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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식민지 시대 - 항일과 친일

‘모스크바 동네’가 배출한 항일운동가 권오설

by 낮달2018 2019.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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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 ④] 20년대 사회주의 운동, 잊힌 시대와 삶

▲가일마을. 안동 권씨가 500 여 년간 세거해 온 동족 마을 . 사회주의 운동가를 많이 배출해 '모스크바 동네' 라 불렸다 .

여기 한 혁명가가 있다. 감옥에서 찍은 일그러지고 바랜 사진 속에서 그는 정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일제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향년 서른넷. 그의 시신은 일경의 삼엄한 경비로 봉분도 올리지 못한 평장(平葬)으로 고향 인근의 산기슭에 묻혔다. 그 무덤에 봉분이 올라간 건 수십 년이 흐르고 나서였다.

▲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거로 보이는사진 ⓒ < 사진으로 보는 근대 안동 >

2차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제2대 책임 비서였던 그는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 노선을 택한 ‘실용주의’ 운동가로 평가되는 이다. 조선공산당의 ‘6·10 운동 투쟁지도 특별위원회’ 총책임자로 6·10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했지만, 해방 후 극심한 좌우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전쟁을 거친 자본주의 조국은 그와 그의 시대를 애써 기억하지 않았다.

 

‘모스크바 동네에서 태어난 혁명가

 

19세기의 막바지인 1897년 안동에서 태어나 1930년, 34년의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한 이 혁명가의 이름은 권오설(權五卨). 그가 태어난 곳은 안동군 풍서면(현재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안동 권씨 집성촌인 가일(佳日)마을이다. 이 마을은 권오설을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가 여럿이 태어나 당시 안동 사람들이 ‘모스크바 동네’라 부른 곳이다.

 

비단 마을뿐이 아니다. 가일마을 뒷산 너머 풍산 오미마을(오미리)의 김재봉(1841~1945)은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이하 ‘조공’)의 책임 비서였고, 풍산 들 건너편 우롱골(풍산읍 상리)의 이준태(1892∼?)는 조공 중앙위원 후보였으니, 이 마을 부근을 모스크바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 지나치다 할 순 없는 것이다.

▲ 권오설의 생가터 남천고택(南川古宅) 옆에 있는 권오설의 생가터는 콩밭이 되었다.

권오설은 한학을 익히다 인근의 남명·동화학교 등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총명했으나 가난 때문에 그의 학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동화학교 졸업 후 곧장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네 해나 지나서야 대구고보에 입학하고 이후 여러 학교에 입 퇴학을 거듭했던 것도 가난 탓이었다. 결국, 그는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전남도청에서 일하게 된다.

 

전남도청에서 일한 지 다섯 달 만에 그는 낯선 타관 광주에서 3·1운동을 만난다. 스물둘, 식민지 청년이 도도한 항일과 독립의 물결을 비켜 갈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는 운동의 배후 조종 혐의로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고 전해지나 그 구체적 내용은 지금도 확인되지 않는다.

 

어쨌든 권오설이 가일마을로 돌아온 것은 1919년 가을이었다. 그는 마을에 원흥의숙이라고도 불리는 원흥학술강습소를 세우고 스스로 교장 겸 교사를 맡았다. 문중 소유의 노동서사(魯洞書社)에서 이 식민지 청년은 놀라운 활기로 교육·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안동 풍산에서 소작운동 주력

 

그의 발길은 인근 지역으로까지 벋어갔다. 이태 후, 그는 일직면과 풍산면에 각각 일직서숙(1921)과 풍산학술강습소(1922)를 설립한 것이었다. 그의 활동은 교육운동에 그치지 않았다. 가곡농민조합, 일직면 금주회, 안동청년회,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1920), 풍산청년회(1922) 등에 참여하거나 그 조직·결성을 주도하는 등 그의 발걸음은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다.

 

권오설의 활동은 풍산소작인회 결성과 함께 소작운동으로 진화하면서 새롭게 도약한다. 대체로 계몽적 성격의 문화 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던 청년운동에서 소작운동으로의 전환은 동향 선배 이준태(1892~?)와 김남수(1899~1945) 등과의 교류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면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 노동서사(魯洞書社). 원흥학술강습소로 사용된 건물로 1770 년 권구(權榘)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방 주민이 세운 서원이다.
▲ 풍산학술강습소의 명부. 아래는 여자부 명부.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소장 유물이다.

당시 안동지방에는 일본인들이 토지를 담보로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악랄한 방법으로 토지를 빼앗는 일이 많았다. 빼앗긴 농토는 농민들의 소작지가 되었고 7할에 가까운 소작료 착취로 이어졌다. 이 같은 일인들의 횡포에 대해 소작인은 물론 지식인, 자작농, 조선인 지주들까지도 반발하면서 반일의식을 키워갔다.

