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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이야기 따라 가을 따라 가본 선비 집과 절집

by 낮달2018 2019.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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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서원과 산사 가을 풍경

▲ 부석사의 가을. 부석사의 단풍은 수더분하고 넉넉하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려면 날이 차가워져야 한다고 했던가. 정직하게 돌아온 가을을 제대로 느끼려면 길을 나서야 한다. 무심한 일상에서 가을은 밤낮의 일교차로, 한밤과 이른 아침에 드러난 살갗에 돋아오는 소름 따위의 촉각으로 온다. 그러나 집을 나서면 가을은 촉각보다 따뜻한 유채색의 빛깔로, 그 부시고 황홀한 시각으로 다가온다.

 

시월의 마지막 주말, 길을 나선다. 대저 모든 ‘떠남’에는 ‘단출’이 미덕이다. 가벼운 옷차림 위 어깨에 멘 사진기 가방만이 묵직하다. 시가지를 빠져나올 때 아내는 김밥 다섯 줄과 생수 한 병을 산다. 짧은 시간 긴 여정에 끼니를 챙기는 건 시간의 낭비일 뿐 아니라 포식은 가끔 아름다운 풍경마저 심드렁하게 만든다.

 

오늘의 여정은 영주 순흥, 소수서원과 인근 태백산 자락의 화엄 종찰 부석사를 거쳐 안동 풍천 언저리를 도는 것이다. 안동에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병산과 화천, 두 서원이 있고, 그 물굽이엔 물돌이동 하회가 있다. 한갓지게 또 고리타분한 서원이냐고, 이 화창한 가을날 나들이가 고작 구태의연한 절집이냐고 하지 마시라.

 

서원이든 산사든 거기 가득한 가을의 풍경을 볼 일이요, 마음먹은 답사가 아닌 바에야 성리학의 이념이나 광대무변한 불법의 세계에 짓눌릴 일은 없다. 서원의 강당이나 절집의 전각은 오롯이 우리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목조 구조물로, 그 안온한 마당을 스쳐가는 천 년의 바람이야 상기도 이어지는 세월의 자취로 바라보면 그뿐이지 않은가.

 

선비의 도포를 스치던 바람, 지금 내 옷자락 만지네

 

영남은 서원의 보금자리였다. 이른바 성리학의 정맥이라는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본고장이었던 영남이 서원은 물론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수서원은 1542년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회헌(晦軒) 안향의 사당을 숙수사(宿水寺) 터에 세우면서 시작된다.

 

원래 경관이 뛰어난 절터나 퇴락한 사찰은 서원의 입지로 으뜸이니 소수서원과 함께 옥산서원·노강서원·임고서원·청성서원 등이 그러한 곳이다. 사찰에서 서원으로의 이행은 문화 교체에 따른 공간 점유의 계승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유교 질서의 수립이라는 정책적 의도와도 이어진다. 회헌을 도학의 조종으로 받든 주세붕이 숙수사 옛터에 서원을 열면서 땅속에 묻혀있던 구리 수백 근을 캐 서원의 밑천으로 썼다던가.

 

처음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었다. 뒤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의 건의에 따라 명종은 1550년 백운동 서원에 친필로 쓴 액(현판)과 서적을 하사함으로써 이 서원은 ‘소수서원’으로 새로 태어난다. 사액과 함께 서원에 학전(學田)과 노비를 주고 이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면역의 특권을 주었다.

 

학문에 대한 국가적 장려를 목적으로 시작된 이러한 지원이 후일 관학의 쇠퇴는 물론, 국가 재정과 자원의 궁핍을 불러오고 만 것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 곳곳에 사액서원이 세워지는데 이는 당시 관학이 흐트러지고 성리학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한 데다 퇴계·율곡 같은 대학자들이 서원 건립에 앞장선 것에 힘입었다.

 

국가 공인 사학 소수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훼철을 면한 마흔일곱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가을이 깊은 서원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선비촌과 소수박물관을 한데 묶은 입장료는 3000원. 이웃한 부석사 입장료(1200원)에 비하면 입이 벌어지지만 한 바퀴 돌고 나면 그리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수더분한 처마 끝, 연록빛 단풍 걸렸네

▲ 지락재 담 너머의 단풍 지락재는 작지만, 소박과 근검의 미덕을 엿보게 해 주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수백 년 묵은 소나무 숲 그늘로 들어서면 소백산에서 발원해 서원을 끼고 흐르는 죽계천을 만난다. 죽계천은 백운동에 회헌의 사당이 세워진 다섯 해 뒤에 이 고을 사람들이 휩쓸린 참화의 곡절과 한을 품은 시내다.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순흥부는 불타 폐부가 되었고, 숱한 백성들이 무참히 타살되었다. 피가 죽계천을 적시고 흘러, 십 리 아래 ‘피끝마을(안정면 동촌리)’까지 이어졌다던가.

