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폐역과 급수탑을 찾아서(20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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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군 산성면 화본리를 처음 찾은 건 2013년, 그러니까 구미로 옮아온 이듬해 늦가을이다. 당시엔 경상북도였던 화본은 예나 지금이나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산성면은 인근 팔공산성의 이름을 땄고, 마을 이름은 ‘산은 꽃의 뿌리와 같으므로 꽃의 근본이다[산여화근고화본(山如花根故花本)]’라는 뜻에서 온 ‘화본(花本)’이다. 이 화본리 824-1번지에 철도 마니아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뽑은 화본역이 있다.
13년 만에 다시 찾은 화본역, 소속 지방도 교체되고 지금은 폐역이다
그때, 화본역에 잠깐 들렀다가 인근의 문 닫은 중학교를 개조해 만든, 흔히 추억박물관으로 불리는 “추억의 시간여행!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를 찾았었다. 추억박물관은 60~70년대의 초등학교 교실 한 칸과, 이젠 골동품이 된 그 시절의 생활용품이나 도구 따위를 진열해 놓고, 또 70년대 골목길을 재현해 놓은 일종의 테마 박물관이었다. 구멍가게, 소리사, 사진관, 연탄 가게, 서점과 만화방, 공중화장실 등이 다닥다닥 어깨를 붙이고 있는 좁은 골목길을 둘러보며 우리는 마주 보며 빙그레 웃곤 했다. [관련 글 : 첫아이 ‘돌사진’ 찍던 그 사진관…추억 돋네요]
그리고 다시 13년 뒤인 올해 1월 4일, 나는 매년 한 차례 만나는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료인 김 시인과 함께 화본역을 다시 들렀다. 13년 전에는 입장권을 사서 역 구내 플랫폼을 돌아보았지만, 화본역은 2024년 12월에 폐쇄되었다. 중앙선의 복선 전철화와 함께 의흥면 파전리 방향으로 철로가 옮겨져 의흥면 연계리에 새로 지은 군위역으로 업무를 이관한 뒤, 화본역은 2024년 12월 20일에 봉림역·우보역과 함께 폐역됐다.



화본역은 관광 테마 역으로 최근 개발되었기 때문에, 역사 건물과 급수탑은 관내 유적으로 보존 중이다. 역 구내에 남은 급수탑은 한국철도공사가 선정한 ‘준 철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북도 안에는 국가 등록 문화유산으로 안동역 급수탑과 영천역 급수탑이 남아 있다.
화본역의 급수탑, 증기기관차 시절의 유적
13년 전에는 급수탑을 돌아보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텅 빈 대합실을 지나 플랫폼 안으로 들어갔다. 날씨가 꽤 찼고, 일요일이지만, 오전이라 역 광장도 텅 비어 있었다. 몇 개의 철로가 남아 있는 플랫폼을 지나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들어서자 저만큼 벌거벗은 나무 사이로 급수탑이 나타났다.



90년 묵은 급수탑은 구실 잃고 준 철도 기념물로 남았다
증기기관차가 달리던 시절, 증기 발생을 위해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했으므로 기차역마다 설치된 급수탑은 기관차에 물을 보충해 주는 탑 형태의 구조물이다. 펌프로 물을 탑 상단의 물탱크까지 끌어올린 뒤, 중력의 낙차를 이용해 동력 없이도 물을 일정하게 기관차에 공급한 것이다.
증기기관차가 사라지면서 제구실을 잃은 급수탑도 종일 열차가 교차하는 대도시의 역사에는 일찌감치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시골의 작은 역이나 폐역 등지에는 아직도 급수탑이 남아 있는데 철도 산업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라 국가 등록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급수탑 앞에는 안내판 앞에 마치 삿갓 모양을 지붕을 덮은 현대식 정자 건물이 섰는데, 이 자리는 과거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인 ‘급수정(井)’ 옛터다. 안내판의 설명에 따르면, 급수탑은 1930년대 말에 지어졌고, 높이가 25미터 하단 지름 5미터, 상부 물 저장 탱크 지름 4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급수탑을 한 바퀴 빙 둘러보니 낡은 콘크리트 표면에는 담쟁이넝쿨 줄기가 말라붙어 있고, 남쪽으로 난 창문 안에는 여자 어린이와 고양이상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북쪽으로 난 돌계단 위 열린 대형 나무문 안쪽에는 탑 상층 물탱크에 끌어올리는 용도와 저장한 물을 증기기관차에 공급하는 용도로 쓰이던 철관(파이프) 두 개가 보였다.






