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톱과 포커 따위의 ‘잡기’를 소 닭 보듯 하며 살아온 까닭

교단을 떠나기 전의 일이다. 연말에 생활기록부를 쓰려고 아이들에게 자신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열 가지씩 적어내라고 해서 받아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장단점을 깨알같이 적어냈는데, 뜻밖의 반응을 읽고 나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림 공부를 하는 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투박한 필체로 “인생을 재미없게 살고 있다”라고 썼다. 나는 열여덟 살 소녀가 생각한 인생은 어떤 것이며, 그 아이가 말한 ‘재미없는 인생’은 어떤 것일까를 잠깐 생각하다 말았다. 도대체 재미있는 인생이란 어떤 걸까.
‘재미없는 인생’이라면 나도 안 빠진다?
어떤 이들은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이른바 ‘주색잡기’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맨 앞의 ‘주(酒)’ 외의 나머지와는 무관하게 살아왔으니, 나야말로 인생을 ‘재미없게’ 살아온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재미란 건 주관적 판단일 뿐, 그게 인생을 규정하는 건 아닐 터이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나는 내가 인생을 재미없게 살아왔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색은 논외로 하더라도 ‘잡기’와도 정말 무관하게 살아왔다. 꼽아보면 ‘무관하게’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른바 ‘잡기(雜技)’의 대표적인 종목(?)인 화투는 말할 것도 없고 카드는 게임하는 방법도 전혀 모른다.

일찌감치 초등학교 시절에 민화투로 입문한 이래, 고스톱이나 ‘나이롱뻥’은 겨우 길이나 아는 게 고작이다. 카드는 평생 한 번도 만져 본 적도 없고, 동료들이 모이면 떠들썩하게 즐기는 ‘훌라’는 그게 카드놀이라는 거 외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악기도, 스포츠도 제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바둑이나 장기조차 둘 줄 모른다. 자라면서 그런 게임을 배울 만한 기회가 전혀 없었고, 그걸 따로 익혀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하모니카나 기타 같은 악기는 물론이거니와, 탁구나 테니스 같은 스포츠도 전혀 익히지 못했다. 배구공을 처음 만져 본 게 초임 학교에서였으니 말 다했다.
그럼 그런 잡기를 즐길 시간에는 뭘 했을까. 글쎄, 그 시절로 돌아가 온전히 복기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그 시간에 내가 한 것은 벗들과 담소하며 술을 마시거나, 일종의 강박에 시달리면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며 내 독서량이 엄청날 듯하지만, 그게 독서량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만 밝혀둔다.

이처럼 화투나 카드놀이와는 관계없이 ‘재미없게’ 살아왔지만, 화투나 카드 같은, 말하자면 과해서 ‘도박’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해서 일종의 변명이 필요하다. 일차적으로 나는 화투를 이용한 게임이나 놀이가 재미없어 즐기지 않았다. 두어 시간만 같은 짓을 하고 있으면 슬슬 지겨워지고, 하품이 난다면 그건 흥미가 떨어져서가 아니겠는가.
흥미 없지만, 일정 시간 참여, 소액을 잃고 물러나는 편
흥미는 없지만, 그래도 상대를 배려해서 그런 놀이에 일정 시간은 참여해 주어야 하는 때도 없지 않다. 특히 소액의 판돈을 걸고 하는 놀이에서는 본인의 뜻과 다르더라도 섞이는 게 우선되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때에 나는 작정하고 마음속에 정한 소액을 잃을 때까지 참가하는 선에서 내 몫을 다하곤 했다. 겨우 놀이의 규칙을 이해하는 게 고작이니 거기서 이기기는 힘 드는 일, 나는 짧게 끼였다가 소정의 액수를 잃고 뒷자리로 물러나는 방식을 택한 거였다.
화투 놀이가 도를 넘으면 도박이 되는데, 우리 어릴 적엔 그걸 ‘노름’이라고 불렀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돈이나 재물 따위를 걸고 주사위, 골패, 마작, 화투, 트럼프 따위를 써서 서로 내기를 하는 일”이라고 풀이하니 노름은 모든 도박성 놀이의 총칭인 셈이다. 노름에 빠진 이를 ‘노름꾼’이나 ‘노름쟁이’ 따위로 불렀는데, 1960년대 농촌에는 노름이 성행했다. 술과 노름으로 패가망신한 이들이 적지 않아서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은 펼치면서 이를 농촌 피폐의 원인으로 보기도 했다.

