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달리며 건너다본(주마간산) 유튜브 주유기 ① 개관(전체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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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주마간산(走馬看山)’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자주 쓰이는 말이다. “말을 타고 달리며 산천을 구경한다는 뜻으로,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대충대충 보고 지나감을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굳이 구하지 않아도 되는 이 말의 뜻은 ‘수박 겉핥기’라는 속담으로도 갈음할 수 있겠다.
컴퓨터에 입문한 게 1990년쯤이니 이력이 남보다 빠지지는 않는다. 천리안이나 나우누리 같은 PC통신부터 시작하여 남 먼저 인터넷도 만났는데, 유튜브를 일상적으로 즐기기 시작한 건 몇 해 되지 않는다. 처음엔 정치·사회·경제 등 시사 관련 콘텐츠를 중심이었는데, 언젠가부터는 그게 지겨워져서 다큐멘터리, 군사, 레저 쪽으로 시야를 넓히려고 하는 중이다.
유튜브는 글을 쓰거나, 인터넷으로 뉴스를 읽는 시간 외에 한가해지는 때에 찾는다. 뉴스는 유튜브로 송출하는 지상파나 종편 같은 채널에서만 볼 뿐, 개인 유튜버 채널에서는 뉴스를 읽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건 뉴스의 본령을 벗어난 유튜버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누구나 자신의 선호도 깨닫게 되고, 유튜브 콘텐츠의 장단점 등을 얼마간 파악하게 된다. 이 글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좀 가벼운 발걸음의 주유기(周遊記)다. 우리말로 하면 ‘돌며 노닌 기록’쯤 되겠다. 이는 물론 나의 지극히 제한적인 유튜브 경험과 그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에 따른 평가일 뿐이니, 그쯤으로 보아주시면 좋겠다.
방송 및 OTT를 능가하는 가장 강력한 미디어 플랫폼으로 진화한 유튜브


글자를 읽어야 하는 종이신문의 기사, 진행을 맡은 남녀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방송 뉴스만 보다가 맞닥뜨린 유튜브의 세계는 현란하다. ‘슴슴하게’ 무친 나물 맛에서부터 아주 달고 맵고 짠 이야기가 짤막하게(숏폼), 적당한 길이로, 느긋하게 시선을 붙잡아 두는 수십 분짜리 이야기(롱폼)까지 유튜브에는 이야기가 소식이, 논평이, 조롱과 아부가 넘친다.
어린이부터 고령의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유튜브의 구독자들은 저마다의 취향과 기호에 따라 이리저리 쓸려다니며 잘 차려진 진수성찬 같은 콘텐츠를 소비한다. 마침내 “글로벌 문화의 중심(Epicenter of Culture)이자, 방송 및 OTT를 능가하는 가장 강력한 미디어 플랫폼”(구글 제미나이)으로 진화했다. 이쯤 되면 유튜브는 단순한 영상 공유 플랫폼을 넘어 이 난만한 21세기를 압축 상징하는 압도적 미디어가 된 것이다.
여든이 넘은 우리 누님도 열심히 딸내미가 내어주는 회비 덕분에 광고도 없이 유튜브를 즐기고 있고, 나도 아내도 우리 아이들도 적지 않은 시간을, 유튜브를 보면서 죽이고 있다. 유튜브는 복잡한 정의 필요 없이, 시간을 죽이는 데는 그만한 부담 없는 매체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튜브는 좀 지겨워지면서 어떤 때는 그게 그거인 이야기를 여러 번 우려먹는 뻔한 콘텐츠거나 하면서 그걸 처음 발견하던 때의 마음이 뜨기 시작한다.
‘제사보다 젯밥에 정신이 있다’
이유는 뻔하다.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선보이는 신규 콘텐츠들이 꾀는 것은 한국 제작자(크리에이터)가 전 세계 조회수 상위권을 기록하며 글로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발해서다. 글로벌 영향력보다 더 마음을 빨아당기는 게 그들이 벌어들인다는 수억, 수십억의 유튜브 수익이라는 것 두말할 필요도 없다.
좀 부정적으로 이르면, 유튜브 생태계에는 조회수 장사를 통해 고수익을 꿈꾸는 유튜버들이 득시글거린다고 봐도 된다. 이른바 극우 정치 유튜버들이 ‘조회수 장사’를 위해서 욕설과 혐오를 확대 재생산해 내듯이 조회수를 올려려고 거짓과 과장으로 버무린 뉴스와 소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혐오와 적대적 갈등
유튜브를 실행하면 떠오르는 콘텐츠들의 제목과 내용은 절대 일치하지 않는다. 이른바 제목 낚시, 또는 어그로는 이제 유튜브 생태계에서 일상이 되었다. 몇 년쯤 유튜브를 드나들다 보니 어떤 제목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대충 짐작할 만하기에 이르렀다. 유튜브는 결코 전통적 의미의 뉴스가 아니라는 걸 살핀다고 해도 완전히 뉴스의 의미를 뒤집는 해괴망측한 소식을 번연히 내거는 유튜버들로 넘치는 것이다.
아주 극적인 전개로 시민들을 경악하게 하는 한국의 정치가 생산하는 건 정치적 양극화로 인한 적대적 갈등의 심화뿐 아니라, 그걸 먹이 삼아 극단적 혐오와 적대적 저주를 일삼는 정치 유튜버들을 양산하기도 한다. 그런 극단화가 결국은 중도적이고 상식적인 시민들을 유튜브에서 내칠 수도 있을 터이다.


물론, 유튜브의 장점과 유용성도 단점보다 더 많을 수 있다. 알고리즘에 따라 제한된 영역(장르)의 콘텐츠만 보고 있지만, 시청 영역을 넓히면 뜻밖의 콘텐츠를 비장한 채널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제한된 채널만 쳇바퀴 돌 듯하고 있는 데서 과감하게 나아가고자 하는 시청자의 노력에 달렸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겠다.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연구자도 아니고, 그냥 소일 삼아 유튜브를 노니는 한량의 시선에서 바라본 유튜브와 유튜버의 세계, 쉬엄쉬엄 몇 꼭지로 나누어 써 보려고 한다. 물론, 이 주관적 글에 대한 어떤 책임이 필요하다면 전적으로 자신이 진다는 점도 분명히 밝혀둔다.
2026. 2.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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