급수탑 내부의 바닥 가운데 자연석을 두고 그 위에 흰빛의 동물상 하나가 서 있는데, 그걸 기린이라거나, 유니콘, 혹은 흰말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건 알 수 없다. 백 년 가까운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탑의 내부 안벽에는 급수탑을 운영하던 시절의 노동자들이 써 놓은 듯한 ‘석탄 정돈’, ‘석탄 절약’ 등의 글자가 선명했다.
폐역이 됐지만, 화본역은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간이역’이다
글쎄, 증기기관차는 영화나 그림에서나 구경한 세대라, 거기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이라 해서 들르긴 했지만, 무어 그리 특별한 감회가 있을 턱이 없다. 단지 그것은 이제는 폐역이 된 시골 간이역 화본역에 남은 근대의 흔적일 뿐이고, 화본을 찾는 나들이객에겐 별종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사진 몇 장을 찍고 플랫폼을 빠져나오는데, 철길 건널목 앞에 노송이 두 그루 서 있다. 플랫폼에 소나무도 예사롭지 않고, 마치 미니어처처럼 서 있는 역사가 아담하다. 플랫폼 쪽의 역사 정수리에는 세로로 쓴 간판에 쓰인 예스러운 글꼴의 ‘화본’ 글씨도 썩 잘 어울린다. 이 역사의 스케치나 수채화가 인터넷에 떠도는 이유가 다 있는 셈이다.


우리는 서둘러 화본역을 떠났는데, 뒤늦게 이 글을 쓰면서 역사 왼쪽에 ‘화본역’ 시비가 있다는 걸 알았다. 사진에서 시비를 확인하고 찾아보니 <바다에 누워>(1980)를 낸 박해수(1948~2015) 시인의 작품이었다. 나는 50년도 전의 고교 시절을 떠올리며 잠깐 옛 생각에 젖었었다.
화본역 시비, 박해수 시인, 반세기도 전의 기억
2010년에 나는 블로그에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다룬 글을 쓰면서 1985년 부산 출신의 대학생이 불러 대상을 탄 ‘바다에 누워’를 이야기했다. 그 노랫말은 박해수 시인의 시였고, 고교 졸업반이었던 내가 경주에서 열린 어떤 백일장에 나갈 때 그이는 우리의 인솔교사였다. 그해 한 문예지의 신인상을 타고 등단한 그이는 같은 재단의 여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는 물론 뒷날 내가 역추적하여 확인한 것이다.)[관련 글 : ‘은유’가 사라진 시대에 듣는 ‘은유’의 노래들]


시 ‘바다에 누워’는 선생의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작(1974)이다. 나는 선생의 이력을 26년이 지난 그때야 간신히 갈무리했는데, 나는 선생의 얼굴도 물론 기억하지 못했다고 썼다. 블로그의 글을 선생이 읽었던지, 연락처를 남기셔서 나는 선생과 통화할 수 있었다. 언제 한 번 찾아뵙겠다고 했지만, 그건 의례적인 인사에 그쳤다.
2019년에 나는 대구에서 시를 쓰고 있는 벗을 통하여 선생이 2015년에 세상을 버리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향년 예순여덟. 그리고 10년도 더 흘러서 나는 그가 산 세월보다 더 나이 먹었다. 대중가요 바다에 누워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내 청춘의 한때 경주행에 동행한 박해수 시인을 생각하곤 한다.
언젠가 내 앞에서 책을 펴 들었던 아이들도 내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나보다 더 나이 먹어서 나를 기억하게 될까. 그저께 설날을 지나 병오년을 맞으며, 폐역된 시골 간이역 화본역과 거기 외롭게 서 있는 낡은 급수탑, 그리고 역사 앞 오석의 빗돌을 남긴 시인을 다시 생각한다.
2026. 2.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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