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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퇴직일기

‘삼식이’의 ‘혼밥’

by 낮달2018 2019.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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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생활자의 혼자 밥 먹기

한때 ‘남편과 아내에게 필요한 것 5가지’라는 유머가 유행한 적이 있다. 내용인즉슨,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돈, 건강, 자녀, 일, 친구’(또는 돈, 건강, 딸, 강아지, 찜질방) 등 실제 노후 생활을 유지하는 데 긴요한 것인데 반해 남성에게 필요한 것은 ‘부인, 마누라, 애 엄마, 집사람, 아내’ 등 호칭만 다르지 아내 하나뿐이라는 얘기다.

 

‘남편에게 필요한 5가지’

 

노후를 맞이하면서 인간관계의 변화는 남녀 간에 차이가 크다. 남성의 인간관계는 소득 활동을 하는 시기에는 다양하고 깊지만, 은퇴를 기점으로 서서히 그 폭이 좁아지면서 약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는 배우자의 은퇴를 기점으로 관계 유지를 위한 활동이 오히려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배우자의 은퇴 시기가 자녀 교육이 완료되는 시점과 맞물려 있어 가사노동과 자녀 교육에서 벗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 <새전북신문> 삽화

이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유머는 바로 이러한 남녀의 인간관계 변화를 풍자하는 우스갯소리다. 퇴직 시기까지 오직 가족을 위해 한눈팔지 않고 달려온 가장들에게 남은 거라곤 배우자밖에 없다는 얘기니 말이다.

 

이 유머의 후편 격으로 이어진 게 ‘남편의 식습관’이라는 우스개다. 이 유머도 베이비 붐 세대의 퇴직 러시와 맞물리면서 한편으로 절대 공감을 얻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의 비애’라는 페이소스를 한껏 드러내기도 했다.

 

일 나가는 대신 집에서 끼니만 챙기는 남편은 성가시고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 평생 가족들 벌어먹인다고 고생한 남편에 대한 짠한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종일 집안에서 얼쩡거리는 남편의 존재가 아내의 노후 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유머는 집에서 몇 끼를 먹느냐를 기준으로 남편을 아주 모질게 평가하고 있다. 일단 집에서 한 끼도 안 먹는 남편은 ‘사랑스러운 영식(零食) 씨’다. 한 끼를 먹는 남편은 ‘귀여운 일식(1食) 씨’, 두 끼 먹는 남편은 ‘사랑해 줄 두식(2食) 씨’다. 그나마 남편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건 여기까지다.

 

집에서 세끼를 먹는 ‘삼식(3食)’이는 ‘삼시 쉐끼’다. ‘세 끼’를 욕설의 형식으로 비튼 것이다. 그러나 세 끼는 약과다. 세 끼를 먹고 간식도 먹는 남편도 있다. 이들은 ‘간나 쉐끼’가 된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세 끼에, 간식에다 야식까지 먹는 남편은 ‘종간나 쉐끼’가 되는 것이다.

 

이 우스개에 담긴 여성의 불만도 대수로이 볼 건 아니다. 평생 집안일에 치여 살다 겨우 자녀 출가시키고 쉬려 하는데, 남편을 위하여 끼니마다 밥상을 차려야 하느냐는 아내의 항변은 충분히 ‘이유 있지’ 않은가.

 

마침내 ‘삼식이’가 되다

 

퇴직을 앞두고 아내에게 나는 삼식이는 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설사 집에서 세 끼를 먹더라도 당신을 성가시게 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했다. 까짓것, 내가 찾아 먹으면 될 거 아니여?

 

나는 아내에게 정말 제대로 얻어먹으며 살아왔다. 음식 솜씨가 좋기도 했지만, 처자식 빌어 먹인다고 고단한 서방을 챙겨줄 사람이 자기밖에 더 있겠냐는 게 아내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퇴근 무렵에 전화를 걸어서 국수나 부침개를 먹고 싶다고 하면 아내는 두말없이 식탁에 그걸 올리곤 했다.

