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만세, ‘운동’ 아닌 ‘혁명’이다
3·1독립선언 아흔다섯 돌을 맞는다. 아침에 일어나 태극기를 달고 어저께 <오마이뉴스>에서 읽은 ‘정인보 평전’(김삼웅)을 떠올리며 정인보 선생의 노랫말로 만들어진 삼일절 노래를 듣는다.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그 짧은 글귀엔 3·1 독립선언을 바라보는 선생의 관점이 오롯하다.
4대 국경일인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의 노래 가사를 위당에게 맡긴 것은 훼절로 얼룩진 지식인들 속에 선생의 지조와 학식, 인품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고. 선생이 쓴 노랫말에 넘치는 우리 고유어의 아름다움이 오늘따라 새롭다. [관련 글 : 위당 정인보의 ‘아름다운 우리말 맵시’]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 식민지배에 저항해 들불처럼 일어난 민족해방 운동이다. 3월 1일이라는 발발일이 상상의 확장을 막지만 정작 이 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 두 달이 넘게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운동 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라는 평가는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교과서로 3·1을 배운 사람들에게 그것은 류관순 열사, 제암리 사건, 탑골공원, 태화관, 민족대표 33인 등의 관련 어휘로만 기억될 뿐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역사라기보다 박제화된 과거에 그친다. 미체험의 역사란 대중들에게 그런 방식으로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3·1운동을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머리 아픈 기미독립선언문으로 기억하기 쉬운 것이다.
언젠가 역사를 가르치는 후배 교사에게 왜 ‘3·1’이 ‘운동’이냐고 물었다. ‘동학’이 ‘혁명’이 아닌 ‘운동’으로 쓰이는 이유도 곁들여 물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아물아물하긴 하지만 후배의 답변은 내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주지 못했던 것 같다.
<미디어오늘>의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이 3·1운동의 혁명성을 앞장서 부정하면서 ‘3·1혁명’의 의미가 축소됐다는 역사학계 주장이 나와 시선을 끌었다고 한다. 이 주장이 나온 것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제국에서 민국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3‧1혁명 95주년 기념 학술토론회에서다. [관련 기사]
3·1 독립선언, ‘운동’인가, ‘혁명’인가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는 기념 강연을 통해서 ‘운동’과 ‘혁명’의 의미를 짚었다. ‘운동’은 흔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 시대 역사를 움직였던 일련의 ‘사건’이고, ‘혁명’은 그 운동력이 체제를 바꾸었거나 거기에 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선진들이 ‘3·1혁명’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독립 운동적 측면에서는 ‘민족혁명’의 성격을 가졌다고도 했고, 전근대적인 정치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정치사회체제를 재래했다는 점에서는 ‘민주혁명’으로 보았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3·1운동에서 나타난 ‘민주정신’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 건설로 구체화 됐다”라고 하며 그것이 “군국주의 일제 이후 서구화로 포장된 이승만의 위장 민주주의와 일제 군국주의 아류인 박정희의 유신 민주주의를 극복하는 데에 결정적인 힘이 됐다”라고 평가했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에 따르면 실제 3·1운동은 ‘혁명’으로 평가되기도 했다고 한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에는 ‘3·1대혁명’이라고까지 명명했고, 해방 이후 제헌국회에 제출된 헌법 초안엔 ‘3·1혁명’으로 표기됐다는 것. 다음은 이 위원의 주장.
“이는 독립운동 진영의 3·1혁명 인식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당시 제헌국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승만 세력과 한민당에 의해 ‘3·1혁명’은 ‘3·1운동’으로 바뀌었다. 제헌헌법 전문 심의과정에서 ‘3·1혁명’의 혁명성을 앞장서서 부정한 이승만은 필요에 따라 ‘3·1혁명’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결국 이승만이 ‘3·1혁명’을 오로지 정권의 획득과 유지라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혁명’을 내세운 것과 배척한 것을 되풀이한 이중성이야말로 ‘3·1혁명’의 의미가 축소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3·1운동은 거족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전개되었지만, 일제의 식민지배 체제를 바꾸지는 못했다. 일제는 기존의 무단 통치를 기만적인 ‘문화정치’라는 이름으로 전환했으니 이는 기실 교활한 민족 분열 정책의 위장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이날, 10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 3‧1운동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고 3‧1운동의 위상을 재평가하기 위한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위원회는 “기미 3·1운동의 주체가 일반 백성이었다는 점에 주목해 3·1운동은 백성이 궐기한 민(民) 주체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민간 차원의 기념사업이 필요해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또 3·1운동은 단순한 항일운동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일대 전변의 계기를 제공한 혁명’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말한다. 3‧1 혁명을 계기로 군주제가 극복되고 민주 공화제 이념이 뿌리를 내렸으며,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 또한, 크게 높아졌다는 시각이 확산했다는 것이다.
운동과 혁명 사이에 얼마만 한 본질적 차이가 있는지는 문외한으로서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고단한 근현대사의 진전 과정의 굴곡과 파란으로 비추어보건대 ‘혁명’이 ‘운동’으로 바뀌는 상황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듯하다.
5년 후면 100주년을 맞이하니 3·1운동이 빛바랜 역사 저편으로 잊혀 가고 있다는 우려도 기우만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 청산 문제 하나 매듭짓지 못한 상황에서 최근 가속화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흐름은 예사롭지 않다. 아흔다섯 돌 삼일절을 맞으며 당대 역사의 현재적 의미를 새롭게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2014. 3.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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