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미리사(1879~1955)

사진 속 여인은 동양인의 외모만 아니라면, 화려한 차림새가 19세기나 20세기 초반의 서구 영화에 나올 법한 모습이다. 구두에 코트를 입고, 보닛(bonnet)이라 불리는 챙 넓은 모자를 썼으며, 핸드백과 양산을 들고 선 여인은 차분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양산이 유행하게 된 것은 장옷이 사라지면서부터인데, 1920년 들어 신여성들이 거추장스러운 장옷은 내던졌지만, 얼굴을 다 드러내고 나다닐 순 없었기에 대신 양산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덕성여대 차미리사연구소 소장 한상권 교수는 설명한다. 사진은 차미리사의 30대 후반의 모습이라니 1915년 이후의 사진인데, 정말 당시 경성 거리를 저렇게 성장한 여성들이 나다녔다는 게 잘 상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섭섭이’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개신교회에서 ‘미리사’라는 세례명과 함께 근대 여성의 삶을 시작하고, 중국과 미국에서 각각 유학한 ‘신여성’이라는 그의 성장 서사를 생각하면 저 서구풍 차림새가 몸에 익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섭섭이’에서 ‘미리사’로
차미리사는 20세기 초의 한국 사회에서 여성해방운동의 선각자로 여성 교육의 확대에 힘을 다했고, 미국에서 교육 운동과 계몽운동, 국권 회복 운동에 참여했다. 돌아와서는 여성운동을 벌이면서 추상적인 고등교육보다는 일반적인 보통교육을 보급하는 데 중점을 두고, 실천적인 실업 교육에 힘썼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사람이었다. 아들을 바라고 있다가 딸을 낳자, 이름 대신 ‘섭섭이’로 불리었을 때 그는 이미 온전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이었다. 1895년 16살 때 혼인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남편과 사별하면서, 이른바 ‘소년 과부’로 불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주저앉았다면 그의 삶은 여느 홀어미의 그것과 다르지 않게 전개되었을 것이지만, 그는 고모의 권유로 상동 감리교회에 나가면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서는 법을 깨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만난 기독교 평등주의는 그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창이었을 것이다. 그는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여 ‘미리사(Mellisa)’라는 세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가 남편의 성씨를 따르는 서양식 이름 ‘김미리사’로 쓰다가 본래의 성을 써 ‘차미리사’로 쓰게 된 것은 1936년부터였다.
차미리사는 교우인 조신성*의 권유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를 보고서 용기를 얻어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재산도, 학력도 갖추지 못했지만, 그 시절의 교회는 신실한 교인에게 유학의 편의도 베풀어주었다. 그는 호머 헐버트 목사의 도움으로 1901년 중국 쑤저우(蘇州)의 감리회 소속 신학교에서 4년간 영어·중국어·신학 등을 공부했다. 가난한 유학 생활 중 뇌신경 병을 앓아 귀가 어두워져서 늘 보청기를 끼고 다녀야 했다.
* 조신성(1867~1952)은 진명여학교 교장, 근우회 평양지회장 등을 역임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교육자·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05년에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샌프란시스코에 첫발을 디딘 그는 1912년까지 8년 동안 미국에 머물렀다. 처음 6년 동안은 각종 사회운동에 헌신했고 마지막 2년은 본래의 목적인 공부를 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한인들이 많이 일하는 패서디나(Pasadena) 시의 휴양 호텔에서 객실 담당 종업원으로 학비를 모았고, 재미 한인사회와 교류를 시작했다.
‘을사늑약’ 뒤, 구국 활동 시작, ‘의혈 투쟁’ 주장
1905년, 떠나온 조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의 위기를 전해 들은 한인들이 교육 진흥을 목적으로 한 대동교육회*를 결성할 때 차미리사도 여기 참가하면서 한인사회의 구국 활동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 대동보국회 : 1905년 캘리포니아에 세운 한인들의 교육 진흥 단체로 회장 김우제, 총무 장경(1995 애족장)으로 구성됐다.
차미리사는 샌프란시스코 한인 예배당에서 이주 한인을 돕는 전도 부인으로 활동하면서 미 감리교 여선교회가 운영하는 여성과 어린이 피난처(Shelter) 겸 실업학교인 엘렌홈에서 한인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한인 소셜 워커(Social Worker)로 활동하면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이 활동으로 그는 개인의 구원보다 사회제도를 개혁할 일꾼을 훈련하는 교육기관과 동지를 모으는 게 사회운동의 관건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는 그가 조국으로 돌아와 일본 유학생들이 벌인 소극적인 계몽과는 달리 신앙을 중심으로 한 결속으로 추진하며, 실질적인 여성 교육을 시행하고, 자립을 목적으로 한 적극적인 실천 계몽운동을 펴는 바탕이 되었다.