어머니가 끔찍히 싫어한 ‘노름’과 선친의 화투 놀이
그 시절엔 노름이라고 하기엔 과한 아주 소액을 걸고 초로의 가장들이 모여 심심풀이 화투를 치는 건 다반사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니 아버지는 50대의 장년이었다. 마을의 구멍가게 뒷방에 모인 전직 면장을 비롯한 마을 유지들이 화투를 치면서 소일하곤 했다.
나는 선친이 노름에 빠졌다기보다 그냥 소일거리로 동무들과 모여 소액을 걸고 화투를 쳤을 거로 생각한다. 그때는 물론,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화투 놀이가 어느 수준이었는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걸 ‘노름’으로 여긴 어머니는 끼니때가 되면 나를 가게 뒷방으로 보내 귀가를 독촉하게 했다. 그건 내가 가장 꺼리는 심부름이었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화투 놀이로 양친의 다툼도 적지 않았다. 늘 마지못해서 져 주는 아버지의 침묵으로 싸움은 끝나곤 했지만. 아마 내가 의식적으로 화투 놀이 따위를 소 닭 보듯 한 건 그런 유쾌하지 못한 기억 탓도 있었을 거였다. 우리 3형제 중에서 나를 빼곤 형들은 모두 화투를 보통 사람 이상으로 즐기었으니,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 나는 크면 화투 같은 건 안 칠 거야, 하고 되뇌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나도 아주 잠깐이었지만, ‘도박성 노름’에 빠진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 당시 아이들 사이에선 ‘불기’라 하여 당시에 1원짜리 동전으로 겨루는 놀이가 있었다. 구리 동전, 또는 납 동전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서로 번갈아 가며 숨을 내뱉어서 내 동전을 상대방 동전 위로 올리면,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숨을 모았다가 ‘파’ 하고 내뱉으면서 나온 입바람이 동전을 움직이는 이 놀이에 나는 잔뜩 빠졌다. 실력을 과신했던가,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큰 급우와 붙었는데, 나는 계속 지기만 해 가진 동전을 모두 잃었고, 나중에 주겠다고 하면서 게임을 계속해 결국 50원을 잃고 말았다. 50원은 그 당시 학교에서 희망자에게 판 태극기 1장 값이었으니 내겐 거금이었다.
동전 치기 내기로 입은 상처와 치욕
어머니에게 사정하여 50원짜리 지폐를 타서 승자에게 건넨 뒤, 나는 이후 도박성 놀이를 끊었다. 승부에 대한 집착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 패배 앞의 고통스러운 각성의 순간, 거금을 고스란히 건네주던 순간의 치욕감을 나는 의식적으로 잊으려 했던 거 같고 이후 자기방어의 본능이 그 순간을 자신의 기억에서 소거해 버렸었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내 자신의 내부에 도박에 빠질 수 있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거 같다. 그리고 나는 도회의 중학교로 진학해 외부자로 지내면서 특별한 교우관계를 갖지 못한 채 사춘기로 진입했고 이내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고교 때도 문예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기는 했지만, 나는 워낙 무일푼이라 그들과 일상적인 관계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내기를 거는 놀이에 아예 담을 쌓은 건 그런 사정도 영향을 주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병역을 마치고 복학한 대학에서도 가끔 학교 근처의 술집에서 소주를 마시는 것 외에 무슨 놀이를 즐겼던 기억에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사회에 나온 후에도 나의 여가 사용법은 달라지지 않았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아니면 집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게 다였는데, 여전히 궁색한 살림을 꾸리는 일도 내 몫이라 나는 가능하면 돈 쓸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화투 놀이가 벌어져도 나는 생각 없다며 빠지거나, 최소한의 액수를 잃는 거로 구실을 다하곤 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은퇴자가 되었고, 일흔을 넘기면서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내 삶의 장면들을 무심하게 떠올리곤 한다. 나이 들면서 가까운 기억은 희미한데, 오래된 기억만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흥미가 없다고 하고, 단지 체면치레로 소액만 잃을 요량으로 판에 끼고, 의도적으로 무심하게 잡기를 바라본 이유는 어쩌면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다.
이제야 깨닫게 된 ‘내기’와 ‘걸기’를 꺼린 이유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숨었지만, 기실 나는 ‘내기’와 ‘걸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기와 걸기를 두려워한 것은 그 승부에서 패배한 후에 내게 일어나는 일련의 감정의 변화와 심리적 치욕감 따위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리고 그런 승부에 집착하는 자신의 내면을 남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자신의 속내를 다시 확인해야 하는 걸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말이다.
소심하여 작은 일에도 발끈하는 성격이라, 속내를 감추려고 하여도 시나브로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곤 한다. 그걸 감추기 위해서 나는 짐짓 대범한 척, 무심한 척 자신을 가장하며 살았다. 그리고 이른바 ‘예기불안(豫期不安)’을 회피하기 위해 나는 화투를 비롯한 내기와 걸기를 꺼리게 되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반 시절, 상처로 남은 집착과 몰입 끝에 맞닥뜨린 패배와 그에 따른 치욕감, 자신의 내부에 내기와 걸기를 수용할 수 있는 경향성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게 된 그 기억에서 나는 도망쳐 온 게 아니었을까. 그러했든, 그러하지 않았든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그래도 내가 다시 화투판을 기웃거리거나, 새삼 카드놀이를 배우겠다고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예전보단 더 편안하게, 이미 삼천만 명이 즐기는 고스톱 같은 놀이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더는 그로 말미암은 좌절이나 상처를 받을 일은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2026. 1.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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