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달리며 건너다본(주마간산) 유튜브 주유기 ② 정치·사회(지식·정보) 콘텐츠들

누리꾼들을 유튜브 세계로 이끈 일등 공신은 무어니 해도 정치 관련 유튜브일 것이다. 처음에는 유튜브에서 지상파나 종편의 못 챙긴 뉴스를 보는 거로 시작하였을 것이다. 특히 아침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방송되는 시사 라디오 방송은 모두 유튜브로 영상도 내보내니 이들 프로그램을 통하여 유튜브로 입문한 이들도 꽤 있을 것이다.
기존 매체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의 해소처 유튜브
비록 유튜브 고객을 겨냥해 영상을 내보내긴 해도 이들 방송은 대체로 라디오 지상파여서 뉴스를 내보내는 데 ‘산술적 평균’이라는 방송의 기본 원칙을 지키는 편이다. 이 원칙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대체로 문제의 성격이 너무나 분명해서 진행자의 중립적 발언도 편향으로 보이는 착시일 뿐이다.
하긴 우리 사회가 최근 몇 년간 얼마나 역동적인 변화를 겪어 왔는가 말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치 상황과 사회의 모습을 읽어내려고 사람들은 이른바 ‘래거시(Legacy)’로 통칭하는 기존 매체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유튜브에서 해결하려 한 것이다.

마침맞게 유튜브에는 그런 성미 급한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데 최적인 ‘확증 편향’으로 무장한 정치 유튜버들이 포진해 있었다.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 이른바 내란의 계절을 거치면서 분출하는 정치적 갈증이 얼마겠는가. 그런 시민들을 붙잡은 건 산술적 평균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기다, 아니다를 분명하게 갈라놓아 주는 이들의 명쾌한 편 가름이었다.
갈증과 ‘알고리즘’의 만남, 그리고 확증 편향
이들의 이 행복한 만남은 ‘알고리즘’이라는 원군의 도움을 받으며 상승일로로 폭주한다. 어제 내가 본 영상, 그저께 내가 들른 채널, 아침에 내가 찾은 쇼츠 등을 내가 쓰는 모바일과 태블릿 PC의 유튜브는 잘 기억해 두었다가 같은 영역의 영상과 채널, 쇼츠 등으로 화려하게 시전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고 자주 찾고, 흥미로워하고, 또는 지지와 동의를 아끼지 않는 채널과 콘텐츠에 아주 푹 빠져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건 단단해지면서, 이른바 ‘확증 편향’은 뿌리를 내리고, 자기 생각과 다른 어떤 논의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독선의 늪에 빠진다.
그런 사람이 늘수록, 그들의 취향과 정치적 태도에 영합하는 정치 유튜버들의 맞장구도 는다. 그리고 다시 그런 유튜버의 선동과 선전에 고무된 구독자들이 더 강하고 분명한 입장과 반대편에 대한 적의와 혐오로 무장하면서 이 생태계는 악순환하게 되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살아 있는 한, 내가 여는 유튜브는 기왕에 내가 선택한 방향과 경향으로 흐른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끄적이는 얘기는 전적으로 그 알고리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1. 정치 유튜브

정파적 색깔을 분명히 하는 유튜버들

지상파나 종편의 정규 방송을 유튜브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은 일단 논외다. 여기선 일반 방송 프로그램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제한(분량이나 내용의 불편부당, 방송 언어 등)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방송으로 나가지 않고 유튜브에서만 방영하는 방송은 그런 제한에서 벗어난다.
지상파 방송이나, 종편 등 방송사에서 내보내는 정치 관련 영상이 흥미로운 점은 그래서다. 단순한 산술적 평균과는 무관한 패널이 출연하는 데다가 이들은 방송의 제한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진솔하게 의견을 개진한다. 사안을 대하는 패널의 관점과 태도가 날것으로 드러날 수 있긴 하지만, 이들은 최소한의 공정성을 유지한다고 여기므로 나는 이런 영상을 비교적 저항 없이 시청하곤 한다.
그러나 기자 출신이거나, 진보 진영으로 분류되는 유튜버들의 방송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이제 더는 정파적 색깔을 감추거나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유튜브는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때로 이들이 보이는 날것의 스탠스(stance), 의도적인 특정 정파적 태도 앞에선 입맛이 좀 쓰다.
이른바 ‘진보’로 분류되는 이들 유튜브는 기본적으로 진영의 이해를 일정하게 대변하지만, 그건 사안별로 다를 수 있다. 이들이 진보라고 하더라도 진보 진영의 패착이나 실수를 감싸거나 변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워낙 강경한 지지자들의 감시가 무섭고, 자칫 말 한마디에 구독자가 떨어져 나가는 불상사도 막아야 하므로, 그건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긴 하다.
그러나 그나마 그들의 불편부당한 태도에 대한 신뢰로 그들 채널을 찾는 이들에겐 그런 선택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보여주는 색깔은 씁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비록 개인이지만, ‘1인 매체’로 불리는 언론인으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이다. 지지자들의 강력한 반응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스탠스를 망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현실은 정말 우려스럽다.
명백히 친 정당을 표방하는 유튜버들은 더 말할 게 없다. 언제부턴가 이들의 영상을 더는 시청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언제나 객관적 지표마저 자신의 이해에 충실하게 해석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희망 사항을 그 해석에다 담는다. 아무리 충정이라고 포장해도 그건 용인의 한계를 넘는다.
조회수를 늘리려는 의도를 고려해 준다고 하더라도 ‘낚시성’ 제목 붙이기도 심각할 정도다. 거기 속아서 들어갔다가
허탕을 치는 일이 두어 번 거듭되면서 나는 그들의 영상은 항상 ‘패싱’한다. 제목으로 유인하는 건 개인만이 아니다. 지방 방송사들도 적당히 마사지한 제목을 즐겨 쓴다. 이들은 ‘충격’, ‘살벌’, ‘대박’, ‘얼음’ 따위의 자극적인 명사로 사실은 일상적인 상황을 포장하는 것이다.
2. 지식 정보

