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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가 맞은 45년 뒤, 더 선명해지는 ‘항쟁의 기억’들

by 낮달2018 2025. 5. 18.

광주, 2025년 5월 17일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전일빌딩 옥상에서 바라본 광주시 전경. 어쩐지 광역시 같지 않은, 개발되지 않은 지방 소도시 같은 느낌이 있었다.
▲ 5.18 45주년 기념 행사의 각종 팸플릿들.

광주, 그리고 다시 45년

2022년 기준 대한민국 내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202412월 기준으로 총인구는 1408,222명이다. 한때는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였던 광주(光州) 이야기다. 통일신라 시기엔 무주(武州)로 부르던 이름이 광주로 바뀌게 된 것은 940년 고려 태조 때다.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전라남도와 함께 호남(湖南) 지방을 구성하였지만, 광주가 호남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광주가 이 지방의 경제와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 것은 서울과 호남을 잇는 호남선(湖南線)이 광주를 관통하면서부터다. 광주는 1986년 직할시로 승격되어 전라남도와 별도의 행정 체계로 바뀌었고, 1995년 광주광역시로 개칭된 뒤 현재의 행정구역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광주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호남 지방 정치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19193·1운동과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등 주요 독립투쟁이 발발한 지역이기도 했던 광주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민감한 지역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1980년 광주와 전라남도 지역에서 불길처럼 타올랐던 5·18 광주 민주 항쟁 때문이었다.

 

5·18 광주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뼈아픈 비극적 사건이었고, 그 이전은 물론 이후의 모든 민주주의 역사를 압도한 사건이었다. 전두환 등 신군부가 자행한 불법적 헌정질서 파괴 범죄와 부당한 공권력에 대해 주권자인 광주 시민들은 저항권을 행사했다. 이 사건으로 군의 발포와 물리적 폭력 행사로 시민들은 학살을 당해 다수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했다.

 

이후, 45년이 흐르는 동안, 특별법이 제정(1995)되고, 학살 책임자에 대한 불완전한 단죄(1996~1997)가 이루어졌다. ‘5·18민주화운동 국가기념일제정과 5·18민주묘지가 준공(1997), 김대중 정부 출범 후 ‘5·18기념공원조성과 ‘5·18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제정(2001), ‘국립5·18민주묘지’(2002), 5·18민주화운동 제23주년 기념식에 노무현 대통령 참석(2003) 이래 이명박 대통령도 기념식에 참석(2008)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은 제도적으로 안정적 지위를 갖추는 듯했다.

 

2011년에는 ‘5·18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재가 결정되었지만, 일부 극우 세력이 5·18 때 광주에 북한군특수부대 600명 개입해다는 주장이 돌출(2013)되고, 항쟁의 진실을 왜곡하는 전두환 회고록’(2017)이 나오는 등 항쟁을 왜곡 폄훼하는 망동이 이어졌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했다.

 

202310월에는 옛 전남도청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20241226일에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 결과 국가보고서가 제출되었다. 그리고 20255, 다시 광주는 45돌을 맞았다. 전국에서 많은 시민과 단체들이 광주로 모여들고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빛고을을 찾다 

517, 민족문제연구소 구미 지역위원회(위원장 정규환 목사)에서도 전세 버스로 광주를 찾았다. 우리는 광주시청의 여성 공무원과 민문연 광주지부 사무국장의 안내로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차례를 기다려 헌화 참배했고, 유영봉안소를 거쳐 묘지를 돌아보았다. (관련 사진은 모두 개인정보와 초상권 문제를 고려하여 뒷모습으로만 썼다.)

 

그리고 5·18 사적지인 전일빌딩 245를 돌아보았고, 5·18 기록관에서 기록으로 남은 5·18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광주 시내 일원에서 펼쳐지는 제45주년 5·18민중항쟁 기념행사 ! 오월, 다시 만난 오월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은 사진으로 돌아본 5·18 민중항쟁 45주년을 맞은 광주의 모습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선명해지는 항쟁의 기억이었다.

1. 참배와 헌화

▲ 민문연 구미의 이번 광주 답사에는 모두 35명이 참여했다. 회원들이 막 묘지에 도착하여 참배를 준비하고 있다.
▲ 추모문을 향해 묘지로 오르고 있는 일행들. 어린이와 중학생도 몇 명 참여했다.
▲ 단체로 참배하고이는 모습. 이어서 조별 참배가 이어졌다.
▲ 신묘역의 10구역. 봉분이 없는 것은 희생자의 시신이 없는 까닭이다.
▲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낳은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 열사의 합분. 꽃바구니 2개가 놓여 있다.
▲ 한강의 소설 '소년이온다'의 주인공 모델인 문재학 군의 묘.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이 있다.
▲ 5.18 민중항쟁 알림판,
▲ 묘역 참배를 마치고 이동하는 민문연 회원 일행

2. 보도 사진으로 되돌아보는 ‘항쟁의 순간’

▲ 80년 5월 22일, 상무관 옥상과 전남도청 앞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 이창성 제공 사진. 이 사진들은 도청 건축 공사장 외벽의 실사 사진이다.
▲시민 자치 1일째, 5월 22일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는 여성들.
▲ 시민자치 5일째. 상무관으로 옮겨진 사망자의 관들과 조의하는 시민들.
▲ 시만자치 5일째, 상무관 앞에사망자추모를 위해 운집한 시민들
▲ 시민자치 5일째. 전남 도청 앞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
▲ 시민자체 3일째. 전남 도청 앞 광장 제2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에 운집한 시민들의 전두환화형식
▲ 시민자치 5일째. 농성동 죽음의 행진, 시민수습대책위원들과 대치하고 있는 계엄군.(1980.5.26., 도청-농성동, 4km 도보행진)

3. 전일빌딩245와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만난 그날의 기록들

▲ 민주의 종각 부근의 장미꽃,. 45년 만에 행사는 흥겹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 전일빌딩 주변 거리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중간 위쪽으로 분수대가 보인다.
▲ 전일빌딩의 설치 미술 작품 '검은 하늘 그날 :전일빌딩'(정창역 작)의 윗 부분. 여러가지 구경의 탄환이 전일빌딩을 향해 걸려 있다.
▲ 전일빌딩의 외벽에 까만점으로 표시된 탄흔은 모두 245개여서 빌딩 이름도 '전일빌딩245'로 불린다. 위 작품의 아랫부분.
▲ 전일빌딩 안 전시장에 매달아 놓은 헬리콥터. 전일빌딩의 헬기 사격의 표적이 되었다는사실을 상징하는 설치물이다.
▲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앞의 설치물 '기억의 창고'
▲ 기록관에 걸린 당시 사진. 전남매일신문 사진 기자 나경택의 사진,
▲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의 전시 사진. 당시 중앙일보 기자 이창성 기자의 사진이다.
▲ 기록관의 목관. 태극기로 두껑을 덮고 광목으로 여러차례 묶었다.

4. ‘다시 만난 오월’을 ‘민주주의 대축제’로

▲이번 행사의 기조는 단순 추모가 아니라 민주주의 대축제다. 농악대의 길놀이. 18일에는 프로야구 경기에서 응원도 이루어졌다.
▲ 농악대의 깃발을 들고온 기수가 깃발을 들고 묘기를 부리고 있다.

 

 

2025. 5.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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