 

권오설은 1923년, 조선노동연맹회에서 활동하던 이준태·김남수 등과 함께 풍산학술강습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했다. 풍산소작인회의 ‘당면 투쟁목표’는 지세의 지주 부담, 소작료 인하, 소작권 5년 이상 보장, 부역과 마름의 중간 수탈 반대, 소작료 운반 비용의 지주 부담 등이었다.

 

이후 그는 소작인의 경제적 권익 보호와 함께 당시 뿌리 깊게 남아 있던 봉건적 신분질서 철폐 운동 등을 전개해 나갔다. 안동은 물론 예천에도 출장소를 두는 등 조직을 확대하면서 풍산소작인회는 중소지주와 지식층이 대거 참여한 5천여 명 규모의 전국 농민조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24년, 풍산소작인회가 소작료 인하 운동을 전개하면서 농민들의 요구는 집단적 소작쟁의로 발전했다. 지주들은 일본인들의 협조 아래 소작인회 간부를 고발하고, 소작권을 박탈하는 등의 방식으로 소작인회를 탄압하였다. 열두 명이 고발되어 징역과 벌금형을 받았지만, 농민들은 쟁의 과정을 통하여 식민지 수탈체제를 인식하면서 자신들의 운동을 정치투쟁 즉,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해, 풍산소작인회의 대표로 조선노동(농)총동맹의 창립대회에 참가한 권오설은 중앙집행위원과 상무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자신의 활동반경을 전국 단위로 넓히게 된다. 그는 조선노동총동맹에서 노동자·농민들의 의식을 높이는 교양강좌를 담당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소작쟁의와 노동운동을 지도하였다.

▲ 김재봉(좌)과 이준태. 김재봉은 풍산 오미마을, 이준태는 우롱골 출신으로 권오설의 선배.

1920년대는 일제의 식민 통치가 더욱 강화된 시기였다. 3·1운동에 놀라 ‘문화정치’라는 허울을 쓰긴 했지만, 일제는 독점자본에 의한 경제적 수탈을 한층 강화했고, 조선인들의 민족해방을 위한 활동을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1925년 5월에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제정·공포했던 것이다. 권오설은 이때, 사회운동의 추세를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운동이 격렬하여 가는 것은 결코 일부 운동가의 활동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요, 대중의 생활고가 또한 온갖 사정이 운동을 금일에 이르게 한 것이올시다. … 보시오 저 흐르는 물을! 아무리 거대한 암초가 있다고 흐르는 물이 흐르지 아니하겠습니까.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있을수록 파세(波勢)는 더욱 격앙할 것이올시다. 이후의 우리 운동은 저 흐르는 물과 같이 더욱 더욱 힘 있게 진전되리라고 단언합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도 민족해방에 대한 조선인들의 의지와 투쟁을 꺾지 못했다. 조선노동총동맹(1924)을 비롯한 전국적 대중조직 결성과 조선공산당 조직(1925)이 뒤를 이었고, 1925, 1926년에는 권오설이 지도했던 경성 전차 승무원·평양인쇄 직공·경성방직 노동자 파업 등과 암태도 소작쟁의 등의 투쟁이 전개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승하한다. 반일감정이 높아지면서 전국 각지에 추도를 위한 조직이 만들어졌고, 4월 28일에는 송학선(1897~1926)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3·1 만세운동(1919)을 이으면서 이후 광주학생운동(1929)으로 완결되는 국내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6·10 만세운동이 천천히 잉태되고 있었다.

 

조공 중앙집행위원으로 전개하려 한 대중투쟁 6.10만세 운동

 

1925년 조공과 고려공산청년회의 핵심 조직원이 일경에 대거 검거된 이후 조직의 재건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권오설은 그해 12월 재건된 고려공산청년회의 제2대 책임 비서, 조공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조공은 만주·상해·일본에 연락부를 두고 사회주의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가들을 통합한 ‘국민당’을 만드는 데 정치적 목표를 두고 있었다.

 

1926년의 6·10 만세운동은 일제 치하에서 조공이 전개한 가장 대표적인 대중투쟁이다. 그 해 6월 10일 은 순종의 장례가 베풀어질 예정이었다. 권오설은 이날을 이용,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해 3·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조공 중앙집행위원회 산하에 ‘6·10운동 투쟁지도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도부를 꾸렸다.

 

권오설은 상하이의 조공 상하이 해외부의 김단야(1901~1938) 등과 서신 교환을 통해 6·10 만세운동을 논의했다. 그 결과,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를 망라한 ‘대한독립당’ 조직, 6월 10일을 기한 시위운동 전개 등의 투쟁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이 전선 통일 운동은 실패해 그는 권동진 등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구파와의 제휴에 만족해야 했다.