1907년 대동교육회는, 정치 운동을 배제하면서 드러난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보국회’로 확대 개편되었는데, 차미리사는 스티븐스 저격(1908)*의 주역 장인환과 함께 여기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중앙 상임위원으로 기관지 <대동공보>의 발행에도 힘썼다. 1907년 11월 14일 <대동공보>에 기고한 논설 ‘상제*를 믿고 나라를 위할 일’에서 ‘이혈보국(以血保國)’, 즉 ‘피로써 나라를 지키자’라고 주장했다. [관련 글 : 샌프란시스코의 총성, ‘의열투쟁’의 첫 장을 열다]
*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이 대한제국의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독립 의거.
* 상제(上帝)란 당시 ‘천상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저 원수의 대포알에 우리 한국 독립 결과될 꽃봉오리라. 이내 몸은 대포알의 집이 될지라도 내 나라만 독립되면 나의 죽음은 꽃이로다. 동포 동포여 내가 참으로 고하노니 나라를 위하여 피 흘리는 것은 백성 된 의무요, 동포를 위하여 피 흘리는 것은 사람의 직책이라. 우리의 직책을 다하며 세상의 빛이 되고 나라에 꽃이 됩시다.”
그는 “동포의 고통을 외면하고 천국에 가길 소원하는 내세 지향적 영혼 구원 신앙, 불의한 현실 사회에 대해 무관심한 초월주의적 신앙, 정교분리 뒤에 숨어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는 경건주의적 신앙 모두를 비판”(한상권)하면서 이른바 ‘의혈 투쟁’의 소신을 편 것이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의 재판 법정 통역을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한 이승만이 해방정국에서 면담을 요청하자, 차미리사가 이를 단호히 거부한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차미리사는 1908년,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부인들과 함께 한국부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자녀들의 국어교육을 장려하고 동포 간 친목 증진을 목표로 한 한국부인회는 미국에서 조직된 첫 한인 여성 단체였다. 그는 난립한 재미 한인 단체들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부인회를 통해 정치적 중립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1910년 신학교 입학,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독립전쟁론’

1910년 8월, 일본의 한국 병합 소식을 뒤로 하고 차미리사는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 있는 스카릿 신학교(Scarritt College))에 입학했다. 스카릿 선교학교는 북 감리교에서 운영하던 2년제 특수 성경학교였는데, 이 학교 졸업생들은 사회적 정의, 범죄, 빈곤, 아동노동, 전쟁 등의 사회적 주제들에 대해 기독교 사상으로 접근한 사회복음주의자들이었다. 조국으로 돌아온 차미리사가 전개한 여성 운동에서 보여준 현실적 실천은 미국에서의 견문과 경험으로 체화한 신념의 결과였다고 해도 좋은 이유다.
1912년 여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차미리사는 배화학당에서 기숙사 사감을 겸하면서 성경을 가르쳤다. 배화학당에는 당시 식민지 현실에서 교육이 구국의 수단이라고 믿는 남궁억·이만규·윤치호·허헌* 같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동료 교사로 근무하는 곳이어서 차미리사는 이들에게서 당시 식민지 현실과 여성과 교육 문제 등에 관한 인식을 확장할 수 있었다.
* 남궁억은 황성신문 사장, 대한협회 회장, 배화학당 교사 등을 역임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언론인·교육자. 이만규는 송도중학교 교원, 배화여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사회주의자. 윤치호는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허헌은 일제강점기에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자, 빈민층을 변호하였으며, 해방 이후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정치인.
1919년 3·1운동 때는 교장이 수업을 단축하고 학생들을 일찍 귀가시킴으로써 학생 시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 3·1운동 1주기를 맞아 배화학당 내부에서 다시금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20년 3월 1일 새벽, 40여 명의 여학생들이 학교 뒷산 필운대와 교정에서 만세를 외쳤고, 그중 24명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으로 교장이 갈리고 차미리사도 사감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 조직해 본격적인 여성 운동 펴


