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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순국(殉國)

[순국]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

by 낮달2018 2019.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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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8월 11일, 고헌 박상진,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어 순국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백운대 등운산 자락에 있는 박상진 의사의 묘. 경주는 고헌의 처가 동네이다.
▲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1884~1921)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이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일찍이 경성감옥에서 순국한 왕산 허위(1855~1908, 1962 대한민국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금오산 아래에 모시고 1년의 시묘(侍墓)로 스승을 배웅한 제자, 반민족적 친일부호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한 청년 독립운동가는 서른일곱에 뜨겁던 삶을 마감했다.

 

박상진은 울산 출신이다. 호는 고헌(固軒).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열아홉 살(1902) 때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 판사로 있던 왕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4년 양정의숙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식민지 관리가 되지 않겠다며 사퇴하였다.

 

1911년 박상진은 만주를 여행하면서 왕산의 형 허겸과 김대락·이상룡·김동삼 등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교유하면서 독립 투쟁의 방도를 함께 고민하였다. 당시 진행 중이던 신해혁명을 직접 겪으며 그는 조국에서도 혁명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이때의 신해혁명 체험은 그가 양정의숙에서 익힌 근대적 신학문과 어우러지면서 군주제를 옹호하는 복벽주의(復辟主義)적 사고를 극복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리고 이 경험은 그가 혁명 단체로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할 수 있었던 주체적 조건이 된 것으로 보인다.

 

대한광복회, 무장독립운동 비밀결사

 

1912년 귀국한 박상진은 독립운동의 재정 지원과 정보 연락을 위한 거점으로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라고 하는 곡물 가게를 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가 만주 안동(安東)에 세운 삼달양행이나 장춘의 상원양행 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915년 1월, 박상진은 윤상태(1991 애국장)·서상일(1990 애족장)·정운일(1990 애국장) 등 영남 지방 계몽운동 계열 인사들과 의열 계열 인사들이 함께 국권 회복 운동과 단군봉사를 목적으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계몽 활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국외 독립운동단체와의 정보 연락, 그리고 군자금 조달 등의 독립군 지원 활동을 벌여갔다.

 

한편, 박상진과 정운일·김재열(1990 애족장) 등 이 단체의 의병 계열 인사들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면 지역 단위의 독립운동만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강력한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을 구상하고 있었다.

 

당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토지에 관련된 농민의 권리, 경작권과 도지권을 무시하고 소작료 인상하여 지주의 토지 지배권을 강화하여 줌으로써 지주 계층을 식민통치의 동반자로 포섭하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가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해 준다고 인식한 지주 계급은 체제에 안주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말미암아 독립운동 단체의 군자금을 마련하는 활동에도 영향을 끼쳐 군자금 모금이 장애에 부딪히고 있었다. 이에 반민족적 지주를 응징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무력적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으고, 독립군 기지를 개척,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계획하에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의 결성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풍기광복단으로 조직된 ‘혁명적 독립운동단체’

 

그리하여 조선국권회복단의 의병 계열 인사들이 1915년 7월 15일 풍기광복단과 제휴하여 대구에서 조직한 ‘혁명적 독립운동 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다. 풍기광복단은 1913년 채기중·유창순(이상 1963 독립장)·한훈(1968 독립장) 등이 경북 풍기에서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로, 의병 출신 인사들이 주류였고, 만주 독립군과 연락하며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 등 조선국권회복단과 조직원 성향과 투쟁 방략이 상통하고 있었다.

 

대한광복회는 근대 국민국가의 공화주의를 이념으로, 무장혁명노선을 투쟁 방략으로 표방하였다. 결성 당시 대한광복회에서 채택한 결의문과 실천강령은 다음과 같다.

 

결의문
오인은 대한독립광복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 : 이바지함)함은 물론, 오인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손손이 계승하여 수적(讐敵 : 원수인 적)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 : 서로 힘을 모음)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 : 조선 시대에, 임금이 중요한 국사를 종묘에 고하던 일)함.

실천강령
1.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2.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3. 종래의 의병 및 해산 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4. 중국·아라사(俄羅斯)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5.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 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한만(韓滿) 각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그 지점 또는 여관·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 기관으로 한다.
6.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7.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을 기한다.

▲ 대한광복회 부사령 김좌진(1889~1930) 장군

 

군자금을 마련하여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 설립해서 독립군 양성, 국내외 요지에 독립운동 거점을 확보하여 정보·연락망을 구성한 뒤, 무력으로 민족독립 쟁취 등 결의문과 실천강령에서 드러난 것은 대한광복회의 혁명적 성격이었다. 또, 행동강령으로 대한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개 항목을 두었다.

 

박상진은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에 추대되었고, 부사령에는 황해도 평산 의병장 출신 이석대(본명 이진룡, 1962 독립장)가 선임되었다. 부사령은 이석대 순국(1918) 이후에는 김좌진(1889~1930, 1962 대한민국장)이 맡아 만주에 상주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담당하였다.

 

1916년 전국 조직으로 확대, 국내외 곡물상점 경영

 

대한광복회는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1916년에는 예산 중심의 충남 일대, 해주 중심의 황해도 일대, 보성을 비롯한 전남 일대, 그리고 서울·삼척·인천 등지에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나라 밖에도 조직망을 두어 북만주 길림지방에서도 광복회를 조직하였고, 남만주 서간도 지방의 부민단(扶民團) 또는 신흥학교 등과도 연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는 대구의 상덕태상회를 본거지로 하여 영주·인천·삼척·광주·연기·용천 등 국내, 만주 안동의 삼달양행과 장춘의 상원양행 등 국외에 곡물 상점을 설립 경영하면서 군자금을 마련하고, 그 영업망을 정보·연락망으로 활용하였다. 이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군자금 운반과 연락이 편리하였고 그 영업을 통하여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광복회는 활동자금과 군자금을 부호들의 의연금과 일제의 세금을 탈취해 마련하려고 일제 우편 마차를 습격하기도 했다. 1915년 12월, 경주 일대에서 거둔 토지세로 행낭에 담아 마차로 운송 중인 공금 8천7백 원 탈취 사건도 대한광복회의 솜씨였다.

▲ 울산광역시 북구 박상진길 23에 복원된 박상진의 생가. 선생은 여기서 나고 자랐다.

대한광복회는 이밖에도 일본인 경영의 금광 습격을 계획하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군자금은 주로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부호들의 비협조로 성과가 신통찮았다. 친일부호들이 군자금을 헌납하라는 권유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 내막을 일경에 밀고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이에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강제로 모집하고자 만주에서 무기를 반입하기로 하였다. 1916년, 만주에서 매입한 권총을 갖고 들어오던 박상진은 서울에서 총포화약령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광복회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노백린(1874~1925, 1962 대통령장)은 미주로, 김좌진은 만주로 망명하는 등 많은 인사가 해외로 탈출해 갔다.

 

박상진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에도 군자금 강제 모집을 계속하며 이를 거부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그는 부호들에게 대한광복회 명의의 포고문과 배당금 통보서를 발송하고, 이를 일경에 밀고하거나 납부를 거부하는 친일부호들은 처단하도록 명령하였다.

 

“지식이 있는 자는 서로 충정을 알리고 단결하여 본회가 의로운 깃발을 들어 올릴 때를 기다려라. 그리고 재물이 있는 자는 각기 의무를 다하고 저축하여 본회의 요구에 응하라. 나라는 회복할 것이요, 적은 멸망할 것이요, 공적은 길이 남을 것이다.”
      - 대한광복회에서 친일 부호들에게 보낸 ‘포고문’ 중에서

 

악덕 지주로서 지탄받던 경북 칠곡의 부호 장승원(1917년 11월)과 충남 아산군 도고면의 악질면장 박용하(1918년 1월)가 대한광복단이 처단한 친일부호였다. 이러한 의열투쟁으로 1918년 초부터 관련자들이 드러나면서 박상진·채기중·김한종·장두환 등의 인사들이 체포되었으며 이를 면한 이들의 이탈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은 와해에 이르렀다.

▲ 박상진 판결문. ⓒ 독립기념관
▲ 박상진 사형집행 기사(1921.8.13.동아일보)

박상진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향년 서른일곱 살. 스승인 왕산 허위가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어 순국한 지 13년 만에 제자도 스승의 뒤를 따른 것이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의 비밀결사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단체였다. 일제와 친일부호들을 공포에 떨게 한 이 비밀결사의 투혼은 ‘광복단 결사대’를 꾸린 우재룡과 권영만(이상 1963 독립장) 등 남은 회원들이 이어갔다. 중국 동북지역에 파견된 부사령 김좌진은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청산리대첩(1920)을 거두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의 막을 올렸다.

 

이밖에도 한훈과 김상옥(1962 대통령장)처럼 만주로 망명하여 암살단·주비단(疇備團) 등을 결성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였고, 광복회의 투쟁은 김원봉의 의열단과 김구의 한인애국단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대한광복회는 혁명군을 양성하여 유사시에 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던 계획을 추진했던, 1910년대 국내 민족운동 전선에서 드문 강력한 무력투쟁 단체였다.

▲ 울산광역시 북정공원의 박상진 의사 동상과 추모비. ⓒ 울산광역시

1960년 울산에 박상진 선생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천안에도 광복회 기공비가 세워졌다. 1963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부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의 독립유공자 서훈 등급을 기존 3등급(독립장)에서 1등급(대한민국장)으로 격상하기로 하면서 울산 지역에서는 서훈이 저평가된 박상진 의사에 대한 서훈 격상 운동에 나서고 있다.

 

 

2019. 8. 10. 낮달

 

참고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1996.8.)

· 월간 <독립기념관> 7월호

· 우리 역사넷, 대한광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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