▲6.10 만세 운동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공산당이 전개한 가장 대표적인 대중투쟁이다 . ⓒ 서문당

만세운동을 위한 실무준비에 착수한 권오설은 천도교 청년동맹과 함께 격문을 인쇄하고 지방과의 연락을 유지했다. 전국 58개 도시에 연락망을 완성했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조직하여 유인물 살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원이며 집안 동생인 연희전문의 권오상(1913~?) 등을 비롯한 현장투쟁 지도부도 꾸려졌다.

 

그러나 이 거사의 지도부는 와해하고 만다. 아주 사소한 실수로 격문 및 전단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6월 7일에는 총책임자 권오설이 일부 지도부 인사들에 이어 연행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일경의 경계를 뚫고 권오설의 강력한 지도로, 조공과 고려공산청년회와 긴밀히 이어져 있었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날 인산 행렬이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시작된 시위는 당일에만 여덟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이후 인천·개성·강경·홍성·공주·당진·전주·고창·구례·순창·병영·통영·마산·하동·원산·이원·평양·신천 등지에서도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학생들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뿐만 아니라, 교육·토지제도의 개혁, 8시간 노동제 채택 등을 외쳤다.

 

이 만세 투쟁으로 전국에서 약 5천여 명의 시위대가 연행되었고, 7·8월에는 제2차 조선공산당 관련자 약 백여 명이 붙잡히는 등 검거 선풍이 이어졌다. 6·10 만세운동은 지도부의 와해로 대규모의 전면적 만세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식민지 민중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이 운동의 준비과정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일부(천도교 구파)의 결합 경험은 이후 민족 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 건설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그런데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전면적인 협력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6·10 만세운동의 한계는 상당한 여운을 남긴다.

▲ 권오설의 묘. 검은 빗돌 옆에 낮은 봉분이 우거진 잡초 속에 묻혀 있다 .

자신이 기획하고 추진한 6·10 만세운동의 전개 과정을 살피지도 못한 채 구속된 권오설은 1928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조공의 실체가 드러나자, 일경은 관련자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 그는 다른 피의자들과 함께 고문을 자행한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 경부 등을 고소했다.

 

1930년,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

 

이 사건은 상당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연일 신문 지상에 보도되었고, 고문 항의운동이 전개되었다.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지자, 이에 반발하여 김병로(광복 후 초대 대법원장)를 비롯한 변호인들이 재판부 기피신청을 하여 공판이 중지되기도 하였다.

 

▲권오설 훈장증

권오설은 일제에 맞서 철저한 비타협의 원칙을 지킨 투사였지만, 가족과 집안에 관한 관심과 의무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던 듯하다. 감옥에서 부친과 동생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는 효심과 우애가 절절하다. 일찍이 아버지의 권유로 부림 홍씨와 혼인하였지만, 그는 자식을 두지는 못했다.

 

출옥 100일을 앞둔 1930년 4월 17일 권오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고문으로 온몸이 피멍이 든 채 순국하였다. 그날은 바로 조선공산당 창립 5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일제 경찰이 출입을 막아 장례는 가족들만으로 쓸쓸하고 참담하게 치러졌다.

 

그의 무덤은 경황없어서였을까, 선영이 아니라 가일마을 부근의 풍산 들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다. 뒤늦게 올린 봉분이 설었던가, 주변에 비해 낮고 왜소해 뵈는 나지막한 봉분에 풀이 무성했고, 묘 왼쪽에 세운 검은 빗돌에 새겨진, 아무런 수식 없는 ‘권오설 지묘’ 다섯 글자가 쓸쓸했다.

 

2001년에 가일마을 들머리 풍산 들을 내려다보는 가곡 저수지 옆 언덕에 ‘항일 구국 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紀蹟碑)’가 세워졌다. 2005년 3월 1일에는 오랫동안 독립운동 유공자 포상에서 제외되었던 권오설에게 이웃 오미마을의 김재봉과 함께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굴곡의 역사를 거치며 학생단체와 천도교의 합작품으로 축소됐던 6·10만세 운동도 복권되고 있는 듯하다. 최근의 역사 교과서는 2차 조선공산당이 사전 계획을 인정, ‘좌우합작 운동’으로 표기하면서 좌파의 공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항일 구국 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 2001년에 마을 들머리 저수지 옆에 세워졌다.