 

출입문을 들어서면 배흘림기둥에다 사방에 툇마루를 두른 강학당과 함께 널찍한 마당이 방문객을 맞는다. 강학당 뒤에는 스승의 집무실인 일신재와 직방재가, 오른쪽에는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학구재·지락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로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한 세 칸 집이다.

 

이 기숙사 건물은 10명에서 30명까지의 유생들이 기거한 건물이라기에는 너무 작지 않나 싶은 검박한 건물이다. 나는 세 칸 가운데 두 칸의 낮은 마루를 들인 지락재 주변에 서린 소박한 아름다움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단청 없는 맨살의 기둥과 처마의 ‘수더분’이 정겹고, 마루 너머 층층이 낮아지는 담장과 처마 끝 사이의 여백을 가득 채우는 연록빛 단풍은 얼마나 정갈한가.

▲ 탁청지 부근의, 이 연못에서 경렴정에 이르는 길에는 호젓함이 넘친다.

담장 너머의 길쭉한 사각형 연못 탁청지(濯淸池) 주변도 따뜻하게 기억되는 풍경이다. 탁청지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겸암 류운룡이 풍기 군수로 재임할 때 조성한 연못이다. 이 연못과 서원의 담장 사이에 난 낙엽 쌓인 길은 키 큰 활엽 교목의 행렬과 함께 들머리의 경렴정까지 이어진다. 그 호젓한 길의 운치를 아는가, 그 길은 걷는 이는 젊은 연인들이다.

 

탁청지를 지나 죽계천을 넘으면 2004년께 문을 연 ‘선비촌’이다. 관광객들이 부산하게 왕래하지만, 정작 깔끔하게 재현한 와가나 초가에는 사람은 물론 삶의 냄새가 나지 않는데 낙담할 필요는 없다. 맨 오른편 산 아래엔 문을 열고 있는 소수박물관이 시골답지 않은 전시 유물과 실팍한 짜임새로 그걸 보전해 주니 말이다.

 

가던 길을 되짚어 나오면 경렴정 뒤편 흐르는 죽계(竹溪) 너머 취한대가 다가온다. 시내 저편, 빽빽한 적송 숲속의 정자는 아련하게 멀어 보인다. 이편의 정자 경렴정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양샌데도 별다른 꾸밈새가 없는 검박한 구조 탓인가, 취한대는 외려 경렴정보다 더 넉넉해 보인다. 가늘게 떨며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모래 속살을 드러낸 죽계는 무심히도 맑았다.

▲ 죽계천 시내 건너다보이는 정자가 취한대다.

선묘 낭자의 천년 사랑, 부석사

 

소수서원에서 10분쯤 달리면 봉황산 중턱의 부석사에 이른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다. 이 그리 크지 않은 절집은 무려 5개의 국보(무량수전·조사당·소조 여래좌상·조사당 벽화·석등)와 4개의 보물(석조여래좌상·삼층석탑·고려각판·당간지주)을 지닌 만만찮은 절이다.

 

그러나 굳이 문화재의 위계를 다툴 일은 없다. 이 오래된 절집에 서린 한 여인의 사랑을 더듬으며 산사에 가득한 가을 본색을 느껴볼 일이다.

 

유학길에서 이른바 ‘해골 물’을 마시고 발길을 돌린 원효와 달리 의상은 가던 길을 재촉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는 이역 땅에서 한 여인의 연모를 감당해야 했으니 이 여인이 선묘다.

 

뒤에 당의 침범 기미를 안 의상은 선묘와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귀국의 뱃길에 오른다. 의상에게 바칠 선물로 법의를 마련했던 선묘는 서둘러 바닷가에 이르나 이미 의상이 탄 배는 흰 돛으로 아른거릴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공양이 의상에게 이르기를 구하며 법의를 바다에 던지고 스스로 용이 되어 의상을 호위하기를 소원하며 바다에 몸을 던진다.

 

의상은 용이 된 선묘의 호위로 신라로 돌아와 어려움을 이겨내고 왕명으로 봉황산에 화엄 종지를 떨칠 도량을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이교의 무리가 점령하고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선묘 룡이 법력으로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큰 바위를 3차례나 공중으로 던져 올리니 그제야 무리가 굴복하였다.

