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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겪은 ‘오월 광주’ - ‘사태’에서 ‘민주화 운동’ 거쳐 ‘민중항쟁’으로

by 낮달2018 2026. 5. 15.

5·18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의미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전남대 사대 외벽의 벽화 <광주민중항쟁도>의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당대에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느냐에 따라 그 시대는 각 개인의 기억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당시의 나이와 직업, 사는 곳과 주변 환경, 경험과 인식,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 따위가 동일한 사건과 시대를 다양한 층위의 구조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경북 출신 제대병이 겪은 5.18

 

1980년 5월은, 당시 광주와 전남에서 살던 이들의 기억과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풍문으로 그 소식을 들었던 이들의 그것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이유다. 1979년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된 10·26사태와 12·12 군사 반란 당시 현역병이었던 나는 이듬해 2월 초에 만기 전역해 귀향했다.

 

3월에 복학하여 두어 달 학교에 나갔는데, 5월 중순께 격정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의 대자보가 날마다 학교 게시판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신군부의 무력 탄압을 고발하고 그 우두머리인 전두환을 ‘살인마’라고 부르는 내용이 중심이었는데, 복학생들과 함께 그것을 멀거니 읽다 말고 나는 적잖이 혼란스러웠었다.

 

33개월의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군대 말투조차 버리지 못한 ‘반(半) 사회인’에 불과했던 내게 그 급박한 시위 소식은 매우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던 까닭이었다. 두어 달 전만 해도 나는 이른바 ‘공수부대’원, 5분 대기조로 비상을 대비했었고, 그보다 앞선 시기에는 폭동 진압 훈련에도 동원되었던, 현역 병사였으니 두어 달 만에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 5.18 기록관에 걸린 당시 사진. 전남매일신문 사진 기자 나경택의 사진,
▲ 시민 자치 1일째, 5월 22일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는 여성들.

어느 날, 아침에 등교하니 교문 안에 탱크가 진주해 있었고, 해병대 병사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아마 그날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7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는 1학기 내내 문을 닫았고, 우리는 과제로 시험을 대신했다. 나는 사회인도 대학생도 제대로 되지 못한 채 시골에서 방앗간 일을 하면서 한 학기를 보냈다.

 

<조선일보>로 기웃거려 본 항쟁 소식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는 아버지가 받는 <조선일보>가 배달되고 있었다. 1960년대에 신문을 바꾸지 않으면 방앗간 허가를 취소당할 수 있다는 지서장의 협박에도 <동아일보>를 받았던 아버지는 거듭된 배달 사고에 지쳐 <조선일보>로 갈아탔다고 했다.

 

나는 시커먼 먹컷투성이의 흑백 신문에서 ‘광주사태’ 소식을 읽었다. 시민들은 ‘폭도’로, 항거는 ‘폭동’으로 불리며 매도되는 신문 보도를 읽으며 나는 채워지지 않은 갈증 같은 거로 혼란스러워했다. 보도를 고스란히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사실에 부합하는 정보도 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5월 27일에 계엄군이 도청으로 재진입하여 항쟁이 종결되었다는 소식도 나는 신문에서 읽었다. 열흘 간의 시민 항쟁은 그렇게 요령부득의 단신과 제한된 정보로만 띄엄띄엄 전해졌고, 이어진 것은 깜깜한 침묵의 시간이었다. 광주·전남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그렇게 1980년 5월을 마치 풍문처럼 들으면서 살아야 했다. [관련 글 : 신군부, 광주 재진입 작전으로 항쟁 진압]

▲ 광주민주화운동은 군부독재에 항거한 시민 봉기, 한국 민주주의 발화점이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연 건 9월이 되어서였고, 돌아온 학교에는 기관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이후 내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구 시내에는 단 1건의 시위도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우리 복학생들은 교정의 곳곳에서 학교 앞 술집에서 우리가 풍문으로 들은 광주의 5월을 회고하는 게 고작이었다.

 

5.18 - ‘광주사태’, ‘광주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까지

 

신군부 집권기(1980~1987) 내내 5·18은 정부와 관변 언론에 ‘광주사태’였고, 시민들은 ‘폭도’로, 항거는 ‘폭동’으로 불리며 매도됐다. 정부 공식 명칭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변경된 건 1988년 제6공화국에 들어와서였고, 이후 민주·진보 진영에서는 ‘광주민중항쟁’으로도 널리 부르기 시작했다.(물론 이 이름은 공식적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7년에는 ‘5·18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최종 지정되며 이 이름이 완전히 자리 잡았다. [관련 글 : 사태항쟁’, 혹은 나이스네이스(NEIS)’]

▲ 열흘 간의 항쟁 기간 광주시민이 보여준 놀라운 공동체 의식은 모든 항쟁의 귀감이다.
▲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 민주화운동의 다양한 기록물

항쟁 46돌, 진실은 더디게 전파되는가

 

200편이 넘는 ‘역사 공부 「오늘」’을 썼지만, 나는 5·18 광주민중항쟁 이야기를 때맞춰 쓰지 못하고 계속 미루기만 했다. 그건 항쟁의 역사가 가진 무게 때문이었고, 내가 그걸 제대로 겪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5·18을 다룬 글을 쓴 게 항쟁 43년 뒤인 2023년 5월이었다.[관련 글 : 5·18, 무도한 군부의 학살에 맞선 시민들의 응전] 그리고 지난해엔 45돌을 맞은 광주를 15년 만에 다시 찾았었다.[관련 글 : 그 도시가 맞은 45년 뒤, 더 선명해지는 항쟁의 기억]

 

항쟁 46돌을 맞는 오늘에는 이제 오월 광주는 알려질 만큼은 알려졌다. 항쟁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쓴 이재의·전용호·황석영 작가를 비롯,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원중의 대중가요 ‘바위섬’, 위르겐 힌츠페터와 테리 앤더슨 등 국제사회에 광주항쟁을 알린 5·18의 기록자들의 위험을 무릅쓴 용기에 힘입은 바 크다. [관련 글 : 오월 광주의 진실은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나]

 

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비롯한 짤막한 노래 한 곡에 지나지 않지만, 거기 담긴 비장미와 함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금지곡과 보수 정당의 기피 등을 넘어 오늘에까지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비록 구체적인 사실을 가리키지는 않더라도 그 노래에 담긴 건 항거의 정당성과 역사성이었다. [관련 글 : 임을 위한 행진곡에 담긴 건 피로 얼룩진 역사와 진실이다]

▲ 고 김남주 시인의 5.18 관련 시 '학살 1'은 광주에서 이루어진 학살을 고발하고 있다.

항쟁의 역사적 가치를 되짚으며

 

항쟁 46돌을 맞으면서, 고 김남주 시인이 쓴 시 학살 1’을 읽는다. 시 전편에 팽팽하게 담긴 긴장된 시간의 켜를 하나하나 들추면서 46년 전에 빛고을에서 흘린 임들의 피와 눈물을 생각해 본다. 간략하게 정리한 광주민중항쟁을 살펴보고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들여다보는데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서늘한 감동으로 목이 잠겨온다. 

 

 

 

2026. 5.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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