그러나 해방과 전쟁, 반세기가 지났지만, 고통의 현대사를 견뎌온 사람들의 가슴에 남긴 상처와 편견은 쉬 아물지 못한 듯하다. 해묵은 반공주의 잣대로 20년대 역사를 재단하는 것은 반역사적 태도라며 권오설과 그의 시대를 기리지만, 멀찌감치 서서 이를 흘겨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념으로 인한 상처와 편견은 아물지 않아

 

그런 이들에게 권오설은 ‘마을을 망하게 한 장본인’이다. 그를 따른 적지 않은 마을 청년들이 감옥에 가거나 거기서 순국했다. 해방 후에는 그의 동생인 권오직(1906~1953)을 따라 북으로 간 청년이 또 서른 명이 넘었으니 이 마을에 서린 상처와 한은 또 얼마이겠는가.

 

마을 어귀에 선 기념비 건립을 두고도 말이 많았다고 했다. 훈장 추서라는 국가의 기림도 그런 인식을 불식시키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인가, 제3차 조공의 핵심간부를 역임했던 김남수의 아들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비문은 통곡과 절규로 읽힌다.

 

“이 부끄러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여기 돌을 세워 선생의 이름을 새김은 검수도산(劍樹刀山) 무릅쓰고 조국의 자유를 추구한 그 의기가 너무 절실하기 때문이며 민중 민족을 위하여 물불도 가리지 않았던 그 사상과 정신이 진실로 사무치게 그리운 까닭인 따름이다.”

 

민족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간 혁명가는 지금 낡고 오래된 사진 속에서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다. 스스로 ‘서대문 우리’라 부른 형무소인가, 벽을 등진 혁명가의 오른쪽 눈자위 부분이 훼손되어 일그러져 보이고, 복제 과정에서 뒤집힌 수인번호가 낯설다.

 

비탈진 공동묘지의 유택에서 풍산 들을 내려다보며 그는 이 겨운 세월을 어떻게 갈무리하고 있을까. 생가터가 콩밭이 되어 버린 세월을 넘어 그는 이제 막 역사에 얼굴을 내민 셈이다. 그러나 안동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이 번다한 세기를 살아가는 뒷사람들에게 그는 여전히 낯선 사람이다. 잊힌 시대와 삶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는지 모른다.


가일마을의 사회주의자들

▲ 남천고택. 1850년에 지은 집으로 경북 문화재자료 324호. 6.10만세운동으로 구속되어 1927년 순국한 권오운이 이 댁 후손이다.

권오설을 따른 집안 청년 중 권오상(1900~1928)과 권오운(1904~1927)은 각각 6·10 만세운동 때 구속된 뒤 각각 1928년과 1927년에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권오설마저 1930년에 옥사해, 한 문중의 세 형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났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모스크바 동네’라 불릴 만큼 가일마을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무게는 만만찮다. 조선노동총동맹 중앙 집행위원을 지낸 안기성(1898~?)도 가일 출신이다. 그는 해방 후 월북, 한국전쟁 중 유격대 제7군단의 이른바 ‘남도부 부대’ 정치위원을 지냈으나 1953년에 숙청되었다.

 

권오설의 막냇동생 권오직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했고 일제 강점기에 두 차례나 구속되어 복역하다 해방 후 출옥했다.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다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중국 대사 등을 거쳤으나 전쟁 직후 안기성과 같은 시기에 숙청되었다.

 

그 외에도 해방 후 안동에서 치안유지회 간부로 활동한 권오헌, 강동정치학원 1기생으로 학가산 유격대를 이끌던 권영남이 있다.

 

이들이 마을에 남긴 자취는 전혀 가볍지 않다. 대체로 고통의 상처로 기억되는 역사지만, 이 마을 청년들이 맨몸으로 부딪친 것은 겨레의 아픔이었으니 민족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들의 투쟁과 희생은 마땅히 기려져야 할 터이다. 마을 사람들이 흠모해 마지않는 조상인 ‘병곡 권구도 권오설을 자랑스런 후손으로 여길 거’라는 김희곤 교수(안동대)의 지적도 그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2007. 9. 10. 낮달

 

참고

· 김희곤 외(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안동 가일마을>, 예문서원

· 김도형 외, <근대 대구 경북 49인>, 혜안

▲ 권오설이 순국 후 그대로 매장된 것을 2008년 발굴해 시신을 수습한 철관.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 ①] 내앞 마을, 일송 김동삼과 월송 김형식

[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 ②] 임청각(臨淸閣)과 석주 이상룡 일가

[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 ③] 자정(自靖) 순국(殉國)의 넋들과 향산 이만도

[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 ⑤] 민족시인 이육사의 항일투쟁

 
 

'모스크바 동네'가 배출한 항일운동가 권오설

[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 ④] 20년대 사회주의 운동, 잊혀진 시대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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