 

이때, 이교도들을 굴복시킨 바위가 뜬 돌, 곧 ‘부석’으로 무량수전 서편 암벽 아래에 상기도 남아 있으니 이 절집의 이름은 거기서 비롯한 것이다. 선묘는 석룡이 되어 그 머리를 무량수전 주불 밑에 두고 꼬리를 전각 앞 석등까지 펼쳐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었다던가. 실제 무량수전 아래에는 2자 깊이로 48자의 석룡이 묻혀있으니 여인이 못다 이룬 천년의 사랑은 시방도 돌로 남아 이 터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 안양루에서 내려다본 경내 풍경. 유홍준의 말처럼 ‘태백산맥 전체가 무량수전의 앞마당’이다.
▲ 은행나무길 천왕문에서 일주문으로 내려가는 길.

부석사의 가을은 일주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긴 오르막길 주변, 이 절집에 무심하게 들어찬 작은 숲에 있는 듯 없는 듯 스며 있다.

 

일주문 주변에 풍성하게 익고 있는 사과밭, 천왕문에 이르는 얕은 오르막길 주변에 노랗게 물들고 있는 은행나무의 긴 행렬은 가공하지 않은 맨땅의 흙길과 석축의 자연석에 어우러져 산사의 가을빛을 빚어내고 있다.

 

일주문에서 조사당에 이르는 긴 축선 좌우에 적지 않은 전각과 탑이 배치되어 있어도 부석사가 오밀조밀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9단의 석축으로 일정하게 분할된 공간 덕분이다.

 

범종각이나 안양루, 그리고 무량수전은 작지 않은 규모의 건물이다. 그런데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전각들이 일직선이 아니라 비스듬히 꺾여있어 이들이 연출하는, 온전히 숨지도 드러나지도 않는 감칠맛 나는 풍경 때문이다.

 

일찍이 유홍준이 그의 저서에서 지적했듯 ‘태백산맥은 무량수전의 앞마당’이다. 무량수전을 등지고 안양루 앞에 서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첩첩 산야는 곧 ‘생멸(生滅)이 없는 무한한 생명을 지닌 부처님’, 무량수불(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서방 정토와 다르지 않으리라. 어깨를 부딪치며 오가는 대중들의 소란 속에서도 이 ‘뜬 돌의 절’이 쉬 들뜨지 않는 까닭도 거기 있는지 모른다.

 

제가(齊家)와 입신으로 갈린 형제의 삶, 병산·화천서원

▲ 만대루. 어느새 만대루는 병산서원의 상징이 되었다.
▲ 만대루의 조망. 답사객들은 스스럼없이 만대루에서 무연히 병산과 강을 내려다본다.

다음 여정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를 안고 흐르는 낙동강 연변에 세워진 겸암 류운룡의 화천서원과 서애 류성룡의 병산서원이다. 화천서원은 하회 마을 건너 부용대 아래에, 병산서원은 그보다 상류에 화산을 등지고 각각 낙동강을 굽어보며 서 있다.

 

서애 유성룡(1542∼1607)는 가형 겸암과 함께 퇴계 문하에서 수학했다. 음사로 벼슬길로 나아갔지만, 출사와 퇴사를 거듭한 겸암과 달리 ‘하늘이 내린 재상’이라는 서애의 벼슬길은 막힘이 없었다. 서애가 집 걱정을 잊고 정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벼슬길에서 자주 물러나 어머니의 간병과 어버이 봉양을 도맡았던 겸암 덕분이었다 한다.

 

역사는 늘 승자의 편이고, 삶도 마찬가지다. 항렬과 가족의 위계 따위와는 상관없이 힘의 균형은 부와 권력(벼슬)의 크기에 비례해 기울어진다. 형제였지만, 영의정을 지낸 아우에 가려 겸암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서슬 푸른 대원군의 서원철폐령도 넘지 못할 만큼 서애와 풍산류씨가 이룩한 성채는 높고 단단했다.

 

병산서원은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다. 하회 마을로 들어가다 왼편 길로 꺾어 좁은 비포장 산길을 10여 분 달려야 한다. 들머리 일부만이 포장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여전히 노선버스나 관광버스 등과 만날 때마다 살얼음 밟듯 비켜 지나가야 할 만큼 좁은 길이다. 그러나 그런 ‘불편’ 덕에 병산은 숨을 쉬고 있다.

