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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쑥골통신

[쑥골통신] 유년의 시장기와 청미래덩굴 열매

by 낮달2018 2019.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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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골에서 부치는 편지

내가 사는 동네가 ‘봉곡(蓬谷)’입니다. ‘쑥대’가 많아 ‘다봉(多蓬)’이라고 불렀다는데 봉곡은 한자를 풀면 ‘쑥골’입니다. 이 편지를 ‘쑥골에서 부친다’고 쓰는 까닭입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대여섯 편을 썼는데 티스토리로 와서는 한 편도 쓰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의 여유가 모자라서입니다.

한갓진 일상을 두서없이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우선 묵은 글을 올리고, 때가 되면 새 글도 쓰려 합니다. 굳이 경어체를 쓰는 이유는 자신을 아주 낮은 자리에 매겨서 스스로 겸허해지고 싶어서입니다.

경어체의 서술은 일상을 넘는 울림이 있지요. 신영복 선생의 산문이나 도종환의 시를 떠올려 보십시오. 선생의 산문은 담담하면서도 웅숭깊은 성찰의 기록입니다. 장중한 경어체의 서술을 통해서 선생의 문장은 진실 너머까지를 깊숙이 응시합니다.

도종환의 시도 마찬가지지요. 경어체의 어미는 독자들에게 시인의 겸허한 눈길과 낮은 자세를 환기해 주면서 그가 노래하는 진실의 소박성을 은은하게 풍겨냅니다. 그것은 시인의 사유를 재기보다 그 진실의 깊이를 신뢰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경어체의 서술은 그 울림 속에 책임 소재를 회피하거나 면하고자 하는 미필적 고의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짙은 서정적 울림이 지적 판단과 냉철한 평가를 두루뭉술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나는 가끔 경어체의 서술로 좀 나긋나긋해지고 싶습니다. 담담한 경어체를 쓰면서 내 일상을 힘을 빼고 무심한 눈길로 돌아보고 싶습니다. 공연히 감성적인 문체를 선택하면서 좀 주책을 떨 수도 있겠습니다.

때로 뜬금없는 감상에 빠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설사 그런 같잖은 망령을 부리는 일이 있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보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도 내 모습의 일부일 테니까 말입니다.

▲ 흔히 ‘망개나무’ 로 잘못 알려진 청미래덩굴.  열매가 아니라 뿌리가 구황식품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해를 넘기며 매주 서너 번씩 산을 오르다 보니 산길이 눈에 익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 어떤 바위가 있고, 어느 등성이에 꼬부라진 소나무가 있는지, 며느리밥풀꽃과 도라지모시대,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피어나는 자리를 머릿속에 휑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나무와 숲의 변화에 ‘눈 뜨다’

 

지난해 늦여름부터 산행을 시작하였으니 어느새 한 해가 좋이 흐른 것입니다. 매번 같은 길로 다니는 산행이니 주변의 지형지물에 익숙해지는 것 말고도 나무와 숲의 변화에도 눈이 뜨였습니다. 지난봄 내내 생강나무 꽃이 지고 잎이 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입니다. [관련 글 : 꽃 진 뒤 잎 나는 봄]

 

북봉산 들머리 길섶과 정상을 돌아서 내려오는 마지막 등성이에 청미래덩굴 두어 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산행을 다니면서 스마트폰으로 담은 사진에 청미래덩굴이 등장하는 것은 5월 중순 이후입니다. 꽃도 피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걸 눈여겨보지 못했던 듯합니다.

▲ 청미래덩굴의 푸른 열매.  지난 6월에 찍은 사진들이다.
▲ 9월의 청미래덩굴.  푸른빛이 가시며 노란빛을 띠기 시작한다.

5월께부터 손가락 반 마디 정도로 자란 열매는 7, 8월을 거치면서 여물기 시작하여 지난 10월 들면서 조금씩 물들더니 월말께는 빨갛게 익었습니다. 산행을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정해진 순서처럼 찍은 사진 속에서 청미래덩굴의 성숙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굳이 산행할 때마다 그걸 찍은 것은 그게 산에서 그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열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청미래덩굴과 연관된 유년의 기억들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장기에 산을 헤매면서 우리는 청미래덩굴 열매를 씹으면서 몰려오는 시장기를 달래곤 했으니까요.

 

청미래덩굴 아래, 병사의 농구화 한 짝

 

진달래가 피어나는 철이 되면 우리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마을 앞산에 오르곤 했지요. 목적은 대체로 ‘쇠 줍기’였던 듯합니다. 고향 마을은 한국전쟁 중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과 왜관 인근, 당연히 거기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니 온산에 전쟁이 흔적이 뚜렷했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후, 갈아엎은 산 밑의 무논에서는 가끔 어른 손가락 굵기의 기관총 탄피가 발견되기도 했을 정도였지요. 산에 올라 조금만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면 주로 포탄 파편인 쇠붙이를 주머니 가득 주울 수 있었고, 이 쇠붙이는 국화빵이나 엿과 교환되었습니다.

 

볕은 따가웠고 발갛게 익은 채 산을 헤매다 몰려오는 시장기를 우리는 봄이면 지천으로 피어난 참꽃을 따 먹으며, 가을이면 청미래덩굴 열매를 씹으며 달랬지요. 청미래덩굴은 주로 메워진 참호 주변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가시가 만만찮았지만 빨갛게 익은 그 열매는 맛보다는 입안에 고이는 군침으로 먼저 다가왔던 듯합니다.