유튜브 자체 콘텐츠 카테고리에는 없지만, 건강·군사·이슈 등을 다루는 콘텐츠를 ‘지식·정보’라고 분류해서 살펴볼 수 있겠다. 하나의 사안을 두고 이루어지는 정보·논의·서술 형식의 유튜브에서 드러나는 문제도 비슷하게 전개되는 것 같다.
과장과 거품, ‘국뽕’, ‘백가쟁명(百家爭鳴)’에 ‘백화제방(百花齊放)’
먼저 30% 전후의 과장과 거품, ‘국뽕’을 자극하는 서술은 모든 관련 콘텐츠에 비슷하게 나타난다. 건강 관련 콘텐츠는 비슷하면서도 각자 독자성을 내세우는 내용에 집중하면서 그야말로 ‘백가쟁명(百家爭鳴)’에 ‘백화제방(百花齊放)’이다. 건강에 좋은 운동과 음식과 약, 습관 등을 다루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협박같이 느껴지는 대목도 많다.
‘○○하면 암 걸린다’와 같은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하는가 하면, ‘○○하면 몸이 쇳덩이가 된다’는 형식의 서술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고, 증상마다 처방도 제각각이다. 운동처방사, 피트니스 매니저, 의사, 간호사, 약사, 한의사 등 관련 전문가는 좀 많은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한국 방산이 새롭게 주목받으며 이른바 ‘밀덕(밀리터리 덕후)’들의 분주하다. 대체로 전문적인 식견을 자랑하는 이들이 제작하는 콘텐츠여서 정보도 새롭게 흥미롭긴 해도, 여기서도 과장이 넘치고, 임의의 판단으로 사태를 재단해 버리는 일이 부지기수다. 아마 최근 몇 년간 가장 오래 우려먹은 주제는 KF-21 공동개발국 인도네시아의 진퇴를 다룬 논의다.


‘퇴출’ 논의가 등장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 덕분에 군사 유튜버마다 자신의 임의적 판단을 기초로 이 문제를 찧고 까부느라 여념이 없는 것이다. 새로운 무기 체제에 대한 정보도 과장과 거품이 끼어 있는 듯 보인다. 이른바 ‘국뽕’ 기가 양념이 되어 구독자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유튜브에 포진한 ‘전문가’들의 전문성은 믿을 만한가
국제 문제를 다루는 데에도 과장과 거품은 빠지지 않는다. 일본과 중국, 베트남과 인도, 유럽과 북미 등의 국제 뉴스를 다루면서도 그만그만한 전문가들이 단정적인 어투로 ‘끝났다’, ‘파멸·괴멸’ 등의 어투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가 하면, 중국 정계의 변고를 다루는 데에도 거침이 없다. 중국이나 일본의 상황을 다루는 이들의 태도를 보면 당장 내일 그 나라가 무너지는 사태가 생겨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이들 전문가는 정말 얼마나 ‘전문’적일까.
그나마 국내외 뉴스와 우리의 사회현상 따위를 다루는 콘텐츠 가운데 이를 인문학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채널이 매우 흥미롭다. 그게 실체를 얼마나 제대로 분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대목이 많아서 가끔 20분 내외의 영상을 시청하곤 한다.
그러나 이 채널 역시 과장과 거품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한다. 낚시 제목에 해당하는 것이긴 하지만, 너무 쉽게 ‘몰락’을 쓰고, ‘쥐새끼 한 마리 없다’를 마치 양념처럼 써 댄다. 그런 단정적 표현을 너무 쉽게 쓰는 걸 보면 내용의 충실성을 오히려 갉아먹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유튜브의 효용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소용없는 일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거기서 무슨 지식이나 정보의 진수를 얻기보다는 소일삼아 소비할 수 있는 가볍고 일상적인 주제가 중심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래서 정색하고 유튜브 얘기를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충분히 설득력 있다.
그러나 정작 언론기관의 뉴스보다 유튜브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접하고, 거기서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이 난만한 21세기에 유튜브는 어때야 할까. 우리는 거기서 얻은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가벼이 넘기기엔 그 영향력이 가늠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말이다.
2026. 2.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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