 

만대루 하나만으로도 병산서원은 스스로 족하다. 앞면 7칸, 옆면 2칸의 적지 않은 이 누각이 어느새 병산서원의 상징이 된 것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늘면서 먼지가 쌓였던 마룻바닥은 정갈하게 윤이 나기 시작했다.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 부재를 맞춰 짠 이 아름다운 건물의 품격은 자연 그대로인 회백색의 빛깔과 푸근한 질감으로 소박하게 빛난다.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 만대루에는 글 읽는 유생 대신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마루에 눕거나 난간에 기대어 시월의 병풍산을 무연히 내다보고 있다. 낮은 백사장 너머 강이 흐르고 바투 다가온 병산의 이마는 유채색이었다.

 

중앙마당을 감싸면서 밖으로는 열려 있는 만대루는 외부로는 닫혀 있으면서 안으로는 열려 있는 개방적인 서원 건축의 특징을 잘 드러내 준다. 만대루에 호젓이 앉아 병산과 저무는 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른바 ‘호연지기’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때로 우리의 일상의 한 장면을 이르는 구체적 낱말이라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게 된다.

▲ 화천서원 숭교당. 여섯 짝의 분합문과 검은빛 돌 축대가 인상적이다.

겸암 류운룡(1539∼1601)을 모신 화천서원은 하회 마을 건너편 풍천면 광덕리에 있다. 1786년(정종 10)에 창건된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 병산서원이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였던 데 비해 겸암의 화천서원이 끝내 철폐되고 만 것은 그의 이름이 가진 한계였을지 모른다.

 

화천서원은 낙동강 상류, 화천과 하회를 멀찍이 건너다보면서 화산 중턱에 안존하게 서 있다. 숭교당은 여섯 짝의 분합문(문을 열고 들어 올려서 서까래에 달린 걸이에 거는 문, 들어열개문)을 들어 올린 널찍한 대청이 시원한데 검은빛이 도는 돌로 쌓은 축대와 어울려 그윽한 깊이를 보여준다.

 

사당인 경덕사 뒤편의 산길을 10여 분 오르면 화산 부용대에 이른다. 부용대는 하회 마을을 마주 보고 있는 벼랑이다. 하회는 하회를 나와야 보인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하회 마을, 묵은 이엉의 바랜 잿빛 질감이 두드러진 초가들 속에 기와집 몇 채가 안온하게 녹아 있다. 울바자와 골목길에 선 해바라기와 채마밭 따위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을 넉넉하게 드러내 준다.

▲ 화천에 띄운 나룻배. 사람들은 배를 타고 전근대의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 있을까.
▲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하회 마을. 해묵은 지붕 이엉이 잿빛으로 바래고 있다.
▲ 겸암정사. 이 수더분한 정자 마루에선 곤한 낮잠에 빠지고 싶어진다.

때는 단풍 관광 철, 벼랑 아래 화천에 나룻배 한 척이 떴다. 배 안에는 길손이 가득한데 여인이 든 양산이 하얗게 빛난다. 밀짚모자를 쓴 사공이 든 삿대가 대각선으로 두드러져 보였다. 억새 풀 사이로 렌즈에 잡힌 강물에 승객들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떠 있다.

 

부용대 아래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겸암정사다.

 

겸암이 이 정사를 지은 것은 스물여섯 살 때. 그는 나룻배로만 마을과 이어지는, 외진 이 정사에서 글을 읽었고, 일곱 해가 지나서야 벼슬에 나섰다. 아우 서애의 출사보다 무려 9년이 늦었으니 입신의 순서부터 형제는 달랐던 셈이다.

 

정사의 누마루에 오르니 난간 너머 댓잎이 푸르다. 나뭇가지 사이로 화천의 하얀 모래톱과 만송정 숲이 아련하게 멀어 보인다. 퇴계의 글발이 적힌 편액 아래 누마루는 스스럼없이 눕고 싶을 만큼 편안하고 넉넉하다.

 

바삐 돌아온 여정이 가빴던가. 난간에 팔을 걸치고 내려다보는 화천의 물결이 거뭇거뭇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석양의 겸암정사와 화천을 떠나며 들었던 듯하다. 멀리서 아련히 다가오는 겨울, 그 무거운 발걸음 소리 같은 걸 말이다.

▲ 화천(花川). 하회 마을을 감고 흐르는 화천은 낙동강 상류다.

 

2007. 11. 3. 낮달

 

 

 

이야기따라 가을따라 가본 선비집·절집

[대한민국 구석구석] 경북의 서원과 산사 가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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