1920년 2월에 차미리사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여자교육회의 중심 활동은 여자 야학과 잡지 <여자 시론(時論)> 발행, 그리고 매월 시행하는 월정 강연회였다. 여자 야학은 차미리사가 이미 1년 전인 1919년 4월, 자신이 다니던 종교교회에서 운영하던 노동야학강습소가 3·1운동 뒤에 폐지되자 여자 야학을 세우고 종각 밑에서 문맹자나 여성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바 있었다. 이 야학은 조선 최초의 여성 야간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여자교육회의 창립을 시작으로 조선여자청년회(1921.4.) 경성여자기독청년회(Y.M.C.A. 1922.12.), 광진부인회(1923.9.), 조선여성동우회(1924.5.), 경성여자청년회(1925.2.) 등 여러 여성 교육기관이 창립되었는데, 차미리사의 조선여자교육회는 1920년대 조선의 교육 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여자교육회는 1922년에 조선여자교육협회로 변경하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과목, 재봉반과 상업반을 추가하였으니, 이는 그가 꾸준히 주장해 온 여자 실업 교육의 시작이었다. 또 교육회가 벌인 대표적 교육 계몽운동으로는 1921년에 전국 순회강연 활동으로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는데, 이는 전국 각지에서 여성들의 뜨거운 화답을 받았다.
강연의 주제는 ‘조혼과 축첩 폐혜’, ‘가정 개조’, ‘여성 교육’, ‘육아 교육’ 등이었는데, 강연의 내용이 여성들의 한과 분노를 일깨울 때, 여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은비녀, 금가락지를 뽑아서 성금을 내놓는 등 그것은 조선 여성 해방운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강연 이후 차미리사는 전국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여성운동가로, 여성 지도자로 자리를 잡았고 전국의 강연에서 걷힌 모금은 약 5천 원에 이르러 앞으로 여성 교육이 가능한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23년 3월, 조선여자교육협회 산하 부인야학강습소는 이 건물에서 ‘근화(槿花)학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주간부에 200명, 야간부에 100명의 학생을 모집하였다.

1923년 겨울에도 연극단을 만들어 삼남을 돌며 모금한 5천 원으로 1924년 새 교사를 장만하고 이전하여 기본의 보통학교 과정, 상업과, 재봉과 외에 새 교과로 음악과와 영어과를 신설했다. 또 근화학원에 외국어 강습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당시 경성부 내의 여학교들이 대체로 ‘현모양처’를 이상으로 삼는 교육목적이었던 반면, 그는 실제 사회에서 실용 목적의 기술과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근화학원으로 본격 여성 교육, ‘여성의 해방은 경제적 자립에서 시작된다’
차미리사는 “여자의 해방은 여자가 상당한 직업 생활에 들어가 스스로 자기의 생활을 지배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 “부인 해방이니 가정 개량이니 하지마는 다 제 손으로 제 밥을 찾기 전에는 해결이 아니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여성의 직업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는 경제적 자립이 전제되어야 여성해방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남편과 사별 후 겪었던 어려움과 중국과 미국에서 고학으로 공부할 때의 경험으로 체득하였을 것이다.
1925년에 근화학원은 ‘근화여학교’로 각종 학교 인가를 받았고, 1934년에는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근화여자실업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가 꿈꾸었던 ‘민족 여성·근대 여성·실업 여성’을 키워내는 일이 첫발을 뗀 것이었다. 1936년 근화여자실업학교가 20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던 자리에서 차미리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먼저 현명한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아를 잃은 곳에 무슨 참된 아내가 있으며, 진실한 어머니가 있겠습니까?”