 

언제였던가, 내겐 그 청미래덩굴 아래 하얗게 삭아 형태만 남아 있던 농구화 한 짝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는 전쟁 중 숨진 인민군 병사, 어쩌면 소년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삭아서 손을 대면 바스러질 것 같던 그 낡은 농구화의 기억은 내 유년 시절을 구성하는 가장 선명한 풍경 중 하납니다.

▲ 성장기에 산을 헤매면서 우리는 청미래덩굴 열매를 씹으면서 몰려오는 시장기를 달래곤 했다.

숲길 주변에 가끔 청미래덩굴이 자라고 있는 게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 햇볕이 부족해서인지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용케 자라난 놈이라도 병들어 열매가 곯아 시들어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사진의 청미래덩굴 열매가 모두 서너 개씩밖에 달려 있지 않은 이유입니다.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는 외떡잎식물인 청미래덩굴은 원형 또는 타원형에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갈고리 같은 가시가 있는 잎이 특징입니다. 경상도에서는 망개나무라 부르는데 경남 의령군의 향토식품으로 이 잎으로 싼 떡을 ‘망개떡’이라고 한다지요. 잎으로 싼 뒤에 쪄서 떡이 서로 달라붙지 않고 오랫동안 쉬지 않으며 망개 잎의 독특한 향으로 유명하다네요.

▲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의 의병들이 먹던 데서 유래한 망개떡.  ⓒ 나무위키

망개떡이 의령의 향토식품이 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가 일으킨 의병들이 망개 잎에 밥을 싸서 다니며 먹었다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망개 잎의 천연 방부제 성분 덕분에 음식이 잘 쉬지 않았기에 장군의 부인이 망개 잎에 밥 대신 떡을 싸서 의병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청미래덩굴을 일부 지역에서 ‘망개’라 부르지만, 실제 우리나라 희귀식물의 하나인 망개나무와는 무관한 식물입니다. 갈매나뭇과에 딸린 높이 15m 안팎의 낙엽교목인 망개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속리산과 충주 월악산, 그리고 제천 지역 등에 드물게 서식하고 있다네요.

▲ 속리산 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 호). ⓒ 문화재청

 

청미래덩굴과 망개나무는 전혀 ‘다른’ 나무다

 

청미래덩굴은 뿌리에 흡사 혹 같은 괴근(塊根)이 생기는데 이를 ‘토복령(土茯苓)’이라 합니다.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토복령을 채취해 그늘에 말려 먹거나 환을 내어 약재로 복용하면 매독 등의 성병과 수은 중독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군요.

 

옛날 어떤 한량이 문란한 생활을 거듭하다 매독에 걸려 죽게 되자 그 부인이 산에 남편을 버렸답니다. 사내는 허기져 풀숲을 헤매다 청미래덩굴 뿌리를 캐 먹기 시작했는데 어느결에 병이 나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하지요. 청미래덩굴을 ‘산에서 돌아왔다’고 하여 ‘산귀래(山歸來)’라 부르는 연유입니다.

 

중국의 의서(醫書)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요사이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매독 같은 성병이 많이 유행하고 있는데 약을 조금 써 고친 후에도 다시 이 병이 재발하여 고질화하고 있다. 이때는 토복령을 치료제로 쓰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방에서는 지금도 매독 치료제로 씁니다.

▲ 청미래덩굴의 열매가 서서히 익어가고 있다. 10월 초순.
▲ 청미래덩굴의 열매가 빨갛게 익었다. 10월 말께의 사진이다.
▲ 청미래덩굴은 이제 겨울을 지나면서 이처럼 곯아 시들어갈 것이다.

청미래덩굴은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흉년이 들었을 때 구황(救荒)식품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열매가 아니라 굵고 큰 뿌리를 먹었지요. 토복령에는 녹말이 많이 들어 있어 충분히 식량을 대신할 수 있었다는군요.

 

구황식품에서 꽃꽂이 재료로

나라가 망한 뒤 산으로 숨어든 선비들이 이 뿌리를 캐 먹었는데 ‘단단한 밥’이라는 뜻의 ‘경반(硬飯)’으로 불렀습니다. 이밖에도 ‘요깃거리가 넉넉하다’ 하여 ‘우여량(禹餘量)’, ‘산에 있는 기이한 양식’이라 하여 ‘산기량(山奇糧)’, ‘신선이 물려준 양식’이라는 뜻에서 ‘선유량(仙遺糧)’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그러나 다 옛이야기일 뿐이지요. 약재로 얼마나 쓰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더는 사람들이 청미래덩굴을 식용할 일은 없으니까요. 요즘 청미래덩굴은 빨갛게 익는 열매가 아름다워 꽃꽂이 재료로 인기를 얻고 있답니다.

 

지금 빨갛게 익은 청미래덩굴 열매는 곧 빛과 윤기를 잃고 말라가겠지요. 새봄을 위하여 겨울을 견뎌낼 터이고요. 11월, 겨우내 산행에서 만나게 될 청미래덩굴을 생각하며 내 유년의 시장기를 떠올리는 빨갛게 익은 열매를 오래 바라봅니다.

 

 

2017. 11.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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