 

가끔 아내에게 그동안 정말 잘 먹여주어서 고맙다고 진심으로 치하하는 이유다. 거안제미(擧案齊眉)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내는 성심으로 나와 아이들의 밥을 챙겨주었다. 그런 아내에게 퇴직 뒤에 밉상을 대는 일은 마땅히 피해야 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내외의 생활은 뒤바뀌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나는, 대부분 집에서 지냈고, 아내의 사회생활은 예전과 다르지 않게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주일에 하루 남짓 외출하는 데 그치는 데 비기면 아내는 집에 있는 날이 오히려 적었다.

 

▲ 혼자 먹는 밥. <한국일보> 삽화

외출한다 해도 일과 중에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도서관이 고작이다. 친구들은 멀리 있고, 후배들은 근무 중인 것이다. 퇴근 후에도 이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나야 남는 게 시간뿐이지만 이 친구들은 여전히 바빴기 때문이다.

 

내게 오는 전화는 뻔한 편이지만 아내의 전화는 종일 바쁘다. 단체 카톡도 밴드도 꽉 찼다. 지역의 교회 조직을 맡으면서 이런저런 일로 예정에 없는 외출도 잦다. 외출 대신 서재로 출근(?)하면 되는 나는 아내가 못다 한 집안일을 하나씩 맡아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 후에 아내가 외출할 일이 있으면 나는 자청해 설거지했고, 아내가 떠난 빈집의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서(세탁기 사용법을 배웠다.) 널었다. 남자가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다니는 게 거시기하다며 시키지 않던 음식물 쓰레기 처리도 마다치 않고 한다. 한밤에 음식물 쓰레기 처리는 대체로 내 몫이 되었다.

 

그런 집안일을 하는 게 그다지 힘들지도 귀찮지도 않았다. 글쎄,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기보다 그렇게라도 몸을 움직이는 게 한결 나아서일까. 그러다 보니 가끔 아내가 있어도 빨래를 너는 일을 내가 대신하기도 한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면서 한참씩 창밖을 내다보기도 한다.

 

아침과 저녁을 집에서 먹는 건 퇴직 전이나 마찬가지니 이를 일이 없다. 문제는 점심이다. 나는 내가 알아서 찾아 먹겠다고 했지만, 집에 있는 아내가 나 몰라라 하고 있지는 않는다. 본인이 점심 생각이 없어도 마지못해 나와서 밥상을 본다. 그럴 때, 나는 삼식이가 된 게 미안해 공연히 흰소리를 늘어놓는다.

 

한동안 아내의 외출이 잦을 때는 혼자서 밥을 차려 먹을 때가 많았다. 냉장고의 반찬을 꺼내 식탁에 차려놓고 밥을 퍼서 먹고 식탁을 닦고 설거지를 하는 일련의 일이 꽤 성가신 일이지만 나는 군말 없이 그걸 했다. 아내의 귀가가 늦어질 때면 밥을 안쳐 뜸을 들여놓기도 했다.

 

당신과 나의 ‘혼밥’

▲ 혼자 밥 먹기나 술 마시기는 이 시대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드라마 <혼술남녀>의 한 장면.

혼자서 하는 식사, 흔히들 ‘혼밥’이라고 하지만 내게 그건 그리 서글픈 일은 아니다. 물론 아내가 정성 들여서 차려주는 밥상에 댈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때가 되면 비교적 무심하게 식사 준비를 하고 혼밥을 치러낸다.

 

혼자서 밥상 차리는 게 성가셔서일까. 대체로 약식으로 밥상을 차리니 식사도 가벼워진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홀로 된 노인들이 끼니를 치르는 방식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어쩌다 하는 혼밥이 아니라 일상이 혼밥일 수밖에 없게 되면 식사는 즐거움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새해 들면서 아내의 외출이 뜸해졌다. 둘이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시간도 늘어났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새삼스럽게 노화를 확인하기도 한다. 글쎄, 마뜩지는 않지만 나이 듦에 수반하는 몸의 변화를 어찌할 것인가.

 

그래도 건강하게 나이를 먹고 나이 들더라도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 날이 가능하면 오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먼저 떠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남은 사람이 혼자서 끼니를 이어야 하는 때가 더디 오기를.

 

혼자 남아서 끓이고 치러내야 하는 혼밥에 비기면 지금의 혼밥은 우리가 건강해서 누리는 축복이다. 어느덧 점심때가 겨웠다. 거실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내가 시장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른 아침을 먹었으니 때가 되긴 했다.

 

 

2017. 1.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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