를 한번 받을 수 없을까.”
그랬다. 겉멋을 잔뜩 부려 빽빽하게 쓴 엽서를 벗들에게 보내기 시작한 것은 고교 때부터다. 스무 살 넘어서 그건 유일하게 내가 마음을 붙였던 일이기도 했다. 병영에서도 나는 그 엽서 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그걸 기억하고 있을까. 제대 후에 그런 엽서를 그에게도 보냈던가는 기억에 없다.
물론 나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걸 받아들이기엔 우리는 성큼 늙어버린 것이다. 젊은 시절에야 이런저런 사연으로 채울 수 있었겠지만 이제 공백을 채울 만한 이야깃거리가 어디 있겠으며, 침침해진 눈으로 무얼 쓰겠는가 말이다.
그는 술을 더 하자고 했지만 나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했다. 어쨌든 수술을 두 차례나 한 친구, 술로 무리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물론 다음 기회가 언제가 될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몇 년이 쏜살같이 흘러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밤 10시 넘어 바람 부는 거리에서 우린 헤어졌다. 나는 담배를 끊으라고 권하고 그가 택시를 타는 것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이 글을 쓰기 전에 그와 잠깐 통화했다.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그에게 나는 다시 연락하마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4월 말께 서울 갈 일이 있다. 그때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그는 어쨌든 내가 스쳐온 내 젊음의 한때를 공유한 친구, 가능하면 짬을 내 볼 작정이긴 하다. 사람은 자주 만나지 않으면 잊기도 하고, 관계를 이어나가기도 쉽지 않은 게 세상의 이치이니 말이다.
2018. 4.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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