근화의 교훈은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였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자주성’과 ‘존엄성’, 그리고 실천적 삶을 강조한 것이었다. 차미리사는 교정에 애국·애족의 상징인 무궁화나무를 심고 교복 치마도 무궁화 빛깔로 물들여 입게 하여 학생들 개개인이 무궁화꽃이라는 자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1938년 명칭을 덕성(德成)학원으로 바꾸어야 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 동원 체제를 구축한 일제는 학교장도 순종적인 인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이미 예순을 넘긴 차미리사는 결국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송금선*에게 교장직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 송금선(1905~1987)은 해방 이후 덕성여자대학교 학장, 덕성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여성계 지도자로 떠오르며 일제의 식민정책 홍보에 앞장섰다. 신문·잡지에 일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여성의 전쟁 협력을 독려하는 글을 썼으며 활발한 강연을 펼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었다.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사학 설립자
2009년 정부 발표한 교육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자 22명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근대 여성 운동과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불리었던 사학 설립자들이 많다. 고황경(서울여대), 박인덕(인덕대학), 배상명(상명대), 이숙종(성신여대), 황신덕(추계예술대, 중앙여중고) 등이 그들이고, 김활란은 이화여대의 ‘초대 총장의 신화’로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보다 훨씬 큰 지배력을 지닌 인사로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김활란(1899~1970)은 대표적 여성 교육자로 차미리사와 견주어지는 부분이 많다. 두 사람은 근대 여명기에 출생해 기독교인으로 각각 세례명을 이름으로 쓰게 되었고, 미국 유학을 다녀와 여성 교육에 투신하여 덕성여자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길러냈지만, 그들의 삶은 1930년대 후반에 완전히 엇갈렸다.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하에서 이화의 이인자였던 김활란은 일제에 협력하면서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지만, 같은 시기에 근화여학교의 경영권을 잃은 차미리사는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울분을 삭이며 은거해야 했다. 김활란은 애국금차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전시 동원을 위한 관제 조직에 빠짐없이 참여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징병제를 찬양하는 등 친일 부역 활동을 벌였다. [관련 글 : 국민총력전을 위한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 애국금차회(金釵會)는 1937년, 친일 귀족의 부인들과 중견 여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발족한 여성 단체다. ‘금차’는 금비녀로 이 단체는 군인 환송과 환영, 군인 가정의 위문·조문 격려, 국방비 헌납 등이 목적이었다.
해방 이후 김활란은 이승만과 손을 잡고 단독정부 수립 운동을 벌였지만, 차미리사는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김구 진영에 합류하였다. 해방 정국이 단독정부 수립으로 기울어지자, 남북의 단독정부 설립을 반대하고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성명서에 서명한 108인 중 차미리사는 단 한 명의 여성이었다. 일찍이 1907년에 의혈 투쟁을 주장한 바 있는 그는 해방 공간에서도 남북 분단을 반대한 유일한 여성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분단을 반대한 여성, 여성들에게 ‘닫힌 교육의 문’을 연 사람

광복 뒤, 차미리사는 그동안 계획해 왔던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하여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그 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1955년 6월 1일, 차미리사는 “내게는 한 가지 한이 있다. 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종 때까지 통일 정부를 세우지 못한 것을 한한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여성으로서 차미리사는 기득권을 누리면서 자기만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성의 허영심이라거나,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여성 교육을 모든 여성에게 제공하는 닫힌 문을 연 사람이었다. 그는 교육을 여성의 생존 문제라고 생각하고, 여성이 온전한 인격체로 평등하게 존중받을 수 있는 수단이라 믿었던 사람, 특히 남성의 종속에서 벗어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실업 교육을 중시한 교육자였다.
그는 일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한 여성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1920~30년대 여성 운동·교육 운동, 민족운동을 이끈 지도자로 차미리사가 재조명되면서 그에겐 뒤늦은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해방되고 반세기에 다시 7년이 지난 2002년이었다.
덕성여자대학교에는 그의 어록 가운데 “수레 두 바퀴와 같은 남녀의 관계가 한쪽으로 기울어졌으니,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남자의 덧붙이가 되지 말고 스스로 삶을 일궈 나가야 한다.”라는 글귀가 돌에 새겨져 있다. 그가 간 지 70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그 울림이 예사롭지 않은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2026.1. 29.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독립운동가, 그 청촌의 초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대한 독립’과 결혼한 조선의 ‘혁명 여걸’ (2) | 2026.02.03 |
|---|---|
| 단발머리의 ‘모던걸’, 또는 ‘코레예바’의 사랑과 혁명 (1) | 2026.01.31 |
| ‘동대문 철물점의 홍길동’, 단신으로 일경 수백 명과 벌인 전설적 총격전 (2) | 2026.01.11 |
| 그 불꽃 같은 삶이 일러준 “꺼진 등에 불을 켜라” (4) | 2025.12.24 |
| 일제 감시 대상 12310번, 의열단원 김익상의 삶과 투쟁 (1) | 2025.11.29 |
댓글