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
1932년 오늘(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일본 혼슈(本州)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 육군 공병 작업장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가 순국하였다. 무릎을 꿇려 작은 십자가에 묶이고 눈을 가린 윤 의사의 10m 앞에서 일본군 병사가 쏜 총탄은 의사의 이마를 꿰뚫었다.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 총살형으로 순국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고 현장에서 체포된 지 234일 만이었다. [관련 기사 : 두 아들에게 남긴 윤봉길의 편지…북받침을 어찌하랴]
이태 전인 1930년에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건너온 충남 덕산 출신의 이 우국 청년은 스물다섯 살의 짧고 굵은 생애를 마감했다.
1933년 일본 육군성이 펴낸 윤 의사 관련 극비문서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의 ‘윤봉길 사형 집행 전말에 대한 보고서’(일본 방위성 자료실)는 윤봉길 의사 처형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범인 윤봉길은 가나자와 헌병대장의 지휘로 헌병 하사관 이하 3명 및 군법회의 간수 2명 호송 아래서 자동차로 12월 19일 오전 6시 30분 가나자와 위수(衛戍) 구금소를 출발. 오전 7시 15분 형장에 도착함으로써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겸 육군 감옥장 네모토 소타로는 의관(醫官) 세가와 군의(軍醫)로 하여금 건강진단을 하게 하여 그 신심(身心) 공히 이상 없음을 확인한 후
범인 윤봉길에 대해 “본년 5월 25일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살인·살인미수·상해·폭발물 단속벌칙 위반에 의해 언도된 사형의 집행을 한다.”는 내용을 고하며 유언의 유무를 묻자 범인은 “사형은 미리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고 말했음.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함. 간수로 하여금 형가(刑架) 앞에 정좌시키고 눈가리개를 하고 양손을 형가에 묶게 하여(별지 사진 제1) 오전 7시 27분 사수에게 사격을 명했음.
사수는 정부(正副) 2명 공히 하사관을 선정하여 범인의 눈을 가린 후 검찰관의 신호로 소정의 위치(수인의 전방 10m)에 엎드리고 쏜 정사수의 제1발이 미간부에 명중하여 13분이 지나 절명하였음.
의관은 검상(劍傷)을 검사하여 범인이 완전히 절명한 것을 확인하고 검찰관에게 보고하여 오전 7시 40분 윤봉길의 사형 집행은 여기서 종료됨.”
- <윤봉길 사형 집행 전말에 대한 보고서> ‘사형 집행의 상황’
윤봉길은 충남 예산 사람이다. 본관은 파평, 호는 매헌(梅軒)이다. 열 살 때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민족정신에 눈떠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하였다.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문학을 공부하였고 1926년부터는 농민계몽·독서회 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에 참여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이란 교재를 만들고 야학회를 조직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청소년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가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만주로 망명한 것은 1930년이었다.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의 집에 머물면서 백범 김구를 만나게 된다. 이듬해 한인 애국단에 입단한 그는 김구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훙커우 공원에서 열릴 일왕의 생일연(천장절)과 전승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식사를 같이한 뒤, 백범은 매헌을 거사 현장으로 전송했다. 윤봉길은 새로 산 자기 시계를 백범의 헌 시계와 바꾸고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백범에게 내놓는다. 뒷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아프고 슬픈 장면이다. 스물다섯 청년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 했던 백범도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없습니다.”
윤 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 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목멘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 김구, <백범일지> 중에서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를 뚫고 훙커우 공원에 들어갔다. 천장절(天長節) 행사가 끝나고 일본인들만 남아 축하연이 막 시작되던 11시 50분,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순간 매헌이 던진 물통 폭탄이 단상에서 폭발했다. 그러나 그가 떨어뜨린 자결용 도시락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매헌이 던진 폭탄으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 등이 죽었고, 총영사 무라이(村井)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 중장은 실명,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 중장과 주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다리를 잃었다.
매헌은 현장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지만, 이 거사는 온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거사는 존폐의 기로에 서 있던 임정을 살려냈고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는 장제스(蔣介石)의 격찬과 함께 중국 정부의 임정 지원을 끌어냈다.
사형이 집행된 뒤, 매헌의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지도 없이 매장되었다. 일제는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 없이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그것은 일본군 수뇌부에 타격을 입힌 윤봉길에 대한 일제 군부의 치졸한 복수였다.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스물다섯의 우국 청년 매헌 윤봉길은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갔다.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훙커우 공원을 답사하고 숙소로 돌아온 윤봉길이 백범의 요청에 따라 썼다는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을 다시 읽는데 나도 목이 메어왔다.
고작 스물다섯, 요즘 같으면 가치관을 정립하기에도 버거운 나이에 그는 빼앗긴 조국의 제단 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매헌이 남긴 유언이 84년이란 시간을 넘어 뒷사람을 눈물짓게 하는 것은 나 역시 아비이기 때문만일까.
백범은 자신이 사지로 보낸 애국단원 이봉창(1900~1932)과 윤봉길을 잊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의 순국 13년 뒤에 조국은 해방을 맞았다. 1946년, 백범은 이듬해 두 의사와 함께 백정기(1896~1934) 의사의 유해를 일본으로부터 송환한 것이다.
삼의사의 유해가 송환되자 1946년 7월 7일, 이들의 장례식이 5만여 군중이 참례한 가운데 해방 후 첫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삼의사는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효창원 삼의사 묘역에는 아직도 유해를 모셔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허묘 오른쪽으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소가 나란하다.
2016년의 막바지는 하 수상한 시절이다. 견고하리라 믿었던 대한민국 민주 공화정이 허구와 기만 위에 위태롭게 얹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의 분노는 권력을 탄핵하고 그 권한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부적격자를 권력으로 옹립했던 정상배들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득권 세력에 기댄 채 성찰할 줄 모르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 상인들이 부르대는 ‘애국’이 어지럽다. 84년 전, 매헌이 목숨을 던져 구하고자 했던 조국을, 그의 ‘나라 사랑[애국(愛國)]’을 아프게